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연약한 정괴(精怪)
이때 주위에는 그들 외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계연도 다른 이들의 눈길을 신경 쓰지 않고 그를 향해 인사했다.
“어서 예를 거두세요, 백 강신. 제가 모처럼의 흥취를 방해했군요.”
그러자 백제가 고개를 돌려 강신 사당이 있는 쪽을 바라본 후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취미일 뿐입니다. 저기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기분도 좋고, 인간 백성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거든요.”
계연은 백제가 정신적으로 전보다 좀 더 여유로워 보인다고 느꼈다.
“참, 이 여우가 호운이겠군요. 겨우 몇 년 동안 보지 못했을 뿐인데, 도행이 크게 발전한 걸 보니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나 봅니다!”
이 여우는 예전에 계연과 함께 춘혜부에 온 적이 있었다. 심지어 강변에서 강청어며 늙은 거북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해서, 백제는 호운을 알고 있었다.
백제가 진담과 과장을 반씩 섞어 호운을 치켜세우자, 호운은 조금 겸연쩍은 동시에 강신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데에 놀랐다. 무려 강신의 인사를 받았으므로 호운도 몸을 일으켜 세워, 앞발을 모아 양손을 맞잡는 자세를 취했다.
“소생 호운, 강신 나리를 뵙습니다!”
여우가 무척 정중한 태도로 그에게 예를 올리자 백제도 살짝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호운의 체면을 무척 세워준 것이었다. 백제는 계연에게 시선을 돌려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춘목강에서 제일로 꼽히는 사당을 유람해보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제가 선생님을 데리고 이곳저곳 설명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간 수많은 문인이며 풍류객들이 사당에 와서 글과 풍경화를 남겨, 지금은 사당의 회랑 벽 전체가 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전에 백제는 이런 일들에 무관심했으나, 지난번에 계연의 앞에서 강신 노릇을 제대로 해보겠다고 다짐한 뒤로는 춘목강에 사는 물의 족속들이며 강을 끼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과 동물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백제는 마침내 사당 안의 진귀한 보물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한동안 사당 안에 남겨진 시와 그림에 푹 빠져 지냈다.
계연도 무척 구경해보고 싶긴 했으나 계연의 두 눈은 특별한 무언가를 볼 때가 아니면 사물을 또렷하게 보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책이나 서신을 읽는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예전에는 글자가 새겨진 죽간 같은 것만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었고 보통의 서책들은 눈앞에 가져다 대고 읽어야만 했다.
또한 이제는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종이의 미세한 촉감 차이만으로도 ‘글자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강신 사당의 벽은 그렇지 않을 테니, 아무래도 아주 가까이 다가서야만 대강의 윤곽이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자는 그래도 대충 어떤 글자인지 알 수 있고, 전체적인 내용을 읽다 보면 추리도 할 수 있겠지만 그림은 달랐다.
백제는 어쨌든 자신과 연결된 백돌이었으므로, 계연도 자신의 눈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백 강신께서도 모르시진 않겠지만, 실은 제 눈은 반은 먼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호운도 그제야 계 선생님이 맹인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평소에 움직이거나 어떤 동작을 할 때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 쉽게 그 사실을 잊곤 했다.
하지만 백제는 그 점을 잊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무척 자연스럽게 대응한 것인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께 모호하게 보이는 글자나 그림은 별 가치가 없는 것들이겠지요. 하지만 어떤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신비로운 운치가 깊어져 무척 비범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작품은 선생께서도 또렷하게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다면 저도 어서 가서 보고 싶군요!”
계연은 백제의 말에 호기심이 일었다.
“이쪽입니다!”
백제가 손을 뻗어 그들을 인파가 북적이는 사당으로 이끌었다.
백제는 계연을 데리고 들어가면서, 그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장안법을 이용했다. 이에 그들은 자연스레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 회랑으로 걸어갔다.
오래전 계연이 이곳에 방문했을 때는 도행이 아직 얕았고, 따로 할 일도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감상하지는 않고 곧바로 강신을 모시는 대전(大殿)으로 향했었다. 계연은 향을 한 대 올리고는 그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라 다급히 도망친 것이 생각났다. 게다가 눈도 좋지 않았기에 회랑의 벽을 굳이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춘목강 강신이 직접 자신들을 데리고 사당 내부를 천천히 구경시켜주니, 계연은 이제야 사당의 진정한 일면을 보게 된 것 같았다.
계연은 슬쩍 둘러보기만 해도 사당의 벽이 작품으로 빼곡하게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무수히 많은 글과 그림 중에서도 어떤 작품들은 희미한 빛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그런 작품은 오래 볼수록 점차 또렷해졌고, 그 속에 담긴 신묘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는 이 작품을 남기고 간 이들이 모두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학식도 실력도 뛰어난 이들이라는 건 확실했지만, 이렇게 오래 그 신묘함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좌광도 같은 이가 몇이나 더 있겠는가?
강신의 사당은 참배객도 많고 여행객도 많았다. 특히 이 실력이 좀 있다고 하는 문인이나 풍류객들은 모두 이 벽 앞에 서서 자신들의 의견을 펼치고 실력을 드러냈다. 이는 강신 사당이 세워진 2백 년 내내 이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벽 위에 걸린 작품들에는 점점 더 많은 신의(神意)가 담기게 되었다.
이런 예시는 특히 그림에서 많이 드러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림 위의 색채가 깊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계연이 벽을 장식한 글과 그림을 정신없이 구경하는 모습을 보고 백제는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계 선생님, 제 강신 사당이 어떻습니까?”
“정말 대단하군요. 과연 춘목강 제일(第一) 사당이라 불릴 만하네요. 이 글자들에는 원래부터 좋은 뜻이 담겨 있었지만, 그림들은 시간에 지남에 따라 심오함이 깊어져 백여 년쯤 지나면 정괴(精怪)가 될 수도 있겠어요.”
계연이 무척 흥미로워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호운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벽화를 살폈다. 물론 호운도 처음 보자마자 이 그림들이 무척 뛰어나다고 생각했지만, 이것들이 이후에 정괴가 될 수도 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계 선생님, 그림도 정괴가 될 수 있나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야. 세간의 수많은 정괴는 모두 기연(機緣)을 얻어 생겨난 존재들이란다. 그들이 생겨날 만한 조건이 갖춰지면, 당연히 정괴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생기는 법이지.”
계연은 이렇게 설명하고 입을 다물었다. 백제는 호운이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것을 보고 좀 더 설명해주었다.
“선생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괴들은 처음 생겨나면 무척 연약한 편이라서 외부 세계의 영향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누군가 세심히 보살펴 줄 이들이 필요하죠. 그렇지 않으면, 짓궂은 어린아이가 나뭇가지로 이 벽화를 살짝 긁기만 해도 곧바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예? 너무 불쌍하네요!”
“하하, 이들보다 더 가련한 것들은 많고 많지만, 당신이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젊은 친구께서도 어렵게 얻은 수행의 기회를 소중히 하십시오.”
백제는 이렇게 말하며 살짝 계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의 말에는 따로 가리키는 바가 있어, 호운도 이를 알아듣고 백제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시 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했고, 호운은 이번에는 벽에서 좀 더 거리를 벌렸다. 자신이 실수로 발톱으로 긁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동시에 다른 참배객들이 행여 그림에 손을 대지는 않을까 감시했다.
호운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어떤 이들은 벽 위의 글자와 그림을 손을 뻗어 만져보기도 했고, 젊은 연인은 한구석에서 돌멩이로 벽에 글자를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이들이 남기는 글은 대부분 ‘영원한 사랑’이나 ‘누구누구가 방문하다’ 같은 종류였다.
“계 선생님, 백 강신, 저기 저 사람들…….”
“여기는 비록 글자를 새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모든 이들이 규칙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참배객들이 옛사람들이 남긴 작품을 훼손한 적은 없었고, 실은 이 모든 게 여기 이 작품들이 견뎌내야 할 일종의 시련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묘지기에게 좀 더 엄하게 방문객을 단속하라고 하고, 사람들 스스로 좋은 풍조를 유지하도록 할 수밖에 없겠죠.”
이렇게 말한 백제가 손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보세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호운이 고개를 돌리자, 남색 장삼을 입은 문인 두 사람이 그 젊은 연인들을 제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회랑 벽을 가리키며 엄숙한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두 남녀는 불안하고 어색해 보이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했다.
백제의 설명에 깊이 동감한 계연은 탄식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백 강신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는 작품들이 견뎌내야 할 시련(劫)인 동시에 기연을 얻을 기회이기도 하지요. 술법을 이용해 여행객과 참배객들로부터 벽화를 보호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들이 힘을 축적해 정괴가 될 길도 끊기고 말죠. 무릇 화복(禍福)이란 모두 그런 식으로 이어진 법이니까요.”
두 사람과 여우 한 마리는 반나절 동안 자세히 사당 내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이 다채롭고 뛰어난 작품들은 호운마저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한참 팔미인도(八美人圖)를 감상하던 호운은 어느샌가 하늘이 어두워진 것을 알아차렸다. 강신 사당에는 이제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고, 곧 문 닫을 시간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계 선생님, 제가 이미 화방(*畫舫: 용이나 봉황 따위 모양으로 꾸미고 그림을 그려 곱게 단청한 놀잇배) 한 척을 준비해 놓았으니 풍경도 감상할 겸 강으로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오숭과 청청(靑靑)에게도 선생님이 오신 것을 알렸으니, 분명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하죠!”
그들이 사당을 구경하는 동안, 백제는 일찍이 모든 것을 안배해 놓은 참이었고 계연도 이를 알고 있었다.
강신 사당 안쪽의 강변과 닿아있는 곳에는 수대(水臺)가 세워져 있었다. 호운은 그곳을 향해가는 두 사람을 뒤따라가며 이렇게 물었다.
“청청이요? 강청어의 이름은 나벽청이니 그렇게 불러도 되긴 하지만, 꼭 암컷 이름처럼 들리는데요?”
“생각이 많구나.”
계연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고는 더 말을 잇지 않았고, 백제도 뜸 들이며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화방 한 척이 사당과 맞닿은 기슭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 세워진 선실의 처마 끝에는 노란 등롱이 두 개씩 걸려 있었다. 참새가 작아도 갖출 건 다 갖췄듯이, 선실 안에는 식탁과 의자, 술과 요리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편하게 쉴 수 있도록 연탑(*軟榻: 높이가 낮고 기다란 평상과 비슷한 가구)도 놓여 있었다.
배를 모는 사공은 도롱이를 입고 두립을 푹 눌러쓴 채로 착실히 노를 저었다. 그는 계연과 백제 쪽은 쳐다보지 못하고 가끔 호운을 관찰하기만 했다. 보아하니 그는 사람이 아니라 춘목강에 사는 물의 족속인 것 같았다.
배가 물살을 가르고 강 중심으로 향했다. 춘목강 위에는 화방이며 누선(樓船) 등이 여러 척 떠 있었는데, 곳곳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계연과 백제가 탄 작은 화방은 가장 흔한 형태의 배였으므로 누구도 주의 깊게 쳐다보지 않았다.
계연과 백제는 선수에 서 있었고, 호운은 그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