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가면
호운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그는 전부터 이렇게 윤청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해왔으나, 빈손으로 가는 것은 한 번도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우규산에는 마땅한 것이 없었고, 백성들의 민가에서 훔쳐 올 수도 없어 오랫동안 무엇을 준비해가야 하나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러다 계연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인해 결국 빈손으로 오게 된 것이다.
“원래는 산에서 옥석(玉石)이라도 캐내려 했는데, 찾아내지 못했어요. 육 산군처럼 금덩이를 찾고 싶어도 보이지도 않고……. 저는 뱀이나 토끼만 잡을 줄 알지…….”
아무리 생각해도 호운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여우 요괴 같았다.
“네가 방문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기뻐할 텐데. 선물은 없어도 돼.”
“하지만…… 선생님께서도 영안현의 염장한 고기나 장(醬) 같은 걸 들고 가시잖아요…….”
호운이 작게 투덜거리자 계연도 난감해졌다. 하지만 호운의 마음만은 무척 가상하게 여겨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여기서 뭐라도 사겠느냐? 경기부는 천하에서 가장 번화한 성이니, 대정국의 물건은 물론 다른 나라의 물건들도 모두 구할 수 있거든. 아, 네가 돈만 있다면 말이다.”
호운은 즉시 희망에 가득 차 계연을 올려다보았다.
“계 선생님, 돈 있으세요?”
계연은 돈주머니 안에 든 금액을 헤아려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있지. 은자 두 냥하고 360문(文).”
“그 정도면 되게 많은 거죠? 뭘 살 수 있나요?”
호운은 비록 세상 물정을 많이 경험해 보지는 못했지만, 윤청을 따라 얼마간 학당을 다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은자로 살 수 있는 것이 무척 많고, 세상 백성들이 모두 은자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계연은 곰곰이 경기부의 물가를 떠올려 보았다.
“음, 네가 뭘 사려고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 쌀이나 곡식 같은 일반적인 물품은 많이 살 수 있다. 하지만 귀중한 것을 사려 한다면, 네가 은자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부족할 수도 있지.”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그럼 장난감을 보러 가요!”
호운은 윤청이 옛날에 다른 집 아이들의 아버지가 만들어 준 목검이나 나무 새 같은 장난감을 부러워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윤청에게는 그때부터 오직 서책밖에 없었다. 그래서 호운은 쭉 윤청이 장난감을 좋아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계연은 속으로 윤청은 이제 장난감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옛날에도 그저 가볍게 불만을 늘어놓은 것일 터였다. 하지만 계연은 친우를 생각하는 호운의 마음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장난감은 가격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 시장에 가서 무언가 재밌는 게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럼 묘사방으로 가야겠구나. 연말에는 거의 매일 묘회(*廟會: 옛날, 잿날 또는 일정한 날에 절 안이나 절 부근에 임시로 설치하던 시장)가 열리니까. 거기에는 재밌는 것도 많을 거야.”
“네, 네! 그럼 묘사방…… 어, 계 선생님, 묘사방이요?”
호운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털이 송송 난 호운의 얼굴에 확연히 주저하는 기색이 서렸다.
“거기는 귀문 앞이잖아요. 저 같은 요괴가 거기 갔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호운은 계 선생님이 무척 대단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선생님이 귀신보다 대단하지는 않을 거라 여겼다. 영안현 성황신이 계 선생님의 체면을 보아 자기를 건드리지는 않지만, 그것은 영안현이 자신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는 경기부가 아닌가!
“안심하렴. 내 경기부의 여러 귀신을 알고 있으니, 그 정도 체면은 살려줄 거다. 게다가 지금은 윤청의 선물을 사러 가는 건데,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만하지 않느냐?”
호운이 잠시 망설이더니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네. 저는 선생님을 믿으니까요. 그럼 묘사방으로 가요!”
계연이 웃으며 호운을 데리고 방향을 바꿨다. 그들은 걸음을 서두르거나 아무런 술법도 사용하지 않고, 일각(一刻: 15분) 반 정도 걸어 묘사방에 도착했다.
“만두 팝니다! 방금 나온 따끈따끈 만두요!”
“질 좋은 단향(檀香)이요!”
“꽃등(花燈) 팔아요! 아이들에게 꽃등 하나씩 사주세요! 안에 수수께끼도 들어있습니다!”
“연지(胭脂)와 수분(水粉) 팝니다!”
“평안부(*平安符: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부적) 사세요! 평안부! 성황신께 제사 올린 평안부입니다!”
…….
이 묘회의 규모는 작지 않았고 몰린 인파도 엄청났다. 지나가는 모든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 있었고, 주위에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흥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운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안현처럼 작은 고을에서는 이와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연은 멍한 얼굴의 호운을 보고는 호운을 품 안으로 들어 올렸다. 인파에 밀려 밟힐까 봐 걱정도 되었고, 이렇게 하면 호운이 매대 위의 물건들을 더 잘 살필 수 있었다.
“가자, 원하는 걸 찾으면 내게 말하렴.”
계연은 호운을 데리고 묘회를 거닐었다. 그들은 꽃등, 발랑고(*拔浪鼓: 양옆에 구슬이 달린 줄을 매어 흔들며 노는 작은 북), 나무 인형, 나무 새, 비단으로 만든 꽃, 당인(*糖人: 먹을 수 있도록 당액(糖液)으로 만든 사람이나 동물 인형) 등을 지나쳤다. 호운은 새로운 것을 볼 때마다 놀라워하며 무엇을 골라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때 호운이 무언가를 가리켰다. 바로 가죽으로 만든 가면이었다.
“계 선생님, 저거요! 가면! 저 가면을 사주세요!”
거리가 조금 멀어 계연은 호운이 말하는 가면이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가면을 파는 노점의 주인이 호객하는 소리를 듣고 그곳을 찾아냈다.
“주인장, 가면 하나에 얼마인가요?”
“계 선생님, 저 여우 가면으로요!”
호운이 계연의 품 안에서 작은 소리로 넌지시 귀띔했다. 비록 계 선생님이 술법을 걸어놓은 것을 알았지만, 그는 여전히 누군가 자신을 발견할까 조심스러워했다.
목청껏 호객하던 노점 주인은 계연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비범한 풍모를 지닌 문인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선생께서는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고양이, 원숭이, 여우 그리고 귀신 가면이 있습니다.”
“여우 가면이요.”
“예!”
노점 주인은 붉은 여우 가면을 들고서 계연에게 설명했다.
“이 가면은 가죽을 바탕으로 명주실로 재봉한 것이지요. 그 위에 가느다란 털을 붙이고 연지를 붉게 칠하여 만든 것입니다. 보세요, 가면 안쪽이 부드럽지 않습니까? 또한 곧 새해를 맞이하니 이렇게 붉은색이 경사스럽기도 하지요…….”
노점 주인이 설명을 한가득 늘어놓더니 마침내 가격을 말했다.
“이토록 비범하신 분께서 방문해 주셨으니, 백 문(文)에 해드리지요.”
“백 문이요?”
계연은 가면을 들고 주인이 설명한 점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안쪽도 바깥쪽도 확실히 촉감이 괜찮았다.
“좀 비싸네요. 50문이면 살게요.”
계연의 지난 생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가격을 흥정할 땐 무조건 반은 깎고 들어가야 했다. 노점 주인은 그 가격에 얼굴을 잠시 찡그린 뒤, 이를 악물며 이렇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선생 같은 문인(文人)께 파는 건데 이 정도 손해는 감수하겠습니다. 그럼 통쾌하게 50문에 드리지요!”
그 말을 듣자마자 계연은 자신이 비싸게 샀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시원하게 값을 치른 후 가면을 받아들었다.
호운은 가면을 끌어안고 무척 흥분했다. 이는 가면이 보기 좋기도 했지만, 자신의 얼마 되지 않는 신통력을 써서 윤청에게 특별한 선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호운이 한참 기뻐하던 그때, 별안간 호운의 등 뒤가 서늘해졌다. 이에 호운이 고개를 돌려 묘회가 열린 방향을 바라보니, 관차(*官差: 관아에서 파견하던 아전)의 차림새에 온몸에서 음기를 내뿜는 7, 8명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공수하는 것이 보였다. 물론 여우 요괴인 자신에게 인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계 선생님, 저, 저쪽에 귀신이…….”
호운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계연 뒤로 숨었다. 마치 이렇게 숨으면 귀신들이 그를 찾아내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응, 알고 있어. 계속 가면 된다.”
계연은 이렇게 대답한 뒤 호운을 데리고 묘사방을 떠나 영녕가로 접어들었다.
비록 계연의 기운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지만, 귀신들이 눈이 먼 것은 아니었으므로 묘사방을 순찰 중에 그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신중한 태도로 계연 앞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계연이 곧 떠나려는 듯 보였으므로 귀신들이 그를 향해 다급히 인사한 것이었고, 그런 연유로 호운도 그들을 보게 된 뿐이었다.
황궁에 가까운 대로는 총 세 군데가 있었다. 가장 중간이 영녕가, 좌우 두 대로가 각각 순천가(順天街)와 영안가(榮安街)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상서령(尙書令) 윤재성의 저택도 바로 영안가에 있었다.
계연이 호운을 데리고 영안가로 들어서자, 좌우에는 대갓집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호운은 무척 천천히 걷고 있었고, 계연도 서두르지 않고 그에 속도를 맞췄다.
붉은 여우가 두 발로 길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가면을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자기 몸 여기저기에서 털을 뽑아내는 모습에 계연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호운 나름대로는 무척 진지하게 일을 하는 중이었다. 호운은 적당한 부위에서 털을 조금씩 뽑아 가면 위에 붙이고 있었다. 그러자 털이 붙어있긴 했지만 듬성듬성했던 원래의 가면이 점차 풍성한 털로 뒤덮였다. 모두 호운이 걸어오는 동안 자신의 털을 공헌한 결과였다.
“그러다 땜빵 생길라.”
계연이 웃으며 말을 걸자 호운이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아요. 한 곳에서만 뽑지 않으니까요. 육 산군처럼 되지는 않을 거예요.”
“하하!”
그의 대답에 계연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호운이 지금 하는 작업은 금방 끝나는 일이 아니었고 이 위에 술법도 펼쳐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운은 윤청을 방문할 날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다.
비록 누구에게도 정확한 위치를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하늘 저편에 떠오른 호연정기의 흰빛을 찾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계연은 쉽게 윤재성의 자택을 찾아냈다.
미시(*未時: 오후 1시~3시) 삼각(*三刻: 45분), 계연과 호운은 한 저택 앞에 멈춰 섰다. 계연이 고개를 들어 편액을 바라보니, 그조차 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글씨로 ‘윤부(尹府)’라고 적혀있었다.
그의 저택 상공에는 은은한 흰빛이 모여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주변의 혼탁한 기운을 멀리 몰아내고 있었다. 대정국에서 이런 호연정기를 가진 이는 윤재성뿐이었다.
대문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호위들은 각기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허리춤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그들은 저택 앞에 멈춰선 계연을 일찍부터 주시했다. 하지만 그의 문인처럼 보이는 차림새를 보고는 그리 이상하다 여기지 않았다. 자기 집 주인어른은 문곡성(文曲星)이 내려왔다 칭해지는 윤 공(公)이었으니, 천하의 문인들이 주인어른을 흠모하는 것은 당연했다.
계연이 곧바로 계단에 발을 디디자, 오른쪽 전방에 선 호위가 입을 열었다.
“거기 멈추시오! 이곳은 윤 공의 저택으로, 재상부(宰相府)이기도 하오. 관련 없는 이는 들어올 수 없소!”
재상은 관직명이 아니라, 일정 직책 이상의 고관(高官)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대정국에는 삼성육부(*三省六府: 문하성‧중서성‧상서성의 3성과 이부‧호부‧예부‧병부‧형부‧공부의 6부를 지칭)가 있었는데, 그 부서의 책임자들을 일러 재상이라 칭했다. 윤재성은 그 재상 중에서 권세가 가장 큰 자는 아니었지만, 조정 전체에서 가장 이름난 관리였다.
계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살짝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제 성은 계책을 이를 때의 계씨이고, 계주 영안현에서 왔습니다. 윤 훈장님과는 이웃 사이였지요. 오늘 그분을 뵈러 왔으니 안으로 말 좀 전해주세요.”
“영안현에서 왔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호위는 눈썹을 찡그린 채 계연을 살폈다. 풍모가 남다른 것으로 보아 거짓을 말할 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런 때에 온 것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은 새해가 지난 다음에 방문하니 말이다.
“잠시 기다리시오. 바로 가서 아뢰고 오겠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