414화. 옥회산의 방문
“사부님, 계 선생님. 차를 끓여왔습니다!”
중년의 의원이 두 손으로 차를 받쳐 들고 후원에서 돌아왔다. 하지만 약방 안에서는 자신의 사부가 홀로 앉아 한 두루마리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어? 사부님, 계 선생님은요?”
동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시선은 두루마리에 고정한 채로 대답했다.
“댁으로 돌아가셨다. 원래는 잘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셨지.”
“아…….”
그러자 중년 의원이 실망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쟁반을 진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동선을 위해 차를 한 잔 따르면서 호기심 어린 얼굴로 두루마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사부님, 그게 뭔가요? 계 선생님께서 주신 건가요?”
“그래, 네 태사부(*太師父: 스승의 스승)께서 생전에 계 선생님께 내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신 것이었다더구나. 한 도문에서 내려오는 양생공이라는데, 일련의 동작들로 이루어져 있지. 어렵지는 않지만, 꾸준히 해야 한다더구나.”
중년 의원이 그림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이 그림만 보고서 제대로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러자 동선이 마침내 고개를 돌려 자기 제자를 바라보았다.
“보기만 해서는 당연히 안 되고 수련을 해야지. 그런 후에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계 선생님께 가서 여쭤보면 되겠지.”
“아아…….”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양생공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약재를 사거나 진찰을 받으러 온 손님들이 하나둘 방문하자 다시 일을 시작했다.
* * *
그 시각 계연은 이미 거안소각에 돌아와 옥회산 사람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계연이 무언가 신묘한 능력으로 점을 치지 않고도 그들이 방문할 시각을 알아차린 것이 아니라, 그저 위원생과 위무외의 기운에 감응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엄격히 말해 아직 바둑돌이 되지는 않았으나,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씨 부자의 목적은 명확하게 계연을 방문하는 것이었으니, 그 거리가 점차 가까워짐에 따라 계연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은 덕승부의 위씨 집안은 물론이고, 영안현에서도 계연이 돌아왔다는 걸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그 두 부자가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은 옥회산 사람들과 함께 온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계연은 그들이 행여나 빈집에 먼저 도착할까 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천우방에 들어와 아직 구석진 거안소각으로 다가가기도 전에, 계연은 이미 시끌벅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거안소각 안의 작은 글자들이 서로 입씨름하고 떠들어대는 소리였다.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아서, 보통의 행인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설령 그 소리를 들었다 해도,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판별해내지 못할 것이다.
끼익-.
대문이 열리고 계연이 나타나자, 소란스러움이 일시에 뚝 그쳤다.
나타난 것이 계연임을 확인한 글자들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휴우, 어르신이었어.”
“깜짝 놀랐네.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 발견된 줄 알았잖아.”
“어르신, 왜 걸음 소리조차 안 내고 다니세요?”
“우리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걸음 소리가 난다 해도 어떻게 듣겠어?”
“그럼 어떡해? 어르신이 오는 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좀 조용히 하면 되지!”
“넌 조용히 할 수 있어?”
“당연히 할 수 있지!”
“무슨, 네가 제일 시끄럽잖아!”
“참나, 내가 제일 조용해. 오히려 네가 시끄럽겠지. 여기서 제일 시끄러워!”
“네가 더 시끄러워!”
“네가 더 시끄러워!”
…….
“후우……. 싸우지 말거라.”
소란스러운 가운데 계연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거안소각이 대번에 고요해졌다. 작은 글자들은 탁자 위, 문틀 위, 땅바닥, 나뭇가지 어디에나 있었다.
“잠시 후에 선문에서 사람들이 올 거야. <검의첩>에 들어가 있을래, 아니면 밖에 나와 있을래?”
“바깥에 있을래요!”
얻기 힘든 기회였기 때문에 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좋아, 그럼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 한다. 손님들을 놀라게 하면 안 돼. 알겠니?”
“어르신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작은 글자들은 동락현 토지신에게 배운 건지 어디서 배운 건지, 계연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계연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드러낼 수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하, 알겠다. 그럼 어디 적당한 곳에 숨어 있으렴.”
계연은 이 글자들이 어떻게 나올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글자들은 온종일 떠들어대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이들은 아니었다.
계연의 명령을 받든 글자들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모두 대추나무 위로 올라갔다.
종이학마저 그들을 따라 대추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곧이어 다시 계연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생각해보니 옥회산 사람들에게 가서 소식을 알린 것이 저인데 뭐 하러 숨겠는가?
* * *
덕승부 어느 상공에는 거원자, 양명, 구풍 세 사람이 함께 구름을 탄 채 바람을 몰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세 사람을 함께 태워서 가고 있었다. 바로 양명의 여제자인 상의의와 구풍의 유일한 제자인 위원생, 그리고 위원생의 부친인 위무외였다.
원래 위무외는 계연을 방문하는 계획에 껴있지 않았으나, 위원생이 구풍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계 선생님이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일행에 끼게 되었다. 위원생은 두 사람이 알게 된 지도 오래되었고 관계도 가까운 데다, 자신이 옥회산에 오게 된 것도 아버지가 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자신의 아버지를 데려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건의한 것이다.
위원생의 건의는 당연히 그대로 통과되었다. 계연과 교분을 나누는 데에 있어 옥회산은 항상 일관된 견해를 유지했다. 바로 최대한, 무슨 방법을 써서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옥회산 수사들의 말에 따르면 인연은 말 그대로 연 따라 흘러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인연과 상관없이, 선인들도 가꿔나가야 할 인간관계라는 것이 있었다.
처음으로 하늘을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위원생은 여전히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가 이렇게 흥분한 데에는 이번에 가는 데가 거안소각이라는 이유가 컸다.
“아버지, 사부님. 거안소각은 그냥 보통의 저택인가요, 아니면 안에 사실 동천(洞天) 같은 게 숨겨진 신비로운 곳인가요? 어쩌면 계속 덮여 있다던 그 우물이 바로 동천의 입구인지도 몰라요. 그곳에 들어가면 신천지가 펼쳐지는 거죠.”
위무외는 입을 비죽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구풍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네가 직접 계 선생님께 물어보렴. 우리가 물어보는 건 조금 실례겠지만, 너는 괜찮을 거다.”
“헤헤, 사부님도 알고 싶으신 거죠?”
구풍이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일종의 묵인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날아가던 거원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거원자는 곧 지척에 펼쳐진 우규산을 바라보며 물었다.
“산세가 준엄하지만 험하지는 않으며, 봉우리는 많지만 빽빽하지는 않으니, 건곤(*乾坤: 천지(天地))을 품고 있구나. 저 산의 이름이 무엇인가?”
위무외가 즉시 일어나 이렇게 대답했다.
“거 진인께 아룁니다. 저 산의 이름은 우규산으로, 계 선생님께서 아홉 명의 소협을 구하여 함께 내려왔다는 바로 그곳입니다. 이곳은 아마 계 선생님이 숨어 수행하던 곳인 듯합니다.”
거원자가 위무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 있는 말이오!”
거원자는 저도 모르게 우규산 산세를 자세히 관찰했다. 조금도 놓치고 싶지 않아, 자세히 보다 보니 특이한 거석(巨石)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돌 위로는 영기가 모여들어 은은한 빛이 흐르는 것 같았고, 심지어 천위(*天威: 하늘의 위엄)의 기운마저 묻어났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 내려서지 않고 멀리서 스쳐 지나갔다. 혹 계 선생의 금기를 거스르는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위무외는 그들 일행 중 가장 뒤에 서 있었다. 구름 위에 뒷짐을 지고 서서 발아래 펼쳐진 산하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속에 호기로운 생각이 솟아났다.
‘이게 바로 선인의 수단이구나. 권세, 재물, 무공 따위를, 어찌 발아래에 산과 하천을 펼쳐두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규산을 지난 그들은 곧이어 영안현 밖에 다다랐다.
“거 진인, 사형. 저희는 계 선생님을 뵈러 온 것이니, 존경심을 보이기 위해 영안현 밖에 내려서 걸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구 진인의 말이 맞소. 그렇게 하지!”
“그러자꾸나!”
그들은 현성 밖 수풀 근처에 내려서서 관도(官道)를 따라 영안현으로 걸어갔다.
이각(30분) 정도가 지난 후, 그들은 이미 현성 안으로 들어와 천우방 가까이 걸어가는 중이었다. 방문(坊門) 맞은편에는 국수 노점이 세워져 있었다.
“저기가 바로 손기노점이구나! 계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국숫집이에요!”
위원생이 이렇게 소리치자 위무외가 이어서 말했다.
“맞습니다, 저곳이 바로 손기노점입니다. 저 집은 노면(*鹵面: 육류·달걀 따위로 만든 국물에 녹말가루를 풀어 만든 진한 국물을 부어 만든 국수)과 내장탕을 아주 잘하는데, 바로 몇 대를 거쳐 전해진 손맛이지요. 위씨 집안에서 은밀히 알아본 결과, 저 노점에는 한 가지 규칙이 전해져 온답니다. 바로 언제 어느 때이든 국수 한 그릇과 내장 한 그릇을 남겨두는 것이지요. 계 선생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드실 수 있게끔 말입니다.”
위무외의 설명을 들은 거원자를 비롯한 세 수사는 무척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저 집안사람들이 연을 맺을 줄 아는군!”
“그렇네요, 범인(凡人)에게는 범인의 지혜가 있다더니.”
“어서 가지요!”
그들은 천우방을 향해 다가가며 손기노점을 지날 때는 유심히 그곳을 살폈다. 위원생은 한 발짝 다가가 바삐 움직이는 손복에게 공수한 뒤 물었다.
“주인장께 말씀 좀 묻겠습니다. 계 선생님이 지금 댁에 계시는지 아니면 어디로 나가셨는지 혹시 아시나요?”
손복이 그의 일행을 바라보자, 그 조합이 무척이나 비범한 이들이었다.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이 이상했지만, 딱히 나쁜 기운을 느끼진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계 선생님은 분명 댁에 계실 겁니다. 점심에 여기서 국수를 먹고 현성을 좀 거닐다가 반각(7~8분) 전에 돌아오셨거든요.”
그러자 위무외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인장. 이건 그냥 제 성의이니 받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며 그는 노점 앞으로 다가가 당오통보 두 개를 내려놓았다.
“어어, 아닙니다!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물으셔서 대답한 것뿐인데요!”
“괜찮습니다. 그냥 계 선생님 대신 국숫값을 한번 내드렸다고 생각하세요.”
위무외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일행을 따라 천우방으로 들어섰다.
위무외가 이토록 능숙히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고 옥회산 진인들이 내심 감탄했다. 위원생은 의혹에 찬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 왜 고작 10문(文)을 주신 거예요? 은자 몇 냥이 아니고요?”
위무외가 웃으며 위원생을 바라보았다. 자기 아들은 아직 이렇게 서툴렀다.
“하하, 원생아, 이게 바로 처세(處世)라는 것이다. 10문이 아니라 은자였으면 그 사람이 받지 않았을 거야. 스스로 잘 생각해보거라.”
그러자 위원생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