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23화 (423/892)

423화. 신선 같은 존재

“스승님, 한 가지 더 가르침을 청할 것이 있습니다.”

선생은 윤중이 자기 말을 끊은 데에 대해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말해 보거라.”

“세 가지 다스림(三御)에도 선후 구별이 있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자연히 가장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럼 몸가짐과 마음을 수양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윤재성의 아들과 함께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은 퍽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윤중 가르치는 스승은 오죽하겠는가? 늙은 선생은 눈썹을 찡그리며 깊이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한 태도로 이렇게 대답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굳이 따지자면 바른 몸가짐을 먼저 닦아야겠지.”

그러자 윤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윤중의 말에 늙은 선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군자가 익혀야 할 육예가 대정국에서는 이미 유명무실해졌다고도 하셨습니다. 물론 육예 모두에 정통할 필요는 없지만, 오로지 책만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바른 몸가짐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고요. 스승님은 어찌 생각하시나요?”

그의 물음은 조금 대답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 선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칼을 찬 호위 하나가 다급히 홍문관 안으로 들어왔다.

이에 늙은 선생이 그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러자 호위가 허리를 굽힌 채 양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소사 대인, 윤 재상부에서 급히 사람을 보내 둘째 공자를 데리러 오셨습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한 고향 어른이 방문하셨다 합니다.”

호위의 말에 선생이 윤중을 향해 말했다.

“그럼 윤중, 너는 먼저 가보거라.”

“예!”

윤중은 일어나 스승에게 인사 올린 후 다시 황자와 공주들에게 예를 올렸다. 그런 후에 호위를 따라 밖으로 나갔고, 남겨진 학생들은 윤중을 부러운 듯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 걷던 윤중은 마침내 한숨을 내쉬며 여유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글공부는 전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나저나 고향에서 온 어른이라니 누구지? 외숙인가?’

윤중이 문하성을 나서자, 바깥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가복(家僕)과 마차가 보였다. 윤중은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 흥분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원(阿遠), 집에 대체 누가 온 건데요? 아버지가 아원을 보내 나를 데려오라고 할 정도라니?”

아원이라는 이름의 가복은 나이가 최소 50은 되어 보였다. 그는 윤재성의 곁을 오래 지킨 사람으로, 판단이 빠르고 명석했으며 무림의 고수이기도 했다.

“둘째 공자님, 집에 오신 손님은 계 선생님이십니다. 예전에 저도 완주에서 한 번 뵈었었어요. 집에 가보시면 알 거예요.”

“계 선생님?”

윤중이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그의 부모님과 형에게 수도 없이 들었었다. 그래서 당연히 그분이 어떤 분인지는 알았지만, 그는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비록 가족들은 그가 아기였을 때 계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그렇게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신비한 계 선생님에 대해 윤중은 줄곧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끈질기게 캐물어야만 가족들은 그제야 계 선생님과 관련된 비범하고 기이한 일들에 대해 살짝 귀띔해주곤 했다. 그렇게 해서 윤중이 들었던 이야기 속의 계 선생님은 보통의 이웃 사람이 아니라 마치 신선 같았다.

“예, 바로 그 계 선생님이요. 제가 예전에 뵈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더군요.”

윤중은 가볍게 발을 디뎌 마차에 올라탔다.

“가요, 어서 집으로 가야겠어요! 대체 그 계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지 내 눈으로 봐야겠어요.”

윤중의 재촉에 마차는 재빨리 재상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상부가 황궁과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덕에, 윤중은 얼마 되지 않아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윤중은 단번에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저택 안으로 달려갔다.

응접실 안에서는 윤재성의 부인이 이미 집으로 돌아와 계연과 인사를 나눈 후였다. 오랫동안 주방에 출입하지 않았던 그녀는 계연이 가져온 영안현 특산품을 하인들은 어찌 다뤄야 하는지 모를 테니 자신이 직접 가봐야겠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계연과 윤씨 부자는 그동안 영안현에 있었던 변화와 조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때, 밖에서 윤중의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윤중은 문밖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 후, 옷차림을 다시 한번 살핀 다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아버지, 저 왔어요!”

“호가 왔구나. 어서 들어오너라!”

부친의 목소리를 듣고 윤중이 즉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실내의 열기가 얼굴을 향해 확 끼쳐왔고, 윤중은 열기가 새어나갈까 급히 문을 닫았다.

실내를 한번 둘러본 윤중은 원래 계연을 좀 더 살펴보려 했으나, 붉은 털을 가진 여우가 너무나 눈에 띄었다. 그 여우는 윤청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신기한 장면에 윤중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뭐하고 섰느냐, 어서 계 선생님께 인사하지 않고!”

윤재성이 이렇게 꾸짖자 윤중은 그제야 계연을 향해 서둘러 예를 올렸다.

“윤중이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그래. 나와 네 부친은 막역한 지기이고, 군자의 사귐은 담박하기가 물과 같다(君子之交淡如水: <장자(莊子)>의 한 구절) 했으니 복잡한 예절에 얽매일 필요 없다.”

계연은 윤중을 위아래로 유심히 살펴보았다. 윤중은 12, 13살 정도 되어 보였으며 체격이 튼실했다. 눈빛이 총명하게 빛나고 호흡이 길며, 몸에서 느껴지는 불의 기운이 왕성한 것을 보니 그의 부친이나 형과는 많이 다른 듯했다.

윤중은 맨 처음에는 비록 여우에게 온 시선이 쏠렸으나 지금은 이 계 선생이란 분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무척 젊다고 생각했으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자신의 부친과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선생에게서는 알 수 없는 청정함이 느껴졌으며, 선생의 두 눈에서는 푸른빛이 언뜻 비쳤다.

‘저분이 계 선생님이시군? 겉으로 보기에는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네가 윤청의 동생이구나?”

별안간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중이 깜짝 놀랐다. 윤중의 눈길은 처음에 계연을 향해 잠시 머물다가, 윤재성과 윤청을 지나 마침내 여우의 몸에 멈췄다. 뒤이어 윤중의 두 눈이 화등잔만큼 커다래졌다.

“하하……. 아, 아버지…… 형, 계 선생님, 저 여우, 여우가 말을 했어요!”

윤중이 여우를 가리키며 대경실색한 얼굴로 소리쳤다.

“왜 그렇게 놀라? 네가 윤 훈장님의 둘째인 윤청의 동생이 맞구나.”

붉은 여우는 윤청의 무릎에서 내려와 윤중을 향해 걸어갔다. 윤중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다가 마침내 방문까지 떠밀렸다.

“음, 나는 호운이야. 윤청과는 아주 친한 사이지. 계 선생님하고 함께 왔어.”

윤재성과 윤청, 계연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윤중의 반응을 구경하고 있었다.

윤중은 어쨌든 아직 아이였으므로, 문가에서부터 윤재성이 있는 곳까지 달음박질친 다음 경악한 얼굴로 여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저 여우 설마……?”

“맞아, 나는 요괴야. 우규산에서 수행하는 여우지. 네 형은 나와 어릴 때부터 친우였어.”

그렇게 말하는 여우가 몹시 사람과 비슷한 모습으로 웃었다.

“하하하하…….”

“아하하……!

“과연! 하하하…….”

다른 세 사람은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졌다. 윤중조차 상황을 받아들인 후에는 어색한 듯 미소 지었다. 그와 동시에 호운과 계연을 바라보는 윤중의 눈빛에 호기심이 가득 찼다.

‘이 세상에 정말로 요괴가 있었다니!’

그럼 계 선생님도 정말 신선이란 뜻이 아닌가?

시간이 얼마간 흐른 뒤에야 윤중은 말하는 여우의 존재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후에는 곧 호기심과 신기함이 우위를 차지했다.

윤중은 이제 호운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의자를 끌어당겨 윤청의 곁에 앉기까지 했다. 윤중은 지척에 있는 붉은 여우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으나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윤중은 돌연 무언가 생각난 듯 윤청을 향해 물었다.

“형, 어렸을 때 나한테 해준 이야기 중에 산에 사는 친우가 있다고 했었잖아. 그게 이 여우야?”

“어렸을 때? 지금은 꼭 다 큰 것처럼 말하는구나.”

윤청이 웃으며 윤중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전에도 나는 분명히 호운이라는 이름의 작은 여우라고 말했었어. 나랑 같이 놀고, 함께 공부도 했다고. 그것도 기억이 안 나니?”

윤청이 꼬집은 볼이 얼얼했던 윤중은 자신에게로 또다시 뻗어오는 형의 손을 이리저리 피했다. 형은 무공을 배운 적이 전혀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힘이 셌다.

“잊어버렸어. 4, 5살 때 들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하겠어? 나는 형이 개를 키운다고 생각했었어.”

호운은 거의 즉시 윤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개’라는 단어에 무척 민감했다.

“그래, 나도 네가 전부터 무척 개를 기르고 싶어 하는 건 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안에서는 개를 키울 수 없어.”

그러자 호운이 앞발로 윤청의 손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의리는 있구나!”

이때, 계연과 윤재성은 다른 한쪽에 앉아 오랜만에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탁자 위에 올라간 바둑판은 예전에 윤재성이 계연에게 선물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식사 때가 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으므로, 두 사람은 차와 함께 바둑을 두면서 그간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오랜만에 호젓한 시간을 즐겼다.

계연의 실력은 예전 영안현 시절과는 더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윤재성도 그간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계연과 대적하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하지만 계연이 조금 봐주면서 두면 두 사람은 그런대로 퍽 대국을 즐길 수 있었다.

윤중은 벌써 몇 차례나 몰래 계연을 흘끔대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다시 고개를 내려, 풍성한 꼬리털을 이리저리 흔들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여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윤청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형, 계 선생님은 신선이지?”

윤청은 밀전(*蜜餞: 꿀에 잰 과일)을 하나 입 안에 넣고 씹으면서, 호운과 동생에게도 하나씩 건넸다.

“네 생각에는 어떤데?”

“내가 보기엔 확실해!”

윤청은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대답했다.

“계 선생님은 보통 분이 아니셔. 하지만 부담스러운 건 싫어하시니, 그냥 보통의 어르신처럼 대접해드리면 돼. 선생님께 재미있고 기이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면 들려도 주셔.”

윤청은 그 부분에서 다시 목소리를 낮추더니 거의 속삭이듯이 동생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전부 사실이라고 봐도 돼!”

윤중은 눈에 기대감이 서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성은 오랜 고뇌를 거친 후 손에 들고 있던 돌을 내려놓았다. 계연은 바둑판 곳곳을 살피며 앞으로 몇 수 후의 상황을 그려보다가 문득 이렇게 물었다.

“윤 훈장님께서 여자아이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에 대해 조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윤재성이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느냐고요? 하하, 그걸 시행하는 지금도 반대가 엄청납니다. 막 그에 대해 주청했을 때는, 나름대로 깨어있다고 여겼던 관원들조차 나서서 반대했었지요.”

“그래서 어떻게 대응하셨나요?”

윤재성이 다른 쪽에 앉은 윤청과 윤중을 바라보았다.

“청아가 했던 말대로였습니다. 조정에서 입씨름만 하다가는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거라며, 상황에 맞는 해결책이 필요하다 했었죠. 조정 대신들도 전부 부인과 딸이 있지 않습니까……?”

윤재성이 웃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이자, 계연이 단번에 말뜻을 이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