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7화. 살기(煞氣)가 흩어지다
지맥의 균열이 나타난 산맥 중심의 높이 우뚝 솟은 산봉우리 위에서 계연은 조금 전 자세 그대로 용연향을 마시고 있었다.
용연향의 독특한 효능 덕에 계연은 이미 상태가 많이 나아진 뒤였다. 특히 왼손의 찌르는 듯한 고통이 많이 완화되었다.
조금 전 법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탓에, 뇌겁(雷劫)에 당한 상처가 다시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법력은 모두 소모했지만 몸 안의 영기는 그와 반대로 충분했기 때문에, 영기는 즉시 뇌겁의 남은 위세가 힘을 키울 수 있는 온상(溫床)이 되었다.
아까의 저릿한 고통은 계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눈썹을 찌푸릴 정도였다.
다행히 용연향의 효능의 무척 뛰어난 데다, 새로운 단기(丹氣)가 금방 만들어졌다. 새로운 단기가 금교(金橋)를 통해 단전에 들어와 법력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계연의 왼팔에 어린 고통은 금방 사라졌다.
그 시각.
산 정상에 서 있는 선하도 수사들은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방을 돌아보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하늘에서 떨어진 요마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아예 숨이 끊기거나 혹은 미약하게 호흡만 했다. 좀 더 도행이 높은 이들은 무너진 산 아래에서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일검에 하늘이 무너지다니……. 세상에 저렇게 신통한 검술이 다 있군요. 비록 선검이라지만 너무나 두려운 힘입니다…….”
“맞습니다. 저 검이 노린 것이 비록 요마라지만, 대면하는 순간에는 저조차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두려움에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더군요…….”
선하도 수사들은 서로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상대한 요마가 이렇게나 많았음을 깨달았다.
“저 요마 중에서…… 한 명도 도망치지 못했지요?”
그 물음에 곁에 있던 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온 것을 보자마자 달아난 놈들을 제외하면, 모두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선하도의 일반 수사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여섯 장로는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신통력을 이용해 서로 목소리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은 잠시 후 다시 한번 상공으로 날아올라, 선하도의 진법을 다시 설치했다.
잠시 후, 산맥 곳곳에서 떠오른 노을빛을 따라 하늘이 다시 한번 화려한 색채로 물들었다. 다만 선검이 내뿜었던 빛과 비교하면 좀 더 어둡게 느껴졌다.
“선하도의 제자들은 들어라. 지금부터 요마를 처리한다. 시체는 불태우고 혼백은 구속하라.”
진법이 모습을 드러내자, 장로 중 우두머리인 노인의 목소리에 온 산에 퍼졌다. 이에 다시 사기가 오른 선하도 수사들은 노을빛을 내뿜으며 요마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요마는 이미 태반이 죽어 있었고 아직 살아있는 이들은 여전히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그들은 여력이 남아 있더라도 도망치려고 할 뿐이지 수사들과 맞붙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들의 싸움은 수선자들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변했다. 특히 이화(離火)가 성공적으로 펼쳐진 후에는, 온 산이 노을빛과 이화로 뒤덮여 요마가 더욱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계연은 이에 안심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선하도 수사들이 뒷수습을 할 만한 능력이 충분해 다행이었다.
남아 있는 요마 중에는 감히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만한 담력을 지닌 없을 터였다. 누군가 온다 해도 일단 넝쿨검이 앞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얼마간 휴식을 취하자 금갑 역사를 불러낼 정도의 법력은 회복한 후였다. 삼매진화도 두세 번 정도는 뿜어낼 수 있었다.
계연은 천두호 안에 든 술을 몇 번 흔들어 보았다. 이 보배는 아무리 봐도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손으로 흔들어 보면 반 정도 남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술이 몇 두(*斗: 한 두는 약 6.25kg)나 남아 있었다. 계연은 천두호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원자포의 주인장에게 주었던 오래된 술병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물건을 알아볼 만한 안목이 있었을까?’
하늘도 놀랍게 할만한 검세를 부리느라 너무 많은 심력을 소모한 탓인지 계연의 생각이 이리저리 멋대로 뻗어나갔다. 계연은 솟구치던 살기(煞氣)가 땅의 균열 내부로 억눌러진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어 여섯 갈래의 노을빛이 계연이 있는 산봉우리로 날아왔다. 그들은 계연이 자유롭게 땅바닥에 앉아 오른손을 무릎에 대고 그 위에 얼굴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계연은 왼손으로 천두호를 살짝씩 흔들면서 지맥의 균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다시 처음처럼 평화롭고 안정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계 선생님.”
그중 계연과 가장 가깝다 할 수 있는 유학자 차림의 장로가 나서 양손을 맞잡으며 계연을 불렀다. 그러나 계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계 선생님? 계…….”
그가 좀 더 크게 계연을 부르려던 순간, 우두머리인 노인이 손으로 그를 제지한 뒤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계 선생을 귀찮게 하지 말게. 여기서 기다리지!”
조금 전의 상황을 겪고 나서 선하도 수사들이 계연을 대하는 태도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전에도 계연을 존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훨씬 더 공손해진 태도였다.
이에 대해 선하도 수사 중에서 이견을 가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계연은 지맥의 살기가 왜 자신의 ‘천경검세’에 의해 눌렸는지 생각하다가, 주위에서 수사들이 요마들을 공격하던 소리가 많이 줄어든 것을 알아차렸다. 뒤이어 계연의 오감(五感)이 다시 천천히 감각을 되찾았고, 계연은 선하도의 여섯 장로가 자신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죄송합니다, 방금은 제가 넋을 놓고 있었네요!”
계연은 술병을 거둬들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여섯 사람을 향해 공수하며 이렇게 물었다.
“선하도 분파의 도우(道友)들은 좀 어떤가요?”
그러자 우두머리인 노인이 길게 탄식했다.
“진법을 펼쳤던 도우 중에는 중상을 입은 자도 몇 있지만, 그건 선하도의 능력으로 충분히 치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산문(山門)에 남아 있던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계연도 그를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둥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지맥의 살기는 이미 봉인되었으니, 저희는 이만 선하도로 돌아가려 합니다. 만약 시간이 되신다면 저희가 선생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함께 선하도로 가시지 않겠습니까?”
선하도는 그에게 항상 신비로운 곳이었으니, 계연도 당연히 가보고 싶었지만, 계연은 막 대답하려던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에 계연이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이곳의 살기는 이미 누그러들었지만, 그전까지 퍼져나간 살기는요?”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전에 퍼진 살기는 대부분 노을빛과 이화에 의해 정화되었습니다. 약간이나마 퍼진 것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흩어질 겁니다.”
수선계에서는 항상 ‘천지(天地)에는 감정이 없다(無情)’는 쪽과 ‘천지에도 감정이 있다(有情)’이 있다는 관점으로 나뉘어 토론이 활발히 이어져 왔다. 지맥이 내뿜는 살기는 ‘유정론(有情論)’ 측의 좋은 근거가 되었다. 유정론을 믿는 이들은 지맥이 끊겨 땅이 고통을 느끼면 살기가 생겨난다고 믿었고, 그것은 천지에서 생겨난 것이어서 자연히 그 위력이 남다른 것이라고 여겼다.
선하도 수사들의 말에 계연은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영안현 우물 안의 귀신이 떠올랐다. 그것도 미약한 지면의 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게다가 여기서 도망친 요마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들이 과연 얼마나 멀리 도망갔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이 부근에 백성들이 사는 곳이 있나요?”
그러자 유학자 차림의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곳은 운주 서북쪽이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국가가 있긴 있습니다. 여기서 6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계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이렇게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 남아 계 선생님과 함께 인근을 좀 둘러보고, 사형과 사저들은 분파의 도우들을 데리고 선하도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다른 수사들이 서로 눈짓을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계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계연이 그의 물음에 양손을 맞잡고 대답했다.
“상처 입은 분들을 치료하는 게 급하니, 여기는 저와 상 선생님만으로 충분합니다.”
지맥의 살기에 직접 노출되었으니, 아무리 수선자들이라 해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부상자들을 치료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계연의 대답에 선하도 수사들의 우두머리인 노인은, 상역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에 다른 이들과 함께 계연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인사했다. 그러고는 선하도 수사들을 이끌고 노을빛을 일으키며 동해 방향으로 날아갔다.
* * *
선하도의 수사들이 법광(法光)을 내뿜으며 떠나가자, 산맥에는 계연과 상역만이 남았다.
계연이 사방을 둘러보니 노을빛과 이화(離火)에 의해 모든 게 타버린 후였지만, 그을린 흔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공기 가운데 희미한 누린내가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아무런 냄새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계연처럼 영각(靈覺)이 뛰어난 이들은 이처럼 희미한 냄새도 모두 포착할 수 있었다.
다시 지맥을 바라보니, 균열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살기(煞氣)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 마치 자연적으로 생겨난 깊은 골짜기인 듯 보였다.
“이곳 산신만 아깝게 되었네요. 산맥이 작지 않으니, 산신의 도행도 분명 상당했을 텐데요. 안 그래도 지맥의 균열로 인해 원기(元氣)가 크게 상했을 터인데, 곧바로 요마들이 몰려왔으니…….”
이곳 산신과 선하도 분파는 서로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 균열이 생긴 후에도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서로에게 이 상황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양측이 모두 큰 재앙을 입을 줄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가시지요, 산맥 주위를 한번 둘러봅시다.”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상역과 함께 구름을 밟고 날아올라 산 곳곳을 순찰했다.
산맥의 가운데 구역은 요마와의 싸움 때문에 무너지고 부러진 곳이 많았지만, 바깥쪽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들은 순찰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동물의 사체를 발견했다. 넓은 범위 내의 동물이 한꺼번에 죽은 것을 보니, 이는 모두 균열에서 나온 살기에 당한 것으로 보였다.
이로써 계연의 걱정이 타당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두 사람이 공중에서 법안으로 주위를 샅샅이 살핀 결과 살기가 남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산맥 안에 살던 동물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수백 리나 이어진 산맥 바깥쪽으로 날아가자, 그제야 살아있는 동물이 눈에 들어왔다.
상공의 구름 위에서 상역은 조금 안심한 얼굴로 계연에게 말했다.
“계 선생님, 보아하니 지맥의 살기가 그리 멀리까지 퍼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음, 좀 더 멀리까지 가보죠. 이 주변은 형편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간단히 몇 마디를 나눈 뒤, 다시 구름을 타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향했다. 아직 그 와중에도 이들은 아래쪽 영기(靈氣)의 변화와 지맥의 추세를 관찰하느라 속도를 빠르게 내지 않았다.
시간상으로 보면 선하도 분파의 수사들이 균열이 생긴 곳에 진을 펼치고, 요마들이 습격해오고, 다시 선하도에서 그들을 지원하러 올 때까지 최소한 한 달은 지났을 것이다.
선하도에서 진법을 펼쳐 비행 속도를 빠르게 유지했다지만, 대정국에서 여기까지는 10일이 걸렸었다. 또한 선하도에서 동해를 넘어오는 데에도 얼마간 시일이 걸렸을 것이다. 그에 더해 앞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한 달이 조금 넘었을 거라는 추측에 확신이 실렸다.
그동안은 지맥의 살기가 요마에 의해 폭발했을 때처럼 거세게 퍼져나가지 않았고 그마저도 산맥 안에 머물렀다 흩어졌을 테지만, 계연은 그것이 단 한 줄기라도 새어나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