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호운의 친우들
윤청의 서재 밖에 도착하자 과연 안쪽에서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호운은 전처럼 숨어들지 않고 떳떳하게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윤청, 나야. 들어가도 돼?”
“들어와.”
윤청의 허락에 호운은 곧바로 문을 열고 서재로 들어간 다음, 방 안의 열기가 혹여 새어나갈까 재빨리 문을 닫았다.
윤청은 등잔불 두 개를 켜놓고서 책상 위로 허리를 구부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에 호운도 살금살금 그의 곁으로 다가가 윤청의 등 뒤에 놓인 빈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뒷발로 발돋움을 해서 윤청이 그리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윤청은 말없이 온 신경을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는데, 옷 끝을 그리는 손길이 더없이 진지했다. 하지만 자신의 친우를 잊지는 않았던 듯, 윤청은 붓과 먹을 바꾸면서 고개를 돌려 호운을 향해 물었다.
“주방에 닭튀김이 반 넘게 남아 있어. 윤중이 다리 하나를 뜯어먹은 것 말고는 거의 그대로 있는데, 먹고 싶으면 가져오라고 할까?”
“응응, 빨리 가져오라고 해!”
호운은 일찍이 그 닭요리를 눈독 들이고 있었으므로 즉시 이렇게 대답했다.
“하하, 그럼 조금만 기다려. 사람을 보내야 하니까. 원래는 내일 네 몫으로 요리사에게 아예 새로 만들어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너는 지금 당장 먹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이렇게 말한 윤청은 붓을 내려놓고는 서재 밖으로 나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하인에게 명을 내렸다.
호운은 윤청이 자리를 비우자 앞발을 책상에 디딘 후, 그림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초상화를 살폈다.
반나절 만에 윤청은 대강의 윤곽을 모두 그려냈다. 남은 것은 1, 2일 동안 좀 더 자세히 다듬는 것뿐이었다.
그림 안의 상평 공주는 연탑 위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신구가 꽂힌 머리, 아름다운 비단옷, 하얀 섬섬옥수가 모두 아름다웠다. 그녀는 엽자패를 쥔 손으로 난화지(*蘭花指: 중국 전통극에서 여자 주인공이 엄지와 중지를 구부리고 나머지는 편 손놀림)를 하고 있었는데, 그 표정과 모습이 생동감이 넘쳐 마치 공주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와, 정말 잘 그렸네. 계 선생님도 네 화법(畫法)이 신묘하다고 칭찬하시더니.”
가만히 그림을 감상하던 호운은 윤청과 상평 공주가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자손만당(*子孫滿堂: 자손이 집에 가득하다는 뜻)한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내가 그런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역시 열심히 수련을 닦아야겠어. 충분한 도행을 쌓으면 속세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거야!’
호운은 자신이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계 선생님은 곧 떠날 테고, 자신을 이곳에 홀로 두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호운 자신도 이곳에 남는 것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더라도, 이는 자신의 수행을 더욱 늦추기만 할 터였다.
계 선생님은 자주 이곳저곳 돌아다녔고, 최근에는 선생님이 거안소각을 떠나 있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다. 이에 호운도 선생님이 다음번에 이곳에 다시 올 때는 또 몇 년이 지나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윤청이 시간을 내어 영안현에 오지 않는 이상, 호운 자신은 무척 오랫동안 윤청과 윤 훈장님을 다시 보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어쨌든 자신은 요괴였으므로, 윤청이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면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진다. 그때는 부인이 항상 윤청의 곁에 있을 것이고, 지금처럼 요괴의 모습을 한 자신과 함께 놀아줄 시간은 없을 것이다.
호운은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우울함이 커지며, 드디어 윤청이 부인을 얻게 된 데서 오는 기쁨을 우울함이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휴우, 이게 다 도행이 얕은 탓이지. 내게 육 산군 정도의 도행이 있었다면, 사람으로 둔갑해서 제대로 된 문사(文士)의 옷차림을 하고 청이와 청이의 부인에게 찾아가, 윤형 안녕하시오, 형수님도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할 수 있을 텐데.’
윤청이 다시 서재로 돌아오자, 호운은 윤청이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윤청은 잠시 조용히 그림을 그리다가 별안간 고개를 돌려 호운에게 물었다.
“오늘 왜 이렇게 조용해? 너답지 않게.”
“그냥, 내 수행이 너무 얕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으니 답답해!”
호운은 의자 위에 앉아 사람처럼 앞발 두 개를 각각 양쪽의 팔걸이에 올려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무척 우스웠다. 게다가 호운의 풍성한 꼬리는 여전히 앞쪽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하하, 내가 비록 요괴의 수행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예전에 때때로 춘목강의 늙은 거북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었어. 너는 영지를 얻은 후부터 지금까지 4, 50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그 속도면 느리다고 할 수 없어.”
하지만 윤청의 위로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건 다른 야생 요괴들과 비교해서 그런 거고, 나는 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몸이잖아. 비록 나도 계 선생님의 도행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지만, 분명 나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수준이겠지. 너는 그런 ‘선인지로(*仙人指路: 선인의 가르침을 얻는 것)’의 기회를 얻는 요괴가 세상에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해? 휴우, 됐다. 닭튀김은 아직 멀었어?”
“주방에서 다시 데우고 있어. 금방 준비될 거야.”
이 와중에도 여전히 입맛을 잃지 않은 호운을 보고 윤청은 다시 안심한 얼굴로 그림에 집중했다.
* * *
그날 밤 호운은 서재에 오래 머물지 않고, 윤청을 위해 닭다리를 한 조각 남긴 뒤 그간 수행을 게을리했다며 곧바로 돌아갔다.
윤청의 혼사는 짧은 시일 내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계연도 당연히 따로 참석할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파하지 않는 연회 자리는 없다 했다. 계연은 윤씨 가문의 저택에 충분히 오래 머물렀다고 생각했으므로, 정월 대보름이 지난 후 윤씨 일가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호운과 함께 재상부를 떠났다.
* * *
정월 20일, 계연과 호운은 경기부를 떠나 구름을 타고 계주로 향했다. 다만 계연은 곧장 덕승부로 향하지 않고 춘혜부로 방향을 잡았다.
호운은 구름 아래로 보이는 도시 주변에 굽이치는 강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계 선생님, 저희는 지금 춘목강으로 가는 거죠? 거북과 강청어를 보러요?”
경기부를 떠난 후로 약간 침울해하던 호운은 간만에 흥분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호운은 자신에게 있어 진정한 벗이란 둘뿐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는 윤청, 다른 하나가 바로 강청어였다. 다른 이들은 호운보다 손윗사람이거나 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은 편이었다. 이들보다 종이학과는 좀 더 친밀하다 할 수 있었지만, 호운에게 종이학과의 교류는 조금 피곤했다. 게다가 호운은 종이학의 생각이 어떤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춘혜부로 가서 그간 늙은 거북과 강청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좀 보려고 한다. 그 김에 백제도 만나보고.”
“백제요?”
호운은 한참 생각에 잠긴 후에야 자신이 그런 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고서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백제가 누군데요?”
계연도 호운이 백제를 만나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춘목강의 강신이야. 하얀 교룡이지.”
“교, 교룡이라고요?”
호운이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 선생님, 그, 제가 예전에 듣기로 용족들은 먹성이 엄청나서 요괴들을 통째로 삼키는 것을 좋아한대요. 또 구름을 몰고 비를 뿌리는 능력이 있어, 백성들에게 물의 신으로 숭배받기도 한다고요. 저, 저는 일개 여우 요괴일 뿐인데.”
“두렵니?”
“네.”
“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렴!”
호운은 계 선생님과 함께 있을 때는 확실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약간 안심했다.
“계 선생님과 그 강신은 친우 사이인가요?”
그러자 계연이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친우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예전에 그에게 요괴 한 마리를 잡아다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그간 아무리 찾아봐도 적당한 놈이 없었는데, 오늘 마침 네가 있구나.”
호운은 그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선생님, 제발 저 좀 놀라게 하지 마세요. 제가 담이 작은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하하하하.”
계연은 시원스레 웃으며 춘혜부 부성 밖 강변에 내려선 뒤, 부성을 향해 걸어갔다.
* * *
마침 한창 바쁜 아침 시간이라 성문 근처는 드나드는 인파로 북적였다. 춘목강에서 제일로 꼽히는 강신을 모시는 사당 또한 이미 여행객과 참배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연량국의 대량사와 비교하면 이곳도 마찬가지로 인파로 북적이기는 했지만, 좀 더 관광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이곳에서는 서로를 마음에 둔 남녀가 만나고, 여행객들이 모여들고,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남겼다. 각종 욕망을 지닌 사람들이 모이는 사찰보다는 좀 더 풍류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계연은 이곳 강신 사당이 좀 더 마음에 들었다.
공교롭게도 춘목강 강신은 현재 사람의 모습으로 사당 안에서 문인과 서생들이 글을 쓰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곳 사당에서 정확한 논평을 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강신의 사당에서 글을 남길 만한 공간은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대단하다고 인정받는 작품이 아니면 회랑 벽에 걸릴 수 없었다. 이곳에서 백문천(白文川)이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강신은 논평으로 이름난 덕분에 이곳 묘지기마저 어느 정도 그를 존중해주고 있었다. 백문천이 고개를 끄덕인 작품은 항상 벽에 걸릴 정도였다.
이때, 한 무리의 문인들은 사당 외원(外院)의 회랑 벽 근처에서 서안(書案)을 여러 개 늘어놓고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 중에는 서생뿐만 아니라 젊은 여인들도 많아 분위기가 떠들썩했다.
“낮에는 강을 따라 봄의 경치를 감상하고, 밤에는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강물 위의 등불을 구경하노라(白日游江踏春水, 夜里入簾觀華燈)…….”
“좋은 글이군!”
“음, 조(趙) 선생께서는 역시 실력이 뛰어나시군요!”
“백 선생님은 어찌 보십니까? 벽 위에 걸릴 수 있겠습니까?”
“오, 그렇지. 백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문인들이 춘목강의 신 백제의 의견을 묻자, 중년의 유학자처럼 보이는 백제가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더니 이렇게 말했다.
“글은 괜찮은데, 조금 짧군요!”
“하하하, 백 선생, 이건 아직 완성된 글이 아닙니다. 제가 완성하면 다시 와서 의견을 들려주십시오!”
“좋습니다. 그럼 저는 조 선생의 걸작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늘…….”
백제는 돌연 하려던 말을 멈추더니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어느 방향을 향해 고개를 휙 돌린 그는 다급히 그쪽으로 떠나갔다. 이를 지켜본 문인과 구경꾼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백제가 급히 걷고 있는 정도로 보일 뿐이었지만, 그의 실제 속도는 그보다 훨씬 빨랐다. 몇 초 만에 사당 밖으로 나온 그는 노점이 즐비한 곳을 지나 한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백제가 멀리 강물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옥비녀를 꽂고 뒷머리는 자연스레 늘어뜨린 모습의 흰옷을 입은 서생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곁에는 붉은 털을 가진 여우가 한 마리 따르고 있었다.
백제는 발걸음을 재게 놀려 아직 멀리 떨어진 계연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큰 소리로 예를 올렸다.
“계 선생님께서 춘목강을 찾아주셨는데, 멀리 마중 나가지 못해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