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54화 (454/892)

454화. 덕을 갖춘 사람과 귀신

“계 선생님, 제게 음원(*陰元: 생명을 이루는 근원인 음양(陰陽) 중 하나) 진액이 있습니다. 이걸로 저 귀신의 혼이 소멸하는 것을 멈출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상역은 망설이지 않고 소매 안에서 희고 가느다란 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병사의 혼백에게 다가가 병 입구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은은한 빛이 흐르는 물방울이 안에서 떨어졌다.

톡!

물방울이 병사의 몸으로 떨어지자, 마치 물 위에 떨어진 것처럼 그의 몸에 파문이 일었다.

그 한 방울이 병사의 혼백으로 흡수되자, 병사의 몸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속도로 금방 실체를 얻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장군께서 살아났어!”

귀신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비록 함께 지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병사는 귀신들이 더는 혼몽한 상태에 있지 않도록 해주었고, 덕분에 귀신들은 살아있었을 때보다 더욱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의총에 있던 귀신들 대부분은 감정이 없고 멍한 상태였으므로, 외부 세계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귀신들은 병사의 열정에 서서히 정신적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귀신들은 다시 감각을 되찾고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의총의 귀신들 사이에는 일종의 전우애가 생기게 되었고, 귀신들은 자신들을 혼몽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준 병사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동시에 자연스레 병사를 존경하게 되었다.

“음원의 진액은 혼백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병사의 상태가 너무 쇠약해 당장은 깨어나지 못할 겁니다. 병사를 무덤으로 데려가 잘 쉬게 하면, 3일 안에는 반드시 깨어날 겁니다.”

“어서 병사를 무덤으로 데려가 쉬게 하게나.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걸세!”

상역의 말에 더해 토지신까지 나서자, 귀신들은 감사 인사를 올린 후 병사의 혼백을 데리고 의총으로 향했다.

귀신들이 떠나자 이쪽에는 토지신을 더해 계연까지 총 세 명만이 남았다. 조용해진 모탄촌 주위를 둘러보던 계연은 마침내 의총에 대해 궁금해졌다.

그러자 토지신이 씁쓸한 얼굴로 의총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의총에는 2백구가 조금 안 되는 시신들이 묻히게 됐습니다. 이곳은 저승의 능력이 충분치 않아, 곳곳에 떠도는 혼백이 널려 있어 저승의 관리들도 의총에 대해서는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제가 쭉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계연과 상역은 토지신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경청했다. 모탄촌 토지신의 설명을 들은 계연도 토지신과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이런 난세(亂世)에 그만한 덕행을 갖추다니, 실로 대단한 일이군요.”

계연은 모탄촌과 의총을 돌아보며 이렇게 감탄했다.

“이승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저승의 귀신들도요!”

그 시각 하늘 저편이 뿌옇게 밝아오더니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 * *

간밤은 토지신과 의총의 귀신들에게 있어 무척 기나긴 밤이었다. 이는 모탄촌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햇빛이 대지를 비추기 시작하자 모탄촌 백성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요대구와 그의 아내도 막 잠에서 깨어났는데, 둘 다 잠을 잘못 잤는지 등이 아프고 허리가 쑤신 상태였다.

“아이고, 아이 아버지. 간밤 내내 잠도 못 잤어요. 게다가 무슨 이상한 꿈을 꿨는데…….”

여기까지 말한 요대구의 아내는 침상에서 내려가 물을 한 잔 마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꿈에서 내가 전장 한복판에서 자고 있지 뭐예요? 곳곳에서 고함치는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병사들이 서로 격렬히 싸우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도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눈도 뜰 수가 없었어요. 눈이 다 쓰라렸다고요.”

아내의 말에 요대구가 즉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나, 나도 그랬다네! 아무리 눈을 뜨려 해도 떠지지도 않고, 주위에서는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게 생생하게 느껴지지 뭔가? 무서워죽는 줄 알았다오!”

“당신도 이런 꿈을 꿨다고요?”

그의 아내가 깜짝 놀라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둘러 겉옷을 입기 시작했다.

요대구가 문을 나서자마자 이웃인 장 씨가 다급한 얼굴로 자기 집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요 씨, 요 씨! 내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우리 마을에서 전투가 벌어졌지 뭔가? 싸우는 소리가 이 주변을 쩌렁쩌렁 울리는데, 나는 눈도 뜰 수가 없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네! 근데 나뿐만 아니라, 우리 마누라도 같은 꿈을 꿨다지 뭔가? 류 씨네도 그랬다더군!”

이를 들은 요대구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그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장 씨, 실은 나랑 우리 아이 엄마도 같은 꿈을 꿨어. 볼 수는 없고 들을 수만 있었는데, 마치 바로 지척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느낌이었어. 꼭 내가 전장에서 죽은 사람인 것처럼……. 아, 퉤퉤퉤! 내 말은 죽은 것처럼 잤다는 뜻이야!”

이에 장 씨가 요대구에게 가까이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요 씨, 혹시 의총의 귀신들이 간밤에 이미 역귀와 싸운 게 아닐까?”

요대구는 의총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 후, 두 사람은 마을이 점차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서로 어젯밤에 꾼 무서운 꿈을 이야기하다가, 무척 깊게 잠든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같은 꿈을 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소리만 들을 수 있고 눈을 뜰 수가 없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전장 한복판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 다른 이들은 약간이나마 눈을 뜰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어둑하고 음산한 녹색 빛이 가득한 가운데 많은 이들이 한곳에 뭉쳐 상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한 상황이었다. 바보가 아니면 누구라도 의총의 귀신들에게 태워준 전쟁용 깃발과 병기, 요대구와 촌장의 꿈에 나타났던 귀신들과 토지신과 이 일을 연관시킬 것이다.

모탄촌 백성들은 아침밥을 먹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함께 마을 안팎을 살피며 걸어 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싸움이 벌어졌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 두 명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요대구와 촌장은 7, 8명의 마을 사내들을 데리고 의총을 향해 걸어가다가 그곳에서 각각 흰 장포와 남색 장삼을 입은 남자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발소리를 듣고 자신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조금도 놀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소인은 계연이라고 합니다.”

“저는 상역이라 합니다.”

계연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간단히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자 상역도 계연을 따라 함께 인사했다.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글공부를 하는 이들처럼 보였고, 언행에도 무척 예의가 있었다. 이에 모탄촌 사람들도 촌장의 인솔 아래 그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두 분은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저희 모탄촌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그러자 계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여기서 꽤 먼 곳에서 왔어요. 듣자 하니 이 마을에 연고 없는 시신을 위해 의총을 세우자고 제의한 분이 있다길래, 그분을 보러 왔어요. 어느 분이신가요?”

그러자 모탄촌 사람들이 일제히 요대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요대구가 주저하는 듯하더니 앞으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

“처음 의총을 세우자고 제의한 건 접니다. 하지만 의총은 우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세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도 의총을 세우지 못했을 겁니다. 시신이라고 해도 혼자서 옮기기는 쉽지 않거든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요. 이곳 마을 분들이 참 덕이 높으시군요!”

“아하하, 당치 않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렇게라도 선행을 쌓는 것뿐입니다!”

“옳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계연의 짧은 감탄에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무척 뿌듯해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어느 정도 학문을 닦은 이들로 보였고, 그런 사람의 칭찬인 만큼 그 무게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참, 두 분께서는 멀리서 오셨다니 모르시겠지만, 지금은 대하현에 오시기에 썩 좋지 않은 시기입니다.”

요대구가 의총을 한번 바라본 뒤 다시 계연과 상역을 향해 말했다.

“요즘에 이곳 현성과 인근 현에 역병이 돌고 있거든요. 시시한 전염병이 아니라 걸리면 정말 위험합니다. 정말 좋지 않은 시기에 오셨습니다.”

그러자 상역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예, 역병이 돌고 있긴 하지요.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대하현하고 이 근방의 현뿐만이 아니고, 현과 진(鎭: 현(縣)에 속한 행정 구역 단위)까지 모두 합치면 백여 곳은 될 겁니다…….”

“예?”

“백여 곳이라고요?”

“세상에!”

“전부 역병이 돈다고요?”

“그…… 그게 가능합니까?”

모탄촌 사람들은 상역이 말한 숫자에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대하현 밖으로 자주 걸음 하지 않았고, 가장 멀리 나가본 곳도 인근 현성이었다. 비록 그 숫자에 현뿐만 아니라 진도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숫자라면 무척 넓은 범위인 것이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는 동안 계연은 요대구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원기가 왕성했으며 복덕(福德)을 지닌 상(像)이었다. 비록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 눈에 띄는 편이었다.

“시간이 이르니 두 분께서는 분명 아직 아침을 들지 않으셨겠지요? 저희 마을이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손님 대접은 후하거든요. 저희와 함께 마을로 가서 아침 식사를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예, 예, 마을에 가서 잠시 쉬다 가십시오!”

“맞아요. 바깥은 어찌 돌아가는지 얘기도 좀 해주시고요. 전염병이 돈다는데 다른 곳은 좀 어떻습니까?”

“맞습니다, 바깥 이야기 좀 알려주세요!”

촌장이 먼저 말을 꺼내자 모든 이들이 동의했다. 이에 계연과 상역은 서로 눈짓을 나눈 뒤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실례라니요, 어서 가시지요!”

일행은 마을 안팎을 아무리 샅샅이 둘러봐도 전투가 벌어졌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계연과 상역을 데리고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어떤 이가 의총의 귀신들이 꿈에 나타난 이야기를 시작했고, 어젯밤에 마을 사람 거의 전부가 같은 꿈을 꾸었다며 학식이 있어 보이는 그들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계연과 상역은 일부러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인 후, 마을 사람들에게 이 일은 아마 8할은 사실일 거라고 알려주었다. 착한 사람은 언제나 보답을 받는 법이고, 마을 사람들이 그간 쌓아온 덕행이 오늘날의 재앙을 막아준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모탄촌 사람들은 무척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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