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30화 (430/892)

430화. 그런 것도 알고 있니?

이목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줄곧 서책을 두드리던 오른손을 옮겼다.

“전하, 이 서책의 저자는 대정국이 건국된 이래 가장 뛰어난 재능과 덕을 갖춘 인물입니다. 장래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면, 반드시 이자가 곁에서 전하를 모시게 하십시오. 그는 나라와 백성을 향한 충심이 깊으며, 호연정기를 지녀 귀신들조차 존경하는 자입니다!”

이목서는 한쪽에 내내 쌓여있던 서책들을 양호의 앞으로 밀었다. 바로 <군조론>, <위지의> 등등의 책이었다.

“이 책을 잘 읽어보십시오. 이후에도 많이 들여다보셔야 합니다. 저는 곧 돌아가 봐야겠군요!”

“알겠습니다, 스승님!”

소년 양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막 서책의 종이를 젖혔을 때, 그는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곳이 바로 스승님 저택 안의 서재인데, 대체 어디로 돌아가신다는 거지?’

양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서재 바깥이 약간 몽롱하게 보였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곳에 서 있었는데, 스승님이 자신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더니 그 그림자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뒤이어 양호는 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그는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대화가 세세하게 기억이 났다. 아무래도 이는 세상을 떠난 은사께서 꿈을 통해 말을 전한 것 같았다.

이 두 가지 꿈으로 인해, 원래부터 윤재성을 무척 중시하고 있었던 양호는 윤씨 집안을 더욱 세세히 신경 썼다. 윤재성도 비록 자신에 대한 황제의 신임이 깊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만, 아마 이 정도로 깊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터였다.

* * *

윤청은 상평 공주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선 뒤, 회랑을 따라 화원으로 향했다. 윤청은 어느 때에나 매끄럽게 말을 할 수 있었으므로, 황제가 왜 왔는지 이미 아는 상태에서도 그다지 긴장하지 않았다.

“공주 전하, 회랑을 따라 한 바퀴 돌면서 두 화원의 풍경을 구경한 후에 먼저 식사 자리로 가서 기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는 황궁이 아니라서 그 외에 따로 구경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은 데다, 일찍 돌아가면 성상(聖上)과 제 부친께서 저를 꾸짖으실 겁니다.”

그 말에 상평 공주가 윤청을 바라보며 물었다.

“윤 시랑은 저와 함께 걷는 것이 싫으신가요?”

그러자 윤청이 다급히 해명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성상과 제 부친이 저희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하시어, 제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추운 날씨에 저희를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하셨지요. 그러니 먼저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서 앉아 있으면, 그곳에는 난로도 있으니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인들에게 간식거리를 가져오라고 할 수도 있고요.”

그의 말에 상평 공주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공주도 윤청을 딱히 좋아해서 온 건 아니었다. 그녀로서는 윤청이 아직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다만 혼인하지 않은 여인으로서 부모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비록 부황의 총애를 받는 공주이긴 하나, 혼인과 같은 인륜지대사는 부모의 말을 따라야만 했다.

다행히 공주는 윤청이 윤 재상만 한 큰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재능 있는 인재라고 들었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윤 시랑이 그린 그림을 보니, 확실히 이 사람에게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럼 윤 시랑의 말대로 조금 걷다가 바로 식당으로 가는 것으로 하지요. 하지만 그 전에 재상부의 서재를 구경하고 싶어요. 듣기로는 그곳이 천하에서 문기(文氣)가 가장 강한 곳이라던데요.”

“예, 그런 부탁쯤은 제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윤청은 무척 예의 있는 모습으로 공주를 이끌고 저택 안을 돌아다녔다. 그들은 주로 화원을 구경하다가 공주가 줄곧 궁금해하던 서재로 향했다.

저택 내에서는 서재가 여러 곳이 있었는데, 윤청과 윤재성 모두 각각 단독으로 쓰는 공간이 있었다. 비록 상평 공주를 데리고 윤재성의 서재로 갈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서재로 가는 것은 가능했다.

윤청의 서재에 도착한 상평 공주는 곧바로 그림에 정신이 팔렸다.

서재의 벽에는 그림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농촌의 일상부터 산과 하천의 물과 나무를 담은 풍경화, 커다란 나무로 뜰 절반이 뒤덮인 작은 집, 누렁개와 여우 같은 동물 그림, 붓글씨를 쓰고 있는 윤 재상을 닮은 문인(文人), 바람을 타고 날고 있는 몽롱한 자태의 선인(仙人)을 그린 그림까지…….

모든 그림이 생생하고 운치 있었는데, 유명해진 윤 시랑의 다른 그림들보다 훨씬 더 출중했다. 상평 공주는 그림 하나하나마다 담긴 독특한 정취가 느껴졌다.

서재 안의 책장과 책상들에는 서책들이 그득그득 쌓여있었고, 어떤 책상 위에는 서책 몇 권이 아예 펼쳐진 채로 있었다. 그 위에 동그라미나 밑줄을 친 부분, 그리고 여백마다 빼곡히 주석이 적혀 있는 걸로 보아 윤 시랑이 힘써 공부한다는 것을 상평 공주는 알 수 있었다.

상평 공주는 윤청의 허락을 구한 후, 아무 책이나 한 권 집어 윤청이 대체 뭐라고 적었는지 살펴보았다. 그 안에는 서생들이 일반적으로 적는 자신의 감상이나 의문뿐만 아니라 신랄한 풍자가 적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서책에서 말하는 내용의 중점을 완벽하게 담고 있어, 공주는 책을 읽지 않아도 대강 그 책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서책, 화폭, 완성하지 못한 그림, 쓰다 만 글씨……. 이러한 것들은 본디 모두 서재를 어지럽히는 주범이어야 했지만, 어째서인지 은은히 감도는 먹물 냄새와 함께 공주에게 독특한 안정감을 주었다.

상평 공주 또한 무척 총명하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으므로, 마음속에 곧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사람들 말처럼 부친의 기세를 빌려 유명해진 것 같진 않아 보여.’

상평 공주는 한쪽에 서서 처음으로 약간 부끄러워하는 듯한 윤청을 바라보았다.

“윤 시랑의 솜씨가 무척 뛰어나군요. 언제 저를 위해 초상화를 한 장 그려주시겠어요?”

“공주 전하의 명이라면 응당 따라야지요. 서재에서 보낸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서, 이제는 정말 가야 할 듯합니다. 아니면 식사 시간에 늦을 거예요.”

“네, 그렇게 하죠!”

상평 공주는 손에 들고 있던 서책을 각도마저 정확히 맞춰 내려놓은 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다른 길을 통해 식당으로 향하면서, 계연이 머무는 객사를 지나갔다. 상평 공주는 뜰 안에서 흰옷을 입은 남자가 홀로 바둑을 두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그새 좀 더 친숙해진 윤청을 향해 물었다.

“윤 시랑,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저택의 하인 같지는 않은데요.”

윤청은 언뜻 보이는 계연의 모습을 잠시 바라본 뒤, 공주와 함께 걸어가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아, 고향에서 올라오신 어르신인데, 이곳에 잠시 머무르고 계십니다. 저분은 조용한 것을 좋아하시니, 굳이 들어가서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네.”

두 사람이 지나가던 시각, 계연은 일찍이 바둑에 흥미가 떨어져 그저 바둑돌을 손에 쥐고 바둑을 두는 시늉만 하던 차였다. 탁자 밑에 앉아 있던 여우와 계연의 어깨 위에 앉은 종이학도 마찬가지로 무료해하던 차였다. 물론 계연은 <검의첩>은 꺼내놓지 않은 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부터 소란스러웠을 터였다.

호운이 고개를 쭉 빼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기심에 찬 얼굴로 물었다.

“계 선생님, 청이의 곁에 있는 여인은 누구인가요?”

“분명 공주일 거야. 저렇게 단둘이 돌아다니는 걸 보니, 황제가 윤 훈장님 댁에 방문한 목적이 뻔하구나.”

그 말에 호운이 고개를 들어 계연을 바라보았다.

“저 여인이 청이의 마누라가 되는 건가요?”

이를 들은 계연이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고개를 숙여 여우를 향해 물었다.

“너처럼 산에서 수행하는 여우가 그런 것도 알고 있니?”

계연의 물음에 호운이 약간 득의양양해하며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저와 육 산군에게 사람들이 이룬 문화는 넓고도 깊다며 가르쳐 주셨잖아요. 저도 그간 본 게 많으니 자연히 이해하게 되었지요. 저들은 장가가지 않은 남자와 시집가지 않은 여자이니, 보기만 해도 추측할 수 있죠.”

“시집가지 않은 걸 어떻게 아니?”

계연이 순간적으로 흥미가 일어 호운에게 물었다.

‘이 여우가 설마 벌써 법안(法眼)을 얻었거나 혹은 사람의 기운을 살피는 방법을 깨달은 것인가?’

하지만 계연의 예상과는 달리, 호운은 앞발로 제 코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냄새로 알아요. 암내(*암컷 동물이 발산하는 냄새)가 안 나거든요. 혼인하지 않은 암컷한테는…….”

“됐다, 됐어.”

계연은 호운의 대답에 무척 난감한 기색이었다. 호운이 쓰는 방법은 무척 동물적인 방법이었지만, 무척 정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운은 헤헤 웃으며 윤청과 모르는 여인이 함께 멀어져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호운도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윤청이 실은 일찍이 혼인했어야 하는 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계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저 여인이 어떤 것 같으세요? 윤청과 어울리나요?”

“그건 윤청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하지만 저 여인은 보통 사람도 아니고 무려 공주이니…….”

계연의 말에 호운은 최근 윤청에게서 배운 동작을 흉내 내어, 앞발로 아래턱 밑의 털을 쓰다듬었다. 호운은 사람이 수염을 쓰다듬는 것 같은 그럴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공주라고요. 신분만 보면 꽤 괜찮네요. 덕행(德行)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매를 한번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바둑판 위의 백돌이 저절로 통 안으로 들어갔고, 다시 한번 소매를 휘두르자 이번에는 흑돌이 저절로 다른 통 안으로 들어갔다.

호운은 회랑 모서리를 돌아가 더는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초조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귀한 기회를 다 놓치게 생겼네! 저도 따라가 봐야겠어요! 선생님, 저 가도 돼요?”

호운도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계연의 뜻을 먼저 물었다. 만약 계연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도 말썽을 피울 생각은 없었다.

그러자 계연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래, 가보거라. 들키지만 말렴. 윤 훈장님 쪽은 지금 한창 황제를 접대하고 있을 거야. 네가 황제에게 해를 끼칠 뜻이 없다고 해도, 그는 자미(紫微)의 기운을 가진 데다 그 기운이 얕지 않으니 너무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헤헤, 알겠어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호운이 탁자 아래에서 나와 뛰쳐나가기도 전에, 계연의 어깨 위에 있던 종이학이 날개를 퍼덕이며 호운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자명했다.

그러자 호운이 앞발로 종이학을 톡톡 쓰다듬은 후, 계연에게 다시 인사했다.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그래, 자세히 보고 오렴. 갔다 와서 내게도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니까!”

“네!”

힘차게 대답한 호운이 뛰쳐나가자 단 몇 초 만에 이미 호운의 종적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계연은 결국 홀로 조용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얼마 후에 윤중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계 선생님, 계 선생님! 방금 큰일이 있었어요! 큰일!”

윤중은 회랑을 따라 멀리서부터 뛰어 들어오면서도 그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온통 새빨개진 그의 얼굴이 추위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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