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제삼자가 상황을 더 잘 판단한다(傍觀者淸)
혜동대사는 물을 마신 뒤 몸을 일으켜 등 뒤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어느 고인(高人)이 술법을 부린 듯합니다.”
“음, 나도 그리 느끼긴 했네만 그자의 도행이 나보다 깊어 알아볼 수가 없네. 혜동, 자네는 무언가 알아볼 수 있겠는가?”
혜동대사는 깨어난 후부터 법력을 이용해 안개 뒤에 감춰진 사정을 알아보려 했지만, 어떻게 보아도 보통의 안개로 느껴질 뿐이었다.
“아뇨, 저도 알 수가 없겠네요.”
혜동대사조차 알아보지 못한다면, 대량사에서는 이 안개의 원인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량사 방장은 원인을 알아내려는 생각을 접고 다른 승려들을 안심시켰다.
“어쨌든 이 안개는 지금까지 보기에는 수행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참배객을 비롯한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는 듯하오. 참배객 중에서 이상 현상을 목격한 이들이 있긴 하지만, 과도하게 놀라거나 이 일로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없었소. 이는 오히려 우리 대량사의 명성에 도움이 될 것이오.”
대량사는 속세에 자리 잡은 사찰이니 백성들이 올리는 향불과 명성, 마음씨 좋은 시주가 베푸는 헌금도 필요했다. 사찰 내 명왕불상에 금을 입히는 것도 전부 돈이었다.
“자, 그럼 갑시다. 일단 여러분은 먼저 식사를 들도록 하시오. 만약 우리 사찰과 참배객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불인명왕께서 나타나 경고하셨을 것이오.”
“맞습니다. 설령 이 안개가 인위적이라고 해도, 설마하니 그자가 저희 명왕불의 불법에 비견할 정도의 실력을 갖췄겠습니까?”
“음, 맞는 말이오!”
“동의하오!”
“선재 대명왕불!”
승려들이 함께 금지구역을 떠났지만, 나무 아래에 서 있는 늙은 용을 발견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때 늙은 용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의혹에 찬 얼굴을 하다가 다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아깝게 됐군! 한쪽이 불법의 제한을 받은 몸이라는 것도, 내가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도 모두 아쉽구나……. 하지만 이렇게 잠깐 엿본 것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아졌으니!”
* * *
동추부 부성에 낀 안개는 2주 넘게 지속되었다. 정월 열아흐레, 대량사의 아침종이 울려 퍼진 후 혜동대사와 대량사 방장을 포함한 승려들은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였다.
그 순간.
“아오오-!”
또렷하고 길게 이어지는 기이한 울음소리가 사찰에 울려 퍼졌다. 이 소리를 들은 승려들은 깜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내려 했다.
그 소리는 대략 십여 초 정도 지속된 후 은은한 메아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후에도 승려들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방금 그게 무슨 소린가?”
“나도 모르겠군.”
“누가 노래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아니,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어!”
“사찰에서 난 소리인가?”
“아무래도 바깥에서 난 것 같아. 동물 소리도 아닌 듯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승려들이 서로 속닥이는 동안, 방장은 죽그릇을 들고 젓가락으로 절인 반찬을 집어 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한 혜동대사를 발견했다.
“혜동, 이 소리가 어디서 난 것인지 아는 것인가?”
그러자 혜동대사가 손에 든 그릇을 내려놓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소승 이전에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건 용(龍)의 울음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예, 소승은 지난 2주간 발생한 안개가 조금 전 그 소리의 주인이 만들어낸 거라고 확신합니다. 보아하니 스스로 흡족한 결과를 얻고 이미 떠난 듯하니, 이 안개도 곧 흩어질 겁니다!”
이렇게 말한 혜동대사가 자리가 일어나 금지구역이 있는 방향을 향해 합장한 뒤 허리를 숙였다.
과연 그의 말처럼 곧이어 동추부 부성 안팎의 안개가 점차 흩어지더니, 햇빛이 다시 비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좌담을 지켜봤던 늙은 용은 계연과 불인노승이 더는 이어나가지 못했던 논점에 대해 스스로 어느 정도 추측이 생긴 상태였다. 이에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하하, 다음번에 계연을 만나면 이야기해줘야지! 이게 바로 제삼자가 상황을 더 잘 판단하는 상황이로군!’
* * *
대정국, 경기부성.
새해가 지나 조정에도 다시 조회가 열렸고, 윤재성과 윤청은 매일같이 정무를 처리하러 나가야 했다. 실은 호운도 함께 황궁을 구경해보고 싶었으나, 계연의 말 때문에 윤청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학당에 가는 게 아니라 황궁이었으니만큼 사안이 달랐다. 게다가 황가 사람들은 자미(紫微)의 기운이 몸을 보호하고 있어, 호운 같은 요괴가 입궁했다간 그 기운과 충돌하여 무슨 소동이 날지도 몰랐다.
이는 윤씨 집안 사람들의 앞날과도 관계된 일인 만큼, 이제 사안의 경중을 구별할 수 있게 된 호운은 더는 고집부리지 않고 가면을 완성하는 데에 집중했다.
이날 오후, 계연은 머무는 뜰에서 바둑판을 꺼내놓고 홀로 바둑을 두다가 호운이 내지르는 환호성을 들었다.
“아하하하! 드디어 완성했다!”
다행히 윤재성이 일찍이 분부해놓은 덕분에, 이쪽으로는 그의 충복인 진아원 말고는 다른 하인들은 쉽게 드나들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호운의 귀를 찌르는 듯한 환호성에 지나던 이들이 놀랄 수도 있었고, 혹은 아예 저택 안에 여우가 있다는 걸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하하하하……. 계 선생님, 계 선생님! 제가 만든 것 좀 보세요! 이 가면이요!”
호운은 앞발로 가면을 소중히 끌어안고 뒷발로 일어나 사람처럼 계연을 향해 달려왔다. 그 모습을 지켜본 계연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계 선생님, 제가 만든 것 좀 보세요! 혼자서 만들었어요. 대단하죠?”
계연은 호운이 건넨 붉은 털을 가진 여우 가면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처음 샀을 때보다 더욱 여우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만약 어둑한 곳에서 누군가 이걸 쓰고 나타난다면 다른 이들을 기겁하게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음, 괜찮구나. 그런데 이 가면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구나?”
계연이 일부러 말끝을 늘이며 묻자 호운이 즉시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헤헤, 이 가면은 진짜 대단한 거예요. 제가 부리는 신통력이 담겨 있거든요. 이걸 쓰고 마음으로 알고 있는 대상을 떠올리면 그 사람을 모방할 수 있어요. 그럼 다른 이들의 시선을 속일 수 있을 거고요. 변신이랑 비슷한 거죠!”
계연은 가면을 자세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구나! 많은 여우가 환각을 다루는 데에 뛰어난 재능이 있지. 이 가면도 무척 생동감이 넘치는구나. 아주 잘했다. 정말 대단한 물건이야!”
이 가면은 계연에게 자신이 가진 화피(畵皮)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호운의 가면은 그 화피만큼 정교하지는 않아서, 사용하는 이의 정체를 가리는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기능이 뛰어났다.
호운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 계연이 보기에 호운이 만든 것은 정말로 보배라고 일컬을 만했다.
물론 이는 계연 자신의 기준에 따른 판단이었다. 계연은 이 가면의 정교한 생김새나 재미있는 기능까지 고려했다. 만약 늙은 용이나 다른 수행자들이 보았다면, 이 가면을 그다지 쓸모없는 장난감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계연은 이것이 호운이 만들어낸 첫 작품이라는 데에 의의를 두기도 했으므로, 가면을 돌려주면서 호운을 한껏 칭찬했다.
“네가 보통의 가면을 주더라도 청이는 무척 좋아할 거야. 게다가 이건 보통의 가면도 아니고 무척 뛰어난 작품이잖니. 처음으로 만든 것이 이 정도의 실력이라니, 그간의 수행이 부질없진 않았구나!”
호운은 사람처럼 으스대듯 가슴을 당당히 내밀고 두 손으로 가면을 받아든 뒤,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영력을 많이 끌어다 쓴 데다, 영성(靈性)을 품은 제 털을 직접 붙여서 만든 거니까요. 실은 중간에 실패도 여러 번 했었어요. 이런 수준의 가면을 만든 건 요행이 따랐기 때문이에요.”
잠시 생각하던 호운은 곧 이렇게 덧붙였다.
“게다가 이 가면이 재밌는 물건이긴 하지만, 사용자에 대한 요구치가 높다는 단점이 있어요. 가면을 쓰는 사람이 똑똑해야 하기도하고, 마음속으로 명확하고 입체적인 형상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이 가면의 진정한 목적대로 쓸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보통의 가면일 뿐이에요.”
“겸손함까지 갖추다니 대견하구나!”
계연이 웃으며 호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호운의 귀가 계연의 손에 의해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계연의 칭찬에 약간 부끄러워진 호운의 원래도 붉었던 털은 더욱 선명한 붉은빛을 뽐냈다. 호운의 기억에는 계 선생님이 자신을 이처럼 칭찬해주었던 적은 몇 번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저, 저는 다시 가서 준비할게요. 좀 이따 청이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거예요!”
이렇게 말한 호운은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가면을 끌어안고 후다닥 멀어졌다. 계연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미소 짓다가,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윤재성과 윤청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서성에서부터 호위와 하인이 따르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오늘은 문하성에서 수업이 있는 날이었으므로, 윤중도 제 부친과 형과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부자 세 사람은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계연이 머무는 객사(*客舍: 손님이 머무는 곳)로 향했다.
그러자 그들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은 호운이 이렇게 소리쳤다.
“청아! 청아! 내가 네게 주려고 만든 선물이 드디어 완성됐어! 빨리 와봐!”
그 목소리를 들은 윤청은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곁에 있던 윤중은 형보다도 더욱 흥분한 얼굴로 함께 뛰어갔다.
두 형제가 회랑을 따라 나오자 형제의 시야에 뜰 중앙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호운이 보였다.
“헤헤, 내가 주는 선물이 뭐게? 호야, 너도 한번 맞혀봐!”
윤중이 재빨리 대답했다.
“우규산에서 가져온 뭔가 특별한 거지?”
“아니, 틀렸어. 이제 윤청 차례야. 한 사람당 기회 한 번씩이야!”
호운은 그들이 끊임없이 캐묻다가 결국 맞히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되면 더는 깜짝 선물이 아니게 되니까 말이다. 윤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먹을 거 아니면 재밌는 건데. 며칠 동안 바빴으니 분명 재밌는 거야. 맞지?”
“그건 맞혔다고 할 수 없어. 구체적으로 뭔지를 맞혀야지!”
그러자 윤청이 손뼉을 부딪쳐 탁탁 털었다.
“세상에 재밌는 물건이 한두 개야? 호운 어르신께서는 호선(*狐仙: 여우가 수천 년 동안 도를 닦아, 되었다는 신선)이시니, 저 같은 범인보다야 아는 것이 많겠지요. 저는 견식이 짧아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알려주십시오!”
“헤헤, 네 말이 옳아! 그럼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호운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풍성한 꼬리 안에서 붉은 여우 가면을 꺼냈다. 가면을 덮은 붉은 털 위로 은은한 빛이 지나갔다 사라졌다.
한눈에 그 가면이 마음에 들었던 윤중은 자기 형을 향해 부러운 눈길을 던졌다.
윤중뿐만 아니라 윤청도 가면을 보자마자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응, 가져가. 원래부터 너한테 주려던 거였어.”
호운은 마치 그 가면이 별것도 아닌 것처럼 윤청에게 건넸다. 윤청이 조심스레 가면을 받자, 조금 뒤처져 있던 윤재성이 유유자적한 걸음으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