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연말 선물
계연은 휘날리는 금갑 역사의 노란 두건과 두 발이 지면과 맞닿은 부분, 역사의 입과 코 등을 살폈다.
글자들의 말대로 이 역사는 숨을 쉬고 있었다. 비록 빈도수가 무척 낮고 내뱉는 숨이 길었지만, 이는 분명한 호흡이었다. 역사가 빨아들이는 것은 거안소각 내의 영기였으며, 금갑역사의 두 발이 닿은 지면에서는 땅의 영기가 느껴졌다.
이는 이 금갑 역사가 생명이나 영지를 얻었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무척 신기한 현상임은 틀림없었다.
예전이라면 역사의 소환이 지속되려면 계연의 법력에 완전히 의존해야 했다. 물론 역사의 두 발이 땅에 닿은 순간에는 법력의 소모가 느렸지만, 일단 역사가 땅을 벗어나면 계연의 법력 소모가 무척 커졌다. 당연히 그동안에도 역사는 주위의 영기와 대지의 토령을 흡수할 테지만, 결론적으로 계연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법력을 소모해야 했다.
그러나 이 역사는 무언가 달라진 데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이 금갑 역사의 다른 능력에도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전보다 더욱 안정적으로 역사의 소환을 지속할 수 있게 된 것은 틀림없었다.
“그럼 오늘 밤은 여기에 서 있도록 해라. 영기라면 거안소각에 부족하지 않게 있으니까.”
계연은 금갑 역사에게 이렇게 말한 뒤, 기지개를 피고서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하암……. 해가 뜨겠네, 나는 이만 자러 가야겠다. 모두 조용히 하렴.”
어르신이 드물게도 직접 이렇게 명을 내리자, 작은 글자들은 즉시 말을 멈췄다.
계연은 문가에서 소매를 휘둘러 침실 안에 있던 잿가루를 전부 주방의 조대(竈臺) 아래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는 뜰에 조용히 모여있는 글자들을 한번 바라본 뒤 문을 닫았다.
침상에 앉은 계연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고, 법안을 뜨고서 벽을 꿰뚫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 밖의 글자들은 다시 몇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군대를 배치하고 진을 쳤다(排兵布陣)’. 그것은 단지 몇 글자를 조합하여 뜻을 나타내는 그런 간단한 형식이 아니었고, 각 글자 사이의 흐름과 뜻의 전환이 깊이 생각해 볼 만했다.
어쩌면 글자들 스스로는 특별한 점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계연에게 있어 무척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계연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지 글자라고 해서 그들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계연이 역사 부적을 보수하기 전부터 글자들은 이미 이렇게 서로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었다. 계연은 사실 그때부터 이미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참이었다.
작은 글자들은 서로 소통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장난을 치는 와중에도 서로 다른 뜻을 가진 글자와 비슷한 뜻이지만 서로 다른 글자를 기초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다양한 ‘진법의 변화(變陣)’를 만들어냈다.
잠시 그들을 관찰하던 계연은 다시 닭이 홰칠 시각이 되자, 마침내 피곤함을 느꼈다. 계연은 머리 위의 옥비녀를 뽑아 한쪽에 잘 두고서, 긴 머리를 어지럽게 늘어뜨린 채로 머리를 뉘었다.
계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지만, 곧바로 잠들지는 않고 그간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막 성에 돌아왔던 순간, 손기 노점, 천우방 쌍정포, 관아에 생긴 변화, 나이 든 주언욱, 두꺼운 서신들, 제인당의 나이 든 사제(師弟) 두 사람…….
그러다 곧 연말이 다가온다는 것이 떠올랐다.
“산속에는 달력이 없어, 겨울이 다 가도록 무슨 해인지 모르네(山中無曆日, 寒盡不知年: 당(唐)나라 시인 태상은자(太上隱者)의 시 <답인(答人)>의 한 구절)……. 어떤 일들은 사람의 뜻에 달리지 않아, 수행을 닦다 보니 시간을 잊었구나.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니. 슬슬 윤 훈장님을 보러 가야겠군!”
눈을 감은 계연은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잠시 그리움에 잠겼다. 계연이 윤재성을 보러 가려는 것은 그가 대정국의 대세(大勢)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바둑돌이라서가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친우를 그리는 마음에서였다.
계연은 한 번도 윤씨 집안 사람들을 선도(仙道)로 이끌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인연이 있는 법이고 모든 이가 수행에 적합하도록 태어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계연은 아주 많은 이들을, 심지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들도 선도(仙道)로 이끌 만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사람들의 심성과 집념을 꿰뚫어 볼 수 있었으므로, 어떤 이들에게는 선도에 드는 것이 평범하게 생을 마치는 것보다 못하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사람이 이미 어떤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당연히 어떤 사명감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그런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몇 년이나 윤씨 집안 식구들을 보지 못했던 계연은 그간 윤청이 혼인을 했는지, 윤 훈장님의 둘째가 얼마나 자랐는지 무척 궁금했다.
계연은 일부러 점괘를 치지는 않고, 보통 사람들처럼 친우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
* * *
그 후로 한동안 계연은 집안에서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칙령 뇌주(雷咒)는 역사 부적보다 훨씬 괜찮은 상태였다. 뇌주가 가진 자체적인 특성 때문인지, 그것은 이미 남아 있는 뇌겁의 힘을 완전히 제압한 후였다.
하지만 뇌주의 크기와 특수성 때문에 계연은 거안소각에서 그것을 펼쳐 자세히 연구해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계연은 그것을 깊이 연구할 생각을 뒤로 미루었다. 어쨌든 뇌주는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었다.
음력 섣달 하순이 되자 영안현은 한바탕 강추위를 맞이했다. 기온은 무섭도록 내려갔지만, 현성 안의 분위기는 더욱 경사스럽게 변하고 있었다. 집집마다 홍등을 걸고 대련을 써 붙였고, 묘사방의 성황당도 초롱을 내걸고 오색천으로 장식했다.
어떤 특수한 존재들 때문에 올해는 거안소각도 그다지 썰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 과도하게 소란스러워 계연은 약간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서 작은 글자들은 스스로 자제하여, 목소리를 함부로 높이지 않았고 말투도 부드럽게 뱉으려 노력했다.
음력 12월 25일, 계연은 뜰에 앉아 붓을 쥐고서 건곤납물술(乾坤納物術)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 계연의 귓가에 거안소각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누군가 똑똑 대문을 두드렸다.
손복은 문을 몇 번 두드렸을 때, 거안소각의 대문이 이미 얼마쯤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겨 있지 않으니 그냥 들어오세요.”
계연의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오자, 손복은 곁에 있던 손아아를 향해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라고 낮은 소리로 당부했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바리바리 챙겨온 선물을 들고서 거안소각의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자 계연이 뜰 안에 있는 돌 탁자 위에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연이 고개를 드니 손복이 마대(麻袋) 하나와 술 한 병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손아아는 손복의 곁에 딱 붙어 따라 들어왔다. 아이는 두꺼운 솜옷을 입었지만, 작은 얼굴은 추위로 인해 새빨개져 있었다.
“계 선생님, 연말이니 선물을 좀 들고 왔습니다. 이 안에는 우리 집에서 직접 소금에 절여 말린 닭고기, 오리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관장(*灌腸: 돼지 창자에 돼지고기·소금·술·향료·전분 따위를 넣어 만든 중국식 순대)이 조금 있습니다. 술은 양조장에서 만든 걸 사 온 것이니, 입에 안 맞아도 좀 이해해 주십시오!”
손복이 웃으며 이렇게 인사한 뒤, 자기 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가 얌전한 모습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계 선생님!”
“안녕하고말고!”
계연은 그의 선물을 거절하지 않고 웃으며 받았다.
“호의는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물건은 주방에 좀 갖다 놔 주세요. 지금은 붓을 멈출 수가 없거든요. 밖은 추우니 먼저 안으로 들어가 앉아 계시고요.”
“예예, 선생님이 바쁘시니, 그 정도는 제가 해야지요! 그냥 선물만 전해드리러 온 거예요, 어차피 집안에 또 일이 있거든요!”
손복은 물건을 가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손아아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계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계연이 글씨 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계 선생님이 글을 쓰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몇 걸음 가까워진 아이는 종이 위의 글자를 보고서 글자는 그보다 더 보기 좋다고 느꼈다.
손아아는 모르는 어른의 집에 방문하는 것에 대해 어색해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왜인지 거안소각에 도착하자마자 그런 불편함이 사라졌고, 할아버지가 주방으로 향한 후에도 잘 모르는 사람의 곁에 다가갈 정도였다.
계연은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어린아이를 발견하고는 계속 글을 써나가는 동시에 손아아를 주의 깊게 살폈다. 비록 생김새가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시야가 흐릿한 가운데에도 귀여운 아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이 쓴 글자를 쳐다보는 것을 보고 계연은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자를 아니? 이 종이 위에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아보겠어?”
그러자 손아아가 계연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내년에 학당으로 보내주신댔어요. 훈장님께서 글자를 가르쳐 주시면 그때는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지난번에 처음으로 만났을 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몰랐지만, 손아아의 목소리는 무척 맑고 또랑또랑했다. 아이의 외모와 퍽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다.
“하하, 글자를 배워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면 좋지. 책을 많이 읽으면 시야가 넓어지거든. 만약 학당에서 남자애들이 여자애가 공부하러 왔다고 놀리면, 그냥 무시해버려라.”
“네!”
손아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연의 옷차림을 훑어보며 물었다.
“선생님, 안 추우세요?”
아이 자신은 두껍게 껴입은 상태였다. 솜을 채운 겉옷과 바지에, 겨울용 방한 신발은 물론이고 내의도 몇 겹이나 받쳐입었다. 그런데도 추위에 얼굴이 온통 빨개질 정도였다. 하지만 계 선생님은 아무리 봐도 너무 얇게 입은 것 같았다.
아이의 물음에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가 겉으로는 얇게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안에 내의를 몇 겹이나 껴입어서 퍽 따뜻하단다.”
“정말요?”
손아아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계연의 가슴팍과 등 부근을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안에 무언가를 껴입은 것 같지 않았다. 선생을 보다가 자기 모습을 살펴보니 자기 모습은 동그란 것이 마치 공 같았다.
“얘야, 선생께서 글 쓰시는 데 방해하지 마라!”
손복이 주방에서 나오면서 손아아를 꾸짖은 다음 계연에게 물었다.
“계 선생님, 아아가 선생님을 귀찮게 해드렸지요?”
“아니에요, 아주 착하고 예의 바른걸요.”
손복은 겸연쩍어 두 손을 옷에 문질렀다. 자기 집 아이를 칭찬하는데 그 누가 기분 좋지 않겠는가?
오늘 그가 온 것은 연말을 맞아 계 선생님께 설을 쇨 물건들을 전해주러 오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돈은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 안에 자기 가족의 정성이 담겨있으니 계 선생님도 알아주실 것이다.
그도 이제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자기 부친이 예전에 얼마나 지혜로웠는지를 깨달았다. 계 선생님 같은 기인(奇人)과 좋은 관계를 맺어 놓는 것은 어느 경우에든 결코 손해가 아니었다.
게다가 계 선생님도 이전에 무슨 곤란한 일이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게다가 계 선생님과 윤 공의 친밀한 관계만 보더라도, 대부분의 일이 선생의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