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역귀(疫鬼)
한 달 반 전, 동토 운주의 서북쪽이자 원조국(元兆國)의 서북부.
바람이 약하게 불어오고 햇볕이 따사롭던 어느 아침, 돌연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경황이 없던 백성 중에는 심지어 바깥에 있다가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곧이어 노인들이나 어느 정도 견식이 있는 이들이 소리쳤다.
“지진이다-!”
그들은 뒤이어 사람들에게 무너진 건물에 깔려 죽지 않도록 밖으로 나오라고 알렸다.
하지만 위험할 뻔했던 상황은 금세 잦아들었다. 지맥에 균열이 벌어진 곳은 이곳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진동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재난은 일어나지 않았다. 흙으로 지은 집조차 무너지지 않았고, 원래부터 위태로웠던 건물 몇 채가 무너진 것이 다였다.
그렇게 지진이 발생한 지 2, 3일 만에 백성 대부분은 이미 그 일을 까맣게 잊고서 계속 원래의 고된 나날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진이 발생한 지 3일째.
이날도 바람이 약하게 불고 햇볕은 따사로웠다.
요대구(廖大丘)는 같은 마을의 장(張)씨와 함께 쇠스랑을 짊어지고 소달구지를 끌고서 마을 바깥으로 향했다. 달구지를 끌고 있는 늙은 소는 무척 마른 상태였는데, 걸음은 요대구와 달리 꽤 안정적이었다. 소는 이들을 태우고서 곳곳에 구덩이가 움푹 파인 시골길 위를 천천히 걸었다.
요대구는 때때로 채찍으로 누런 소를 살짝 때렸다. 그러면 달구지를 끄는 소도 어디에서 꺾어야 할지 주인의 뜻을 알아들었다.
곧이어 이들 앞에 강줄기가 나타나자, 요대구가 그곳을 한번 쳐다보더니 이렇게 탄식했다.
“아이고……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함께 앉은 장 씨가 그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강변에 시신 두 구가 있는 것이 보였다. 시신의 안색은 창백했고 온몸이 퉁퉁 불어 있었다. 몸에는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를 입고 있는 걸 보니, 병졸(兵卒)들인 것 같았다.
이 길은 강변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시신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이에 이들은 이것이 시신임을 확신한 후, 굳이 달려가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빠져 죽은 건지, 싸움 중에 죽은 건지 모르겠군.”
장 씨가 이렇게 탄식하자, 요대구는 별로 이 일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소의 엉덩이를 한번 때렸다. 이에 소가 작게 난 길을 따라 방향을 꺾었고, 이들은 곧 볏짚을 쌓아놓은 논 근처에 이르렀다.
요대구는 고개를 돌려 강변의 시체를 잠시 바라보다가 장 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 씨…… 볏짚 다 싣고 돌아가는 길에, 저…….”
장 씨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으므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이거 다 실으면 저 시신도 달구지에 싣지. 그런 후에 거기에 묻어주면 되겠지.”
“으음, 그리하세!”
두 농부는 소를 멈춰 세운 다음, 논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이 볏짚은 싣고 돌아가면 땔감처럼 쓸 수 있었고, 소에게 먹일 비상식량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한 시진(2시간) 넘도록 볏짚을 뽑고 자른 뒤, 잘 묶어 달구지에 실었다. 달구지 위에는 이미 볏짚이 넉넉하게 쌓여 있었는데도 논에는 아직도 건초가 많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남은 것들을 가져가지 않고 불을 놓을 생각이었다. 이런 파종기에는 좋은 거름이 될 것이다.
“자, 이만하면 됐군. 돌아가세.”
“그러지.”
두 사람이 소달구지를 몰아 다시 강변에 도착했을 때, 두 시신은 아직도 그 자리에 누워있었다. 이에 요대구가 달구지를 강변 근처에 세웠다.
“아이고…….”
두 사람은 모두 깊은 탄식을 내쉬며, 쇠스랑을 이용해 시신을 완전히 뭍으로 끌어올렸다. 이전의 경험을 통해 이들은 시신을 움직일 때 무척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시신이 긁히거나 상처라도 나면 주변이 핏자국과 오물로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날씨가 아직 선선했기 때문에 시신에서 냄새가 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옷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시신 두 구를 볏짚 더미 위에 올린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일각(15분)이 지난 뒤, 소달구지는 장 씨와 요 씨가 사는 모탄촌(茅灘村) 밖에 도착했다.
“장 씨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게, 내가 가서 사람을 불러올 테니.”
“음, 갔다 오게!”
장 씨는 건초 더미 사이에 몸을 웅크렸다. 일을 막 끝낸 뒤에는 몸에서 열이 나 괜찮았지만, 옷이 젖으니 추위가 느껴졌다.
요대구는 혼자 달구지에서 내려 마을 안으로 뛰어갔다. 그는 길에서 만난 이들을 붙잡고 뭐라고 하더니, 촌장이 사는 집으로 가서 사람들을 불렀다.
약 반 각 정도가 지난 뒤, 요대구는 네다섯의 장정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모두 삽이나 갈퀴 등을 가져왔고, 어떤 이는 다 헤진 멍석을 들고 오기도 했다.
“아이고, 요씨 아저씨. 앞으로 이런 일은 좀 안 하면 안 됩니까? 어차피 외지인이니 그냥 놔둬도 될 텐데…….”
호미를 들고 온 한 젊은이가 이렇게 말하며, 시신에서 냄새가 날까 봐 반사적으로 손을 부채질하듯이 휘저었다.
“소류(小劉)야, 요씨 아저씨 말에도 일리가 있어. 다른 먼 곳까지는 우리도 어떻게 못 하지만, 마을 바깥의 길이나 강변에 있는 시신은 수습할 수 있으면 수습하는 걸 돕는 게 낫지. 우리 마을에서도 그 강물을 쓰니까 말이야. 현에 있는 의원도 시신이 쌓이면 역병이 돈다고 했고. 그러니 이는 우리 자신을 돕고 덕도 쌓는 일이야.”
“그래, 그래. 내가 괜한 말을 했네…….”
젊은이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일행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이들은 볏짚을 먼저 내린 후 달구지를 몰고 다른 쪽으로 향했다.
잠시 후, 이들은 난장강(*亂葬崗: 연고가 없는 무덤이 마구 널려 있는 공동 묘지)과 비슷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작은 봉분이 곳곳에 널렸는데, 어떤 무덤 앞에는 묘비 대신 간단히 나무패를 세워져 있었다. 어떤 무덤은 아무것도 없기도 했다.
이곳에 도착한 요대구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이 구역은 그가 조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었고, 이 무덤의 주인들은 모탄촌 부근에서 발견된 이름 없는 시신들이었다. 그리고 요대구가 먼저 나서 그들을 땅에 묻어주자 제의한 것이었다.
세태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이처럼 길가에서 시신을 발견하는 경우는 모탄촌이 아니라도 무척 흔했다.
이는 요대구 자신이 사는 마을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죽은 이들을 동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이기도 했다. 7, 8년 전, 요대구는 촌장을 찾아가 먼저 이 일을 제의한 후 근처 이웃들을 방문해 상의하여 함께 이 묘지를 만들었다.
물론 사람 대부분은 이기적이었지만, 이런 고단한 세상살이에도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먼저 묘지 구역 바깥에 있는 사람 키 반만 한 작은 토지 신당 앞에서 이곳을 잘 돌봐 달라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다시 바삐 몸을 움직였다.
모두 땅을 파서 먹고사는 농사꾼들이라, 있는 것은 힘뿐이었다. 몇 사람이 교대로 구덩이를 파니,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구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거적때기로 시신을 함께 감쌌다.
이들은 시신을 많이 흔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구덩이 안에 시신을 놓았다.
“원한에는 상대가 있고, 빚에는 빚쟁이가 있다(寃有頭債有主: 문제가 있으면 당사자를 찾아가라는 뜻)고들 하지요. 우리는 당신을 해친 이들이 아니라 그저 황야에 널린 시신을 보고 몸을 누일 곳을 찾아준 것뿐입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죽은 후에 흙만 덮어도 이미 호사라는 걸 아실 겁니다. 우리도 제사를 지내줄 여력은 없으니, 부디 이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요대구는 이렇게 말한 뒤 다른 이들과 함께 흙을 덮기 시작했다. 무연고 시신을 묻어주는 일은 정식으로 치르는 장례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니 금세 자그마한 봉분이 완성되었다. 요대구와 촌장은 삽을 이용해 흙을 누르며 무덤을 단단히 다졌다.
돌아가는 길에 마을 사람들은 온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조금 전에 투덜댔던 젊은이도 지금은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이, 장 씨. 우리는 가서 볏짚을 정리해야 하네.”
“알고 있어!”
“참, 이씨 아저씨. 근처 현에서 역병이 돈다면서요?”
“아이, 말도 마라. 일전에 볼일이 있어 현성에 갔다가, 마누라의 친정 사람을 만났는데 그자가 의원이거든. 아무튼 그가 말하길 근처 현에서 최근에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지 뭐냐.”
그러자 호미를 들고 있던 촌장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요대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우리가 요 씨와 함께 시신을 묻은 건 아주 잘한 일이지. 듣자 하니 역병이 시신에서 나오는 장독(瘴毒)에서 시작되었다더구나. 죽은 이가 흙에 들어가지 못한 원한이지!”
“허억…….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하하하! 다 큰 놈이 간이 이렇게 작아서 어디 쓰려고?”
“하하하하……. 그냥 하는 말이지! 어쨌든 소류 너 그러다가 장가 못 간다!”
“저 그렇게 겁쟁이는 아니거든요!”
이들은 농지거리를 주고받으며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비록 생활은 고단했지만, 길가의 시신에 비하면 힘들다고 투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어느덧 완전히 깜깜해졌다. 마을 밖 묘지에서는 때때로 도깨비불(鬼火)이 둥둥 떠다녔고, 옆에 세운 토지 신당에서는 노란빛이 은은하게 비쳤다.
그런 고요한 밤중에 돌연 족제비 한 마리가 황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족제비는 재빨리 묘지를 향해 뛰어와 토지 신당 앞에서 멈춰 섰다.
“찍찍찍…… 찍찍…….”
족제비는 토지 신당 앞에서 쉬지 않고 재잘댔다. 찍찍대는 목소리는 날카롭기도 했다가 마치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뭐라? 역병을 뿌리는 악귀? 저승에서도 제압할 수가 없을 정도란 말이냐? 이미 퍼졌다고?!”
경악에 찬 목소리와 함께 토지 신당에서 등이 구부정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놀라고 당혹한 얼굴로 족제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찍찍…… 찍찍찍…….”
“휴우…… 되었다, 되었어. 가보거라!”
토지신의 말에 족제비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인 뒤, 재빨리 황야로 사라졌다.
토지신은 길게 탄식하며 몸을 돌려 묘지를 바라보았다. 묘지 위로 도깨비불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지러운 세태에 이곳의 저승도 힘이 약해 떠도는 망령조차 제대로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이 묘지에 대해 그도 일찍이 관할 성황신에게 알린 상태였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이 상태 그대로였다.
“아이고, 역귀(*疫鬼: 역병을 일으킨다는 귀신)라니…….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으려나…….”
* * *
모탄촌에는 토지 신당이 두 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마을 끝자락에 있는 내부가 환히 밝혀진 건물이었다. 그 안에는 제대로 된 신상(神像)이 놓여 있었는데, 비록 정교한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공물을 놓는 기다란 탁자와 향로도 있어 필요한 건 모두 갖춰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묘지가 늘어선 구역에 있었다. 그것은 사람 키의 반 정도 되는 작은 흙집이었는데, 바로 안에 있는 토지 신상이 비에 젖지 않도록 하는 목적이었다.
토지신은 마을 끝자락의 토지 신당에는 잘 머물지 않고, 주로 묘지 구역에 있는 작은 신당 안에 머물렀다. 이곳이 귀신들을 돌보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토지신은 현재 그곳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가 모탄촌을 지킨 지 이미 7, 80년이 되어갔다. 그는 죽고 나서 귀신이 된 사람이 아니라 원래는 정괴(精怪)였다. 그래도 그는 이 마을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 마을에 사는 아이부터 노인까지, 이 모두의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았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마음씨가 곱고 순박했다. 이렇게 태평하지 않은 시기에 의총(*義塚: 연고가 없는 사람의 시체를 묻은 무덤)을 세웠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토지신도 자기 능력이 닿는 범위 안에서 도와주려 애썼다.
다만 그는 보잘것없은 작은 토지신일 뿐이고, 관할 범위도 모탄촌을 포함한 주변의 그리 넓지 않은 구역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지맥이 어지러워진 일로 이곳까지 그 영향을 받아, 모탄촌 토지신은 정신적으로 무력감을 느끼는 상태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원래 가진 능력의 7할 정도밖에 쓰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