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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433화 (433/892)

433화. 그렇게 대단할 줄이야

응접실을 나온 윤중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다급히 계연에게 물었다.

“계 선생님, 이번에 형이 정말로 혼인하게 될까요? 그럼 저도 곧 숙부가 되겠네요? 상평 공주가 무척 고우니 저희 형이라고 해도 그리 오래 군자처럼 굴지 못할 거예요. ‘식색성야(食色性也: <맹자(孟子)>의 한 구절로, 식욕과 색욕은 인간의 본능이라는 뜻)’라는 말도 있잖아요!”

계연은 윤중의 이마에 또 꿀밤을 때리려다 말았다.

“어린 나이에 쓸데없는 생각만 가득하구나. 청이는 어릴 때 너보다 훨씬 착한 아이였는데.”

“저는 원래부터 형보다 못한걸요. 그리고 계 선생님은 모르시겠지만, 저희 형이 겉으로는 문인(文人)처럼 유약해 보이지만 실은 힘이 엄청 세다고요. 참, 아직 대답 안 하셨어요. 그래서 형이 정말로 공주 전하와 혼인할 수 있을까요?”

윤중은 윤청의 혼사에 대해 무척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래의 조카를 안아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조카가 조금 자라기만 하면 함께 나가서 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윤중은 조카가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나이가 들면, 윤중 자신은 더는 개구쟁이처럼 놀지 못하는 나이가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계연은 회랑 밖으로 보이는 하늘의 달과 별을 바라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네 생각만큼 빨리 혼사가 치러지진 않을 거야. 하지만 윤청과 그 공주 전하의 혼사는 거의 성사되었다고 보면 돼. 황제도 너희 집안에서 모두 그 일을 원하고 있으니까. 더욱이 윤청과 상평 공주도 서로에게 괜찮은 감정을 가진 듯하더구나.”

윤중은 계연의 대답에 뛸 듯이 기뻐했다. 계 선생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이번 일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계 선생님, 형하고 공주 전하께서 지금 무얼 하는지 가서 구경할까요?”

“뭘 하긴, 그림 그리겠지. 그들이 나가면서 한 이야기를 못 들었니?”

“아뇨, 들었어요. 저는 그냥 그들이 어떻게 그림을 그리는지 보고 싶어서요. 계 선생님, 혹시 모습을 감춰서 그 두 사람이 저희를 볼 수 없게 만드는 술법 같은 거 부릴 수 있으세요?”

“하하, 조그만 것이 머릿속에 온통 잡생각만 가득하구나! 앞으로는 그 머리를 병법(兵法)공부에도 쏟아보렴!”

계연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이렇게 꾸짖었다.

“네 형은 총명하고 심사가 치밀하니, 세상에 그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건 얼마 없을 거야. 그러니 너도 네 형 앞에서 잔머리 그만 굴리는 게 좋을걸!”

그러자 윤중이 작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많이 겪어왔다고요. 지금은 선생님이 있잖아요. 형이 설마 선생님의 술법을 꿰뚫어 보겠어요?”

“하하, 나는 그런 흥미 없다!”

계연은 웃으며 이렇게 말을 남기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객사로 향했다. 그러자 윤중도 다급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 * *

한편 윤청은 서재 안에서 문방사우를 꺼내어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벼루만 해도 몇 가지나 넘게 늘어놓았고, 먹은 색깔이 조금씩 다 달랐는데 심지어 주홍색이나 황색도 있었다.

상평 공주는 호기심에 찬 얼굴로 윤청이 하얀 선지(宣紙)를 꺼내 준비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윤 시랑, 제가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림을 다 그릴 때까지 가만히 서 있어야 하나요?”

그 말에 서진(*書鎭: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으로 종이의 각 모서리를 고정하고 있던 윤청이 고개를 들자, 윤청은 한 쌍의 맑은 눈과 마주쳤다.

“아니요, 계속 서 계시면 무척 피곤하실 겁니다. 시녀와 함께 연탑(*軟榻: 높이가 낮고 길쭉한 휴식용 평상)으로 가서 쉬고 계시지요. 바둑을 두셔도 되고, 엽자패(*葉子牌: 고대에 하던 일종의 카드 게임) 놀이를 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되나요? 듣기로는 초상화를 그릴 때 많이 움직이면 안 된다던데요.”

윤청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잘 정리한 다음, 가느다란 붓에 먹물을 묻혀 종이 한쪽에 색깔을 확인해본 후 자신 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러니 공주 전하께서 편한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공주 전하의 찡그림도 웃음도 전부 화폭에 담아내고 싶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계시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상평 공주는 눈이 살짝 크게 뜨이더니, 뒤이어 윤청을 향해 미소 지었다.

“윤 시랑, 편하게 양평(楊萍)이라고 부르세요. 저도 앞으로는 윤청이라고 부를 테니.”

그렇게 말한 상평 공주 양평은 시녀를 불러 정말로 책상 맞은편에 있는 연탑으로 가 앉았다. 그러고는 차와 다과를 곁들여 엽자패 놀이를 하거나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공주는 때때로 윤청을 흘깃대며 그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윤청은 책상 앞에 가만히 서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마음에 가만히 모습이 떠오르자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으로 본 모습은 그의 마음에 그대로 잔상으로 남아 막힘없이 그려나갈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한 시녀가 엽자패 놀이를 하다가 양평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공주 전하, 윤 시랑께서 무척 진지한 모습이세요!”

“그래, 어서 패를 내렴.”

상평 공주는 시녀를 재촉하면서도 곁눈질로 윤청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번 보고 한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쪽을 잠깐 보다가 책상 위에서 오랫동안 붓을 놀렸다.

‘잘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네.’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공주는 이쪽으로 고개를 든 윤청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공주는 얼른 시선을 엽자패 놀이로 거두었다.

방 안의 대들보 위에서는 종이학이 아래의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종이학은 윤청을 보았다가 공주를 보기도 하면서, 윤청이 그리고 있는 그림과 상평 공주가 시녀들과 엽자패 놀이를 하는 것을 번갈아 보기도 했다.

그런 종이학 옆에는 붉은 털 공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잔뜩 몸을 말고 있는 여우 호운이었다.

호운은 고양이처럼 대들보 위에 가만히 앉아 아래를 바라보다가, 때때로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이런 절묘한 곳을 찾아내다니!”

호운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늘었다. 종이학은 고개를 돌려 호운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열심히 아래의 상황을 관찰했다.

잠시 후, 호운은 송곳니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은 무섭다기보다는 조금 야비해 보였다.

“헤헤헤, 공주가 마음이 있나 보네. 이제 겨우 첫 만남일 뿐인데. 과연 윤청이야, 빠르기도 하지!”

그러자 종이학이 다시 고개를 돌려 호운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에 종이학은 오랫동안 호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에 호운이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종이학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웃음기 띈 어조로 대답했다.

“냄새로 알았지. 종이학인 너는 수컷이나 암컷의 구분이 없으니 모를 테지!”

그 대답을 들은 종이학은 다시 아래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종이학이 상평 공주를 좀 더 유심히 바라보는 듯했다.

대략 한 시진(2시간)하고도 반이 더 지난 후, 황제가 마침내 하인을 보내어 궁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하지만 윤청의 그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상평 공주는 초상화의 완성에 지장이 생길까 봐 마음이 조급해졌다.

윤청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공주께서는 안심하고 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전하의 찡그림도 미소도 모두 제 마음에 있으니, 그림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

그의 미소와 대답에 공주의 마음에서는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마음속에 양평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어떤 감정이 부피를 키웠다.

“그럼 궁중에서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참, 양평이라고 부르라니까요!”

이렇게 대답한 상평 공주는 시녀들과 함께 서재를 나섰고, 윤청도 황제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 그녀를 뒤따랐다.

* * *

시위들은 찬 바람을 맞아가며 회궁 행렬을 거의 뛰듯이 따라갔다. 반면 두 대의 마차 안에는 난로며 따뜻한 찻물과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두 번째 마차 안에는 상평 공주와 덕비가 함께 앉아 소곤소곤 모녀만의 대화를 나누었다.

“평(萍)아, 내게만 사실대로 말해 보거라. 윤 시랑이 어떻더냐?”

상평 공주는 덕비의 얼굴을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다과를 만지작거리며 윤청이 그리는 자신의 그림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했다. 동시에 윤청이 했던, ‘공주 전하의 찡그림도 미소도 모두 제 마음에 있다’는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어머니만큼 딸을 잘 아는 이는 없다는 말처럼, 덕비는 공주의 미소를 보자마자 마음에 꽃이 핀 듯 흡족해했다.

“우리 평이가 윤 시랑이 맘에 든 모양이로구나?”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언제……!”

* * *

같은 시각.

윤중이 계연에게 일찍 자라며 쫓겨난 뒤로, 재상부의 객사 방 안에는 계연, 종이학과 호운, 그리고 조용히 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은 ‘콧바람을 쏘이러’ 나온 작은 글자들뿐이었다.

지난날의 모습과는 달리, 방 안은 조금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방 안의 모두가 호운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운의 이야기가 끝나자 계연마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감탄했다.

“청이가 그렇게 대단할 줄이야!”

“그러니까요, 저도 생각지도 못했어요!”

호운이 흥분한 얼굴로 앞발을 휘두르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도 배워야겠어요. 그런 능력은 언젠가 쓸데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그의 말에 찬동했다.

“네 말이 옳다. 만약 윤청이 이를 책으로 엮어낸다면, 윤 훈장님이 집필한 서책보다 훨씬 큰 인기를 얻겠구나!”

“헤헤, 계 선생님께서도 배워보실래요?”

“몹쓸 소리!”

계연이 소매를 한번 휘두르자 호운은 공처럼 굴러 객사 문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러자 작은 글자들이 즉시 문간으로 날아가 호운을 놀려댔다.

“호운은 몹쓸 놈이야!”

“하하하, 쫓겨날 만도 하지!”

“몹쓸 놈! 감히 어르신을 놀리다니!”

“몹쓸 여우 호운!”

“꼭 공처럼 굴러가네!”

“하하하하.”

호운이 막 그들에게 소리치려던 순간, 방문이 눈앞에서 쾅 닫혔다. 그러고는 계연의 느릿한 목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네 방 가서 자거라.”

호운은 일어나서 털을 툭툭 털고 귓가를 긁적이다가, 결국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윤씨 집안 사람들은 계연을 귀빈으로 접대할 뿐만 아니라, 호운마저도 정당한 손님으로 대했다. 그러니 당연히 호운에게도 배정받은 방이 있었고, 그 방은 바로 계연의 방과 마주 보고 있는 건물이었다.

다만 호운은 자신의 방 앞에 도착하자마자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다가, 다시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잠시 주저하던 그는 자신이 바라보던 방향을 향해 가볍게 뛰어갔다.

호운은 지금 그다지 수련하고 싶은 마음이나 자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윤청의 서재로 향했다. 윤청과 오랜 벗인 호운은 지금 윤청의 기분, 좀 더 정확히는 공주에 대한 윤청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윤청도 그렇게까지 마음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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