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꿀 결정(蜜晶)을 넣은 차
천우방 골목은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거안소각은 가장 구석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 적은 방향으로 골라 걸어가면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거안소각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대추나무가 마치 커다란 화개(華蓋)처럼 뜰을 뒤덮고 있었다.
“도착했구나.”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서서 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은 뒤 거안소각 대문 앞으로 향했다. 대문은 살짝 닫혀 있었고, 그 위의 편액은 금방 쓴 것처럼 먹색이 진했다.
“선생의 글씨는 정말 대가(大家)라고 칭할 만하구나. 신묘하도다!”
위무외가 낮은 소리로 이렇게 감탄하자, 구풍과 양명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무외는 앞으로 한 발짝 나가 거안소각의 문을 두드렸다. 거원자만이 여전히 편액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때때로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똑똑똑-!
“계 선생님, 옥회산에서 선생님께 인사 올리러 왔습니다!”
계연은 일찍부터 찻물을 준비하고 뜰에서 기다렸던 터라, 얼른 대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 서 있던 여섯 사람이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리 예를 차리실 필요 없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차와 간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거안소각에 오면서 고인(高人)의 거처를 방문한다는 느낌보다는, 잘 아는 사이의 집에 손님으로 방문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안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다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진인 세 사람과 계연만 돌의자에 앉을 수 있었고, 다른 세 사람은 의자에 앉거나 나무로 된 걸상에 앉았다.
계연은 전혀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직접 그들을 위해 차를 따라 주었다.
가장 먼저 따른 차가 놓인 곳은 당연히 옥회산에서 가장 수행의 경지가 높은 거원자의 앞이었다. 이에 거원자는 과분한 대접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거원자는 감사를 표한 후에 막 차를 한입 마시려다가, 돌연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바라보았다. 의혹에 찬 표정으로 한동안 대추나무를 살피던 그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검의첩> 위의 글자들이 스스로를 숨기는 신묘한 수단은 그야말로 타고난 것이었다. 때로는 계연조차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을 찾지 못했다. 얼마간 익숙해진 다음에야 지금처럼 그들의 모습을 샅샅이 발견해낼 수 있었다.
거원자는 수행을 닦은 지 7, 8백 년이 된 옥회산의 대진인으로서, 예전에 계연이 만났던 노염생보다 그 도행이 약간 뒤떨어지는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작은 글자들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원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나무를 올려다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서 자신의 착각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착각’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그의 마음속에 적당한 해석이 떠올랐다.
‘아마 이 대추나무가 무척 비범하기 때문일 것이다. 듣기로 이 대추나무는 이미 영지를 얻었다고 했다. 비록 정령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거안소각의 나무이니 필경 비범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조금 전 느낀 기시감은 분명히 이 대추나무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거원자가 따로 묻지 않았으니 계연도 그것을 못 본 척했다. 그는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자리에 앉은 모든 이들에게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계연은 찻물을 따르면서 이들을 조금씩 관찰하고 있었다. 거원자와 구풍은 둘째치고, 양명진인은 이번에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엄격하고 깐깐해 보이는 외모였지만, 예전에 만났던 두 동자를 생각해보면 제 사람을 무척 감싸드는 편인 것 같았다.
상의의는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욱 아리따워졌고 태도도 대범했으나, 고맙다고 인사하는 목소리가 모깃소리만 한 것으로 보아 계연을 약간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위원생은 어느새 체격이 튼실한 청소년으로 자라있었다. 예전의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은 사라졌으나, 눈빛만은 여전히 영특해 보였다.
위무외는 예전 그대로인 듯 보였지만, 그가 내뿜는 기운으로 보아 마음에 무언가 변화가 있는 듯했다.
위원생에게 차를 따라주자, 그는 다급히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계연에게서 차를 받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을 델 테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보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연도 걱정하지 않고 찻잔 안으로 찻물을 부었다.
차를 마시기 전에 위원생은 이미 탁자 위에 놓인 다과를 몇 점이나 집어먹은 뒤였다. 하지만 맛이 특별하거나 하진 않았고, 그저 일반적인 다과였다. 계연이 따라준 차도 냄새를 맡아보니 특별히 영기가 녹아들어 있다거나 하진 않았다.
위원생은 실망하지 않고 눈을 도르륵 굴려 차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계 선생님, 저희 위씨 집안에 차밭이 여러 곳이 있는데, 모두 좋은 찻잎이 나거든요. 그걸 선생님께 조금 보내드리면 어떨까요? 참, 저희 집안에 다과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들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도 이미 그 손맛은 아실 거예요. 그중 두 사람을 영안현으로 보내 선생님을 위해 따로 다과를 만들게 할까요? 당연히 거안소각에 묵지는 않고 현성 안에 그들이 따로 묵을 만한 곳을 찾아 둘 거예요.”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위원생의 말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그는 즉시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그러자 계연이 찻주전자를 거둬들인 후 웃으며 대답했다.
“흥, 내가 접대하는 차와 다과가 모두 맛이 없다는 뜻이로구나!”
“어찌 감히요! 저는 그저 영안현에서는 가장 좋은 품질의 것을 구하기가 힘들다는 뜻이었어요. 그에 비하면 덕승부가 좀 더 낫겠지만, 그래도 저희 집안만 못하니까요. 그렇죠, 아버지?”
위무외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 겸연쩍은 얼굴로 계연을 향해 양손을 서로 맞잡고 인사했다.
“계 선생님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제 아들놈의 말버릇이 좋지 못합니다.”
“하하하, 위씨 집안 가주께서는 사람 속내를 귀신처럼 꿰뚫어 본다더니! 가주께서도 실은 제가 화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계시잖아요? 어쨌든 곧 새해인 데다가 처음으로 방문해 주셨으니, 저도 좋은 걸 대접하도록 하죠.”
계연은 기분이 좋아져서 웃는 얼굴로 주방으로 향했다.
계연이 가자마자 위무외는 즉시 위원생에게 꿀밤을 때렸다. 그러자 위원생이 ‘아이고!’하고 엄살을 부리더니 구풍의 손을 잡아끌며 투정했다.
“사부님, 아버지가 저를 때렸어요!”
“맞을 만하지. 어른 앞에서 그리 함부로 입을 놀리면 쓰나!”
구풍이 웃으며 그를 꾸짖었다. 자신의 금쪽같은 하나뿐인 제자가 계 선생님과 이토록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속으로 무척 흡족했다. 그래서 조금의 걱정도 없이 웃으며 그를 꾸짖을 수 있었다.
자신과 제 사형인 양명뿐만 아니라, 거원자 선배라 해도 계 선생 앞에서 저토록 편하게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사질(師侄)이 저토록 말을 잘하고 영특하니, 분명 위 선생께서 잘 키워내신 덕이겠네요!”
양명진인이 위무외를 향해 이렇게 말하자 위무외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하하하하, 아이라면 저리 활발해야지. 우리 옥회산도 그 덕에 생기발랄해졌지 않은가…….”
거원자도 수염을 쓸어내리며 위원생을 칭찬했다. 그리고 다시 뭐라고 입을 떼려다가 휙 고개를 올려 대추나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머리 위에서 속닥거리는 듯한 소리와 희미한 호흡과 함께 급박하게 끊긴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거 진인, 무얼 보십니까?”
양명이 이렇게 물으며 고개를 들어 올려 대추나무를 자세히 관찰했다. 나무에서 특별한 구석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대신 잎사귀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불그스름한 무언가를 포착했다.
‘화조(*火棗: 전설 속의 선과(仙果)로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함)다!’
양명의 뇌리에 순간적인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소문으로는 계 선생의 거안소각에 자라는 대추나무는 무척 비범하여, 영지를 가진 것은 물론이고 귀한 영근목(靈根木)이기도 하다고 했다.
영근목이라는 것은 영과(靈果)를 맺어내는 초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는 어떤 초목이든 이를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귤나무 한 그루가 정령이 되었다 해서 그 나무가 영근목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달린 귤에는 어느 정도 영기가 담겨있긴 하겠지만, 진정한 영과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영근목에 맺히는 영과는 각기 다른 신통함을 가지고 있었다. 영근목이 되려면 나무 자체에도 타고 난 무언가가 있어야 하며, 어떤 희박한 확률로 일어나는 계기가 필요했다. 이 계기는 영기가 얼마나 짙은지, 법력이 얼마나 강한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 현묘하고도 현묘한 어떤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 그 계기는 어떤 이가 나무 아래에서 금(琴)을 타는 일일 수도 있고, 천뢰(天雷)와 같은 하늘이 내린 재난일 수도 있었다.
“거 진인께서는 저 화조를 보고 계시는 건가요?”
그 말에 거원자는 다른 이들이 자신 때문에 모두 고개를 들어 대추나무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화조에 대해서는 내 일찍이 들은 바가 있지. 오늘 보니 확실히 비범하군. 자네들이 어찌 느낄지는 모르나, 이 거안소각은 정말로 비범한 곳이라네.”
거원자가 주방이 있는 방향을 흘끗 바라본 뒤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대추나무 아래에 모여든 영기의 농도는 우리 옥회성경에 뒤지지 않을 정도라네. 게다가 이 대추나무는 목(木)과 화(火)가 상생하는 상을 지녔지. 자신을 스스로 담금질해 영성(靈性)을 만들어내다니, 대추나무의 공로가 크군.”
“예? 영기라고요?”
상의의가 의혹에 차 이렇게 물어왔다. 사실 그녀뿐만 아니라 위원생과 위무외도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구풍과 양명도 눈썹을 찡그린 채로 듣고 있었다.
“하하, 그러니 내 거안소각이 비범하다 하지 않았나. 계 선생께서 머무시는 곳인데 어찌 자네들이 쉽게 무언가를 꿰뚫어 볼 수 있겠나? 저 밖에 걸린 편액에도 실은 신묘함이 숨겨져 있지. 그 신묘함이 비추는 곳에는 천지의 허실(虛實)이 드러날 것이네. 자네들이 느끼는 것은 실제의 백 분의 일에 불과할걸!”
거원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고는 다시 한번 머리 위로 시선을 돌렸다.
‘방금 내가 느낀 것이…… 화조는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떠올린 거원자는 곧 자신의 생각에 소스라치듯 놀랐다. 영과가 그 정도의 지경에 이르렀다면,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한번 이런 생각이 한번 떠오르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정답인 것 같았다. 조금 전 느낀 감각은 아주 작고 번잡스러웠다. 대추나무 한 그루의 기운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했고, 저 위에 수없이 달린 화조라면 좀 더 가능성이 컸다…….
“오래 기다리셨네요.”
계연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끊어냈다. 계연은 주방에서 뚜껑 덮인 작은 도자기로 된 단지를 들고나왔다.
“일단 남은 차는 모두 마시고, 이걸 맛보세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찻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다시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는 작은 숟가락으로 단지 안에 있는 무언가를 두 숟가락 덜어 찻주전자 안으로 섞었다.
사람들은 그게 투명한 알갱이 같은 결정체임을 알아보았다. 그 단지에서는 은은한 단내가 전해졌다.
“선생님, 이게 뭔가요?”
위원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저것이 설탕과 비슷한 것임을 알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계연도 많이 넣기는 아까워서 딱 두 숟가락 넣은 뒤 다시 작은 단지의 뚜껑을 덮었다. 그리고는 머리 위를 뒤덮은 대추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대추나무는 매년 꽃을 피우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예전에 이 대추나무에 꽃이 만개했을 때, 벌떼를 이용해 꿀을 채집해 두었어요. 이 단지 안에 든 것은 그 꿀의 결정인데, 아무래도 어딘가 신묘한 구석이 있는 듯하더군요.”
계연은 반 정도 남은 찻주전자 안의 찻물을 흔들어 꿀 결정이 고르게 퍼지도록 했다.
“자, 이제 이 차를 한번 드셔보세요.”
이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한번 손님들을 위해 차를 따라주었다. 모두에게 한 잔씩 따라주고 나니 찻물도 마침 바닥을 보였다.
찻주전자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잔에 찻물을 따르고 나니 그 농밀한 향기가 주위로 퍼져나가 손님들이 군침을 삼키게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