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화. 서신
두 사람이 점점 성벽에 가까워짐에 따라, 곧 보초병 하나가 그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아직도 논밭을 따라 난 작은 길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멈춰라!’하고 소리치더니 근처의 수풀 사이에서 다섯 명의 병사가 나타났다.
챙! 챙!
다섯 명의 병사는 동시에 칼을 뽑아 들어 계연과 상역을 겨누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얼굴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우두머리에 서 있던 병사가 그들을 자세히 관찰한 뒤 이렇게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이 변경 요충지에는 무슨 일로 왔지? 당장 사실대로 고해라!”
그러자 다른 병사들이 그의 말을 크게 복창했다.
“당장 사실대로 고해라!”
계연과 상역은 이런 상황에도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계연은 시력의 문제로 병사들에게서 느껴지는 전의(戰意)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상역은 병사들의 갑옷이 낡고 망가진 것을 보며 그들을 샅샅이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옷 곳곳에는 스스로 수선해보려고 한 흔적이 가득했고, 칼날에도 이가 빠져있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커다란 부분을 빼고는 대체로 칼날이 잘 갈려 있었고 칼은 날카로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는 계연이라 하고, 이쪽은 상역이라 합니다. 저희는 다른 이의 부탁을 받고 성안의 한 병사에게 서신을 전달하러 왔습니다. 부디 저희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편의를 좀 봐주십시오.”
“서신?”
우두머리 병사가 의아한 듯 물었고, 다른 병사들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눈짓을 교환했다.
“누구에게 주는 서신인가? 관아의 문서나 증표가 있는가?”
계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왼손으로 오른손 소매 안쪽을 뒤지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예,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자 상역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계 선생이 대체 언제 관아에서 문서를 받아왔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연은 소매 안에서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종이를 한 장 꺼내 병사에게 내밀었다.
우두머리 병사는 그에게 관아의 ‘공문’을 넘겨받아 자세히 살펴보았다. 곁에 있던 병사 두 명도 다가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들은 여러 번 서류를 검토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계연에게 돌려주었다.
“나도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니 일단 갖고 있다가, 나중에 군후(*軍候: 고대의 군 관직명)께 보여드리시오. 일단은 나를 따라오시오!”
“예, 수고가 많으십니다!”
계연은 상역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종이를 접어 다시 소매 안에 넣었다. 그러자 상역도 이것이 장안법(障眼法)의 일종임을 알아차렸다. 저들이 읽은 ‘공문’은 단지 그들이 보고 싶었던 것을 본 것에 불과했다.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은 비록 성의 뒤편이었는데도 성문은 아주 살짝만 열려 있었고, 길 곳곳에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 후에도 두 번의 검문을 거쳐 계연과 상역은 마침내 북문(北門)을 책임지는 군후를 만날 수 있었다.
성문 가까이에 세워진 건물 안에서는 군후가 마찬가지로 계연이 내민 서류를 자세히 살펴본 뒤, 예전에 받은 공문과 여러 차례 비교해보았다. 공문이 진짜라는 걸 확인한 후에는 그것을 다시 계연에게 돌려주지 않고, 다른 공문과 함께 나무 상자에 넣었다.
“서신을 전하러 왔다고요? 이상하네, 윗자리의 밥이나 축내는 놈들은 군량도 제대로 보내주지 않는데, 고작 서신을 전달해주려고 공문을 발행해 주다니…….”
군후는 이렇게 중얼거린 뒤 기대에 찬 얼굴로 계연과 상역에게 물었다.
“서신이 얼마나 됩니까? 혹시 제 것도 있습니까? 제 이름은 이추양(李秋陽)이고, 내하군(內河郡) 사람입니다.”
실내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기대 섞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고향에서 온 서신을 무척이나 고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계연은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의 서신은 없고, 요정보에게 전하는 가족들의 전언과 집안에서 내어준 증표만 있습니다.”
군후는 길게 탄식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병사에게 말했다.
“두 분 선생을 요 사마(*司馬: 고대의 군 관직 중 하나)에게 모셔다드려라.”
“예!”
계연과 상역은 그를 따라 성안을 걸으면서 다른 병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중 어떤 이들은 상처를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는데도 한참 훈련 중이었다. 그들이 입은 갑옷은 모두 낡고 망가져 있었다.
“상 선생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계연의 물음에 상역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백전철혈(*百戰鐵血: 노련하고 강건한 전사를 일컫는 말)의 진정한 대장부들이군요. 아깝게 되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 혹시 제가 너무 빨리 걷습니까?”
길을 이끌던 병사는 계연과 상역의 걸음이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너무 빨리 걸었다고 여기며 물었다. 어쨌든 저 두 사람은 무관이 아닌 서생이고, 여기까지도 마차를 타고 왔다가 성 밖에서 내려 걸어왔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자 계연이 그의 말에 즉시 부인했다.
“저희는 염려 마십시오, 군관 나리.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상역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병사가 겸연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했다.
“나리라니 당치 않습니다. 두 분이야말로 학문을 닦는 분이고, 저는 그저 무기를 들고 적을 막아내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들이 안온한 나날을 보내려면, 두 분 같은 문인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런 말단 병사에게 이 정도의 깨달음이 있을 줄 몰랐던 계연은 그를 약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상역과 함께 발걸음을 서둘렀다.
주위의 다른 병사들은 계연과 상역의 차림만 보고도 군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보고는 그들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서로 추측을 주고받았다.
성은 대하현의 현성보다 작아서, 얼마 걷지 않아 계연과 상역은 성 중심에 세워진 한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다른 건물보다 더욱 웅장했으며 병졸들이 주위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두 분 선생, 이곳은 저희 성의 장군부(將軍府)입니다. 요 사마(司馬)는 평소에 이곳에 머뭅니다. 하지만 먼저 장군을 만나 뵈어야 요 사마(司馬)를 뵐 수 있을 겁니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계연이 이렇게 대답하자 그들을 데리고 온 병사가 저택 앞으로 가서 소식을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연과 상역은 이 성을 통솔하는 장군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예상과 달리 험상궂거나 체격이 우람하다거나 하진 않았고, 오히려 인물이 약간 못난 축에 속했다. 하지만 모든 병사가 그를 무척 존경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계연과 상역이 들어간 방 안에는 커다란 탁자 하나가 중앙에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거대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지도 위는 어지러운 표시로 가득했고, 장군은 그 거대한 탁자의 뒤편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북문을 지키는 군후가 보내온 서신을 읽었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이 들고 온 공문을 세 차례 확인했으며, 이미 검문을 마쳤음이 적혀 있었다.
“중도군(中道郡)에서 왔다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미 군량을 받지 못한 지 한참이 되었습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지난번에 병사를 통해 서신을 보냈을 때도, 최대한 빨리 군량미와 보급을 보내주겠다고 해놓고서는 아직 철 조각 하나 받지 못했습니다!”
장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지도 위의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이 성에서 주둔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 3년간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고, 얼마나 많은 병사가 죽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야 할 군량과 보급은요? 심지어 나는 수하들이 틈틈이 모아둔 급료를 고향으로 보낸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은 급료는 고향에 닿지도 못하고 어느 관리의 주머니로 들어갔겠지요!”
이때 실내에는 장군을 비롯해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 장군은 밖에 서 있는 병사들이 들을까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였다. 그래도 그에게서는 강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계연과 상역은 둘 다 수선자였기 때문에, 장군에게서 혈기와 살기가 들끓는 것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요마들은 두려움에 장군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두 사람의 도행은 보통의 수선자를 뛰어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들은 그의 살기에 전혀 짓눌리지 않았다.
계연은 공수한 자세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군, 저와 상 선생은 원조국의 관원이 아닙니다. 그저 관아에 공문을 받은 뒤 서신을 전하러 온 것뿐입니다. 급료와 군량에 관한 일은 저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맞습니다, 저와 계 선생은 요정보의 고향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 온 것입니다. 장군께서 말씀하신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상역은 일개 범인(凡人)에게 이렇게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범인들은 너무 고집스러웠기 때문에, 보통 한마디로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더는 말을 섞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계 선생과 함께 있는 데다가, 눈앞의 범인은 척 봐도 경외할 만한 인물이었다. 혹은 성안의 모든 이들이 존경하는 자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휴우…….”
장군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감정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두 분 선생께서 놀라셨겠군요. 이 일은 확실히 두 분과는 무관한 일인데, 제가 공연히 화를 내었습니다.”
성안의 병사들에게 이 상황을 바꿀 여력이 없는 것처럼 이는 장군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도 이들은 결코 물러날 수 없었다. 자신들이 물러나면 원조국의 후방은 책임지는 이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을 지키라는 명령은 계속 유지되는 상태였다.
“참, 두 분은 그간 먼 길을 오셨을 테니, 혹시 무언가 아는 소식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군정(軍情)이나 조당의 상황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상역은 계연을 바라보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해도 괜찮을지 망설였다. 하지만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도 이렇게 입을 열었다.
“지금 바깥에는 역병이 크게 퍼졌습니다. 국토의 3분의 1 정도 되는 면적에 역병이 퍼졌는데, 병에 걸린 이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역병으로 죽은 이들도 많습니다.”
“예?”
장군은 허리를 벌떡 세우더니 두 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그 힘에 ‘끼기긱’하고 소리가 날 정도였다.
“역병이라고요? 지금은 어떻습니까? 장곡도군(長谷道郡)에도 역병이 퍼졌습니까?”
그러자 계연이 이렇게 대답했다.
“역병은 이미 안정된 상태이니, 뒤처리만 적절히 하면 됩니다. 역병이 다시 급격하게 퍼져나가진 않을 테지만, 이미 죽은 이들은 되살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느 지방에 역병이 퍼졌는지는 저희도 잘 모릅니다.”
장군은 이를 듣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뒤처리만 적절히 하면 된다고요……. 조정에서 과연……. 됐습니다, 이 일은 그만 얘기하도록 하지요. 이미 요 사마(司馬)를 불러오라 사람을 보냈으니 곧 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장군!”
“음, 제 밑의 형제나 다름없는 수하가 집안에서 보낸 소식을 받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참, 여봐라. 두 분 선생께 차를 올려라!”
명령을 들은 병사가 들어와 장군의 말을 듣고 다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