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20화 (420/892)

420화. 붉은 여우

손복은 원래 가져온 물건만 놓고 가려고 했으나, 주방의 쌀 항아리에 쌀이 조금 있는 것 말고는 새해를 맞이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손복은 탁자로 몇 걸음 다가가 망설이다가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저희 집안에서는 형님과 제 가족이 그믐날 밤에 함께 모여 무척 떠들썩하게 보냅니다. 저, 선생께서도 올해는 우리 집에 오셔서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계연이 적어 내려가는 한 글자 한 글자는 모두 필획이 힘차고 운치 있었다. 그는 붓을 멈추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손 선생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믐날 밤에는 집안 식구들끼리 모여야지요. 제가 가면 서로 불편하기만 할 거예요.”

손복은 다시 한번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계연의 온화한 어조에는 왜인지 모르게 거스를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손복은 하려던 말을 살짝 바꿨다.

“아, 그럼 뭐든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 찾아오세요. 우리 집은 동수방(桐樹坊)에 있는데,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알려줄 겁니다.”

“하하, 알겠어요.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어차피 새해에는 저도 가볼 데가 있어서요.”

“예? 또 떠나시려고요? 어디로, 얼마나 오래 가시나요?”

손복이 놀란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그리 멀지 않아요. 오래 떠나있지도 않을 거고요. 곧 돌아올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다행입니다. 아,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손복은 계연을 향해 공수한 후 손아아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가 막 걸음을 떼려던 순간 계연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두 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만 마저 쓰겠습니다.”

계연은 서두르지 않고 오늘 연구하던 마지막 부분을 완성했다. 붓끝이 마지막 글자의 필획에서 잠시 멈추자 종이 전체에 희미한 빛이 흘렀다 사라졌다.

그 후,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쥔 채로 손복을 향해 양손을 서로 맞잡고 인사했다.

“제가 손님 대접에 소홀했네요. 곧 새해인데 방문해 주셨으니 제가 차도 한 잔 대접하고, 아아에게 세뱃돈도 줘야지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방으로 향했다.

“어어, 아닙니다! 계 선생님, 아아가 어찌 선생께 세뱃돈을 받겠습니까!”

손복이 서둘러 달려와 그를 막아선 후, 고개를 돌려 손녀딸에게 물었다.

“우리 아아도 세뱃돈 필요 없지?”

그러자 손아아는 가만히 서서 입술을 깨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를 본 손복은 웃기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계연은 웃으며 아이를 쳐다본 뒤 손복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추위라도 가시게 제가 차 한 잔 내드릴게요. 어쨌든 날도 추운데 동수방까지 또 걸어가야 하잖아요. 또 제게 특별한 단맛을 내는 것이 있거든요. 마시면 몸도 따뜻해질 거예요. 이 정도는 거절하지 않으시겠죠?”

“그…… 그럼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계연은 오늘 아궁이에 불을 때지도 않고 물을 끓여 놓지도 않았지만, 순식간에 찻물을 준비해서 나왔다.

* * *

조손(祖孫) 둘은 거안소각을 나와 거리를 걷던 도중, 한겨울인데도 추위가 느껴지지 않고 온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 계 선생님이 내준 차가 맛도 좋고 갈증도 풀어줘서 정말 좋았어요. 마시니까 몸도 따뜻하고요. 계 선생님께 가서 그 찻잎하고 설탕 같은 걸 조금 사 오면 안 돼요? 우리 가족들도 마실 수 있게요.”

손아아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손복에게 물었다.

“아이고, 이놈아. 그게 어디 살 수나 있는 물건이겠냐!”

손복이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손아아의 손을 붙잡고 길을 걷자 몸과 마음이 전부 훈훈하게 느껴졌다. 차를 금방 마셨을 때는 몰랐지만, 거안소각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뱃속부터 시작해 뜨끈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 눈치가 귀신 같아진 손복은 이미 자신들이 대접받은 차가 보통의 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속으로 오늘 계 선생님께 들르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손씨 집안 조손이 떠나자, 계연은 탁자 위에 있던 종이 한 무더기를 잘 정리했다. 오늘 그가 연구한 내용은 총 스무 장이 넘어가는 양이었다. 그 위에 빽빽이 쓰인 글자를 계연은 다시 한번 눈으로 훑었다. 그런 뒤, 가만히 눈을 감자 오늘 깨달은 것들이 마음에 다시 찬찬히 떠올랐다.

한참 후 계연이 다시 눈을 뜨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는 이미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동 의원과 주 대인도 왔었고, 방금 손씨 집안에서도 왔다 갔으니 올해 연말은 쓸쓸하게 보내지 않았군! 설을 쇨 물건들도 잔뜩 받았고!”

손님들이 바리바리 들고 온 물건들은 일찍이 계연의 소매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계연은 고개를 들어 우규산이 있는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치 한 줄기 맑은 바람처럼 우규산을 향해 가볍게 날아갔다.

잠시 후, 계연은 자신이 우규산에서 가르침을 주었던 월대(月臺) 상공에 도착했다. 아래를 바라보니 붉은 털을 가진 여우 한 마리가 사람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호운은 앞발 두 개를 위아래로 들고 서로 다른 결인(*結印: 수행자가 수행할 때 손가락 끝을 이리저리 맞붙이는 형식)을 맺었다.

“이제야 철이 좀 든 모양이구나!”

별안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호운의 귀가 즉시 영민하게 움직였다. 이에 곧바로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본 호운은 몇 차례나 그가 계연임을 확인한 후에야 얼굴 가득히 반가운 빛을 띠었다.

“계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시네요! 저는 환각인 줄 알았어요.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어요! 정말로 선생님이 오셨네요…….”

붉은 여우의 목소리에는 흥분 어린 기색이 가득했고, 뒤에는 심지어 울음기마저 섞여 있었다. 육 산군이 떠난 뒤 그는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계연이 천천히 돌 위에 내려서자, 붉은 여우는 벌써 그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여우는 계연이 붉고 풍성한 털을 쓰다듬도록 가만히 있었다.

“윤청을 보러 가고 싶지 않니?”

“보고 싶어요!”

계연이 고개를 든 붉은 여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간 영안현에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는데, 원망스럽진 않고?”

그러자 호운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윤청은 큰 포부를 품고 있으니까요. 저도 그간 그 애가 바빴을 거라는 걸 알아요!”

“하하, 대견하구나. 그럼 이제 도성으로 가자꾸나.”

계연은 붉은 여우를 한번 쓰다듬고는 그를 데리고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시 한번 계연을 따라 길을 떠나게 된 데다, 이번에는 도성처럼 먼 곳으로 향하게 된 호운은 무척 흥분해 있었다. 호운은 구름 위에서 발아래로 산과 하천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호운은 계연에게 윤씨 집안사람들과 육 산군의 근황을 물었고, 계연이 그간 듣고 본 것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계연도 호운의 수행 상황에 대해 간단히 물어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여우는 예전보다 확실히 크나큰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호운은 그간 열심히 수행을 닦는 것이야말로 그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한평생 우규산에 틀어박혀 고독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붉은 여우는 예전의 육 산군처럼 아주 근면하게 수행을 닦고 있었고, 시간만 나면 월대로 올라가 수행하기를 즐겼다.

사실상 영지를 얻은 동물들과 정괴(精怪)들은 모두 이런 단계를 거쳤다. 물론 뒤로 갈수록 삿된 길로 빠지는 이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사람을 해친 뒤 무언가 이득을 얻으면, 그 후로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과 여우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 구름을 몰아, 오후가 되기도 전에 경기부 상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연은 이때 호운을 데리고 통천강에 들를 생각은 없었다. 늙은 용이 비록 이 여우를 안다고는 해도, 호운은 응굉을 모르는 상태였다. 심지어 통천강에 진룡이 산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 호운을 통천강에 데리고 갔다가는 이 심약한 여우가 놀라 쓰러질지도 몰랐다.

성의 한 구석진 골목에 내려선 계연과 호운은 자연스럽게 도성의 큰길로 들어갔다.

비록 계연의 장안법을 쓴 상태였지만, 호운은 여전히 계연 가까이 붙어 걸으려고 했다. 왜냐하면 호운은 이 한겨울에도 왠지 모르게 기이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열기는 비록 호운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지만, 호운을 초조하게 하는 동시에 견디기 힘들게 했다.

“계 선생님, 성에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들이 내뿜는 화기(火氣)가 너무 세서, 꼭 불길 위를 걷는 것 같아요…….”

호운이 이렇게 투덜대자 계연이 하늘 저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에 뭐가 보이니?”

“뭐가 있나요?”

붉은 여우는 고개를 들어 계연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지만,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떠다니는 것을 빼면 아무런 특이점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연의 법안에는 두 가지 장면이 겹쳐 보였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도 있었지만, 새빨간 불길이 하늘을 향해 타올라 경기부 상공이 거대한 붉은 구름이 뒤덮인 것처럼 보였다.

“연말이라 집집마다 설을 쇨 준비를 하고 있거든. 가족이 모이고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넘치니, 사람들의 기운이 더욱 왕성해진 거야. 그러니 사람이 만들어내는 화기도 왕성해지고, 인간이 아닌 것들을 배척하는 힘이 세졌지.”

“저를 배척한다고요?”

붉은 여우가 앞발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라고 하기보다는 귀신이나 요괴, 사기(邪氣)를 지닌 존재를 일컫는 것이지. 도행이 높은 요괴에게는 큰 영향이 없단다. 또 너는 수행의 정도(正道)를 걷는 요괴이니, 조금만 익숙해지면 괜찮을 거야.”

이렇게 말하는 그들 주위에는 이미 인파가 북적거렸다. 호운은 성안을 돌아다니는 개들을 볼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계연 가까이 붙었다. 뱀에 한 번 물리면 십 년은 밧줄을 볼 때마다 놀란다더니, 호운은 개에 한 번 물린 일을 수백 년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계 선생님, 윤청의 집은 어디에 있나요? 길은 아세요?”

호운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는 이전에 계 선생님이 길을 잃었던 몇몇 일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어, 이번에도 윤씨 집안의 저택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까 봐 걱정되었다.

“윤 훈장님은 현 조정의 대신이고, 대정국의 재상이니 당연히 멀리 떨어진 곳에 살 리가 없어. 그렇다고 번잡한 시정 한 가운데에 살지도 않을 것이고. 분명 영녕가나 그 주위로 뻗은 대로 위에 집이 있겠지. 수시로 입궁해야 하니 황궁과도 가까울 테고 말이야.”

계연이 천천히 말을 하면서 황궁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하지만 주위에 인파가 너무 많아, 작은 여우인 호운은 당연히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걷던 호운은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헉!”

“왜 그러느냐?”

계연이 고개를 숙이자 사람처럼 두 다리로 일어선 여우가 보였다. 호운은 몸 이곳저곳을 뒤적이다가 풍성한 꼬리를 만진 뒤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계 선생님, 제가 너무 급하게 와서 윤청과 윤 훈장님께 드릴 선물을 깜빡했어요……. 오랫동안 못 봤는데 이렇게 빈손으로 찾아가게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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