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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457화 (457/892)

457화. 기대를 저버리다

잠시 후, 우람한 체격의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가 병사 두 명을 따라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온통 흥분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서신은 어디, 어디에 있습니까?”

요정보는 목청이 무척 컸기 때문에, 그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이미 그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착실하고 무던한 외양을 가진 그의 아버지와는 매우 달랐다.

실내로 들어온 요정보는 가장 먼저 장군에게 포권(抱拳)하여 예를 올린 뒤 계연을 바라보았다.

“서신은요? 부모님께서 드디어 서신을 보내주셨군요! 글을 쓸 줄 아는 이를 찾기도 쉽지 않은 데다, 집안에는 필묵을 살 여윳돈도 없었을 텐데……. 서신을 오랫동안 기다렸는데 마침내 왔군요!”

요정보는 무척 흥분한 듯이 보였는데, 그의 말을 들으니 이전에 이미 고향에 서신을 여러 번 보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단 한 통도 고향에 닿지 못한 것이다.

계연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아 인사한 뒤 이렇게 말했다.

“글로 쓰진 않으셨고, 가족의 전언과 증표를 가져왔습니다.”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팔 정도 되는 길이의 천으로 감싸인 물건을 등 뒤에서 꺼내 요정보에게 건넸다. 그가 얼른 겉을 감싼 천을 열어보니 목검이 한 자루 들어있었다.

목검 위에는 작은 사람 모양이 새겨져 있었고, 온통 긁힌 자국으로 가득했다.

요정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어린 시절 부친이 자신에게 만들어 주었던 목검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는 마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듯했다.

“제 것이 맞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목검입니다. 아직도 갖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종군하기 전에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요정보는 휙 고개를 들어 계연과 상역을 향해 물었다.

“제 양친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마을 사람들은 다들 잘 지냅니까?”

그러자 계연이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요 사마. 양친께서는 모두 잘 지내십니다. 두 분 다 건강하시고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 잡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친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의총을 만들어 길에서 발견한 시신들을 묻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지금은 현성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좋은 분이세요.”

“아,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계연이 마침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참, 두 분께서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요 사마께도 친동생이 생겼어요. 이름은 요보귀(廖寶歸)라고 하고, 여섯 살이에요.”

“그렇습니까? 잘 되었군요!”

요정보는 기쁜 얼굴로 목검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자신의 허벅지를 때리며 이렇게 물었다.

“아, 참! 그럼 이 목검은 동생이 가지고 놀라고 다시 돌려줘야겠습니다. 저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저희 부모님께서 무슨 전언을 보내셨습니까?”

“커흠…….”

계연은 항상 말재주가 좋았고, 여러 번 그로 인해 목숨을 구하거나 불리한 상황을 뒤바꾼 적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그로서도 무척 곤란한 상황이었다. 계연은 요정보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속삭였다.

“양친께서는 당신이 돌아오길 바라세요. 종군한 지 몇 년이 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니, 무척 보고 싶어 하시거든요.”

그러자 요정보가 얼떨떨한 얼굴로 계연과 상역을 바라보다가, 다시 실내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는 곧바로 이렇게 되물었다.

“저보고 돌아오라고요?”

그가 이렇게 말을 내뱉자마자 실내의 분위기가 단번에 적막해졌다. 다른 병사들은 모두 요정보를 바라보았고, 장군마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한 뒤 그를 바라보았다.

요정보가 큰 소리로 되묻는 것을 보고, 계연과 상역은 이미 그가 어떤 대답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요정보는 그렇게 물은 뒤 내내 손에 쥔 목검을 바라보며 오래 침묵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께서 정말 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상역은 계연을 바라보고는, 계연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는 저희에게 아무 일도 아닙니다. 관아에서 공문을 받아 여기까지 마차를 타고 온 것만 봐도 아실 겁니다.”

“하하, 두 분께서는 닭 잡을 힘도 없는 서생이 아닙니까? 비록 후방이 쓸모없는 식충이들로 가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관아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공문을 받는 건 쉬웠을지 모르나, 제가 이대로 돌아가면 그건 탈영입니다. 발각되면 죽을 죄인 데다가 제 가족들까지 연루되고, 두 분마저 연루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자 상역이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사소한 일은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하하,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요정보는 상역을 잠시 바라본 뒤 다시 목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에 앉은 장군이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는 다시 손잡이를 꽉 힘주어 잡았다. 그도 지금 요정보만큼 속으로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다 장궁이 마침내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요정보가 돌연 다시 고개를 들더니 이렇게 말했다.

“두 분 선생님! 소식을 전해주러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목검은…… 저 대신 제 동생에게 잘 전달해 주십시오!”

요정보가 목검을 다시 계연에게 건네며 확고한 어조로 덧붙였다.

“제 부친께서 의총을 세워 마을의 유명한 호인이 되셨다니, 그 아들 된 자로서 부끄럽게 탈영할 수는 없습니다. 고향에도 어린 동생이 있지만, 제게는 이곳에도 형제들이 있습니다! 부디 제 양친과 동생에게 정보가 개선하여 당당하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지금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휴…….”

요정보가 말을 마친 뒤 내쉬는 한숨에는 떨림이 섞였다.

계연은 가볍게 탄식한 뒤, 상역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상역이 이렇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결정한 겁니까?”

상역은 답답한 마음에 다시 이렇게 설득했다.

“저와 계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만약 돌아가겠다고 하면 당신은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은 얻기 힘든 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선생께서는 수천 명의 형제가 그간 쌓아온 우정과 전우애에 대해 아십니까? 이대로 그들을 뒤에 두고 떠나면, 앞으로 제가 얼마나 마음을 졸일지 아십니까? 저는 그걸 생각하기만 해도 양심에 찔립니다!”

요정보는 상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건 눈으로 소리쳤다.

“두 분 선생께서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니셨다는 건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두 분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상역은 그의 무례에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요정보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소매 안에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계연이 보니 부적 위로 심상치 않은 빛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이상한 것이 잔뜩 그려진’ 부적에 불과했다.

“자, 이건 요 사마의 양친께서 항상 몸에 지니라며 보내주신 평안부(*平安符: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부적)입니다. 이것도 거절하진 않으시겠지요?”

그러자 요정보가 재빨리 그것을 건네받았다.

“이런 귀한 걸 진작 주지 않으시다니요. 당연히 받아야지요!”

계연이 웃으며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상역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요정보와 앉아 있는 장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저와 상 선생은 요 사마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되었군요!”

계연은 자신이 기대를 저버리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전혀 곤란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장군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요정보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요정보의 어깨를 무겁게 두드렸고, 요정보도 장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계연은 손에 든 작은 목검을 바라보다가 요정보에게 말했다.

“목검은 요 사마의 양친께서 저희에게 주신 증표이니, 요 사마께서도 저희에게 증표를 하나 주세요. 후에 양친께서 보시고 아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요.”

“예, 예! 당연한 말씀입니다!”

요정보는 평안부를 조심스럽게 접어 품 안에 넣은 뒤, 양손을 비비며 부모님께 어떤 증표를 보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것이 없었다.

“저, 아무래도 여기에는 보낼 만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요정보는 도움을 구하듯 장군을 바라봤으나, 장군도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 이곳 변경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특산품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이 빠진 무기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럼 이렇게 하죠, 사마께서 직접 서신을 쓰시는 거예요. 전언을 보내도 되지만, 서신은 때때로 들여다보면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이 목검도 그냥 가지고 계세요.”

계연이 이렇게 제의하며 목검을 다시 요정보에게 돌려주었다. 목검을 다시 받아든 요정보는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느 정도 글자를 알아볼 수 있긴 하지만, 잘 쓰지는 못합니다. 혹시 선생께서 대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전에 집으로 서신을 보낼 때는 북문의 군후처럼 군중에 글 좀 배웠다는 이에게 대필을 맡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두 선생이 있으니 굳이 다른 이에게 맡길 필요가 없었다.

“네, 제가 써드릴게요.”

그의 요청에 계연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회의장으로 쓰이는 실내의 탁자 위에는 종이와 필묵이 놓였고, 계연이 요정보의 말을 받아쓰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자신이 보낸 서신을 한 통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걸 듣고서, 요정보는 그간 자신이 어떻게 지냈는지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 징집되었을 때의 혼란부터 후에 느낀 두려움, 그리고 체념을 거쳐 지금의 책임감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세월이었다.

계연이 최대한 작은 글씨로 써 내려갔는데도, 서신은 족히 다섯 장이나 되었다. 그가 일필휘지로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갈 때마다,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마치 대단한 서예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글자로 꽉 채운 종이는 옆에 따로 잘 두고, 그 위로 가볍게 바람을 불면 먹물이 빠르게 말랐다. 계연은 서신을 다 쓰고 나서 손목을 한번 가볍게 돌려 붓을 군에서 원래 쓰던 붓으로 바꾸고는 자신이 쓰던 늑대 털 붓을 다시 소매 안으로 넣었다. 너무 순간적으로 바뀐 것이라 오직 상역만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다 됐어요, 빠진 내용이 없는지 한번 보세요.”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요정보와 장군 및 다른 병사들이 가까이 다가와 서신을 살폈다. 다섯 장을 꽉 채운 질서정연한 글자는 수려하고 운치가 있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워졌다.

이를 보던 장군이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알겠군요, 두 분 선생께서는 조금도 관료의 티가 나지 않는데, 어찌 이곳에 들어올 통행 문서를 얻을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에 더해 이런 위험한 지역까지 마차가 호송해 오고, 또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요 사마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하셨는지도요. 이 글자만 봐도 두 분 선생이 갖춘 학식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림이나 조정에서도 선생님들을 존경하는 이들이 무척 많을 것 같군요.”

그러자 상역이 고개를 저은 뒤 웃으며 대답했다.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장군. 하지만 제 실력으로는 감히 계 선생님과 비견할 수가 없습니다. 제 글씨는 보통 사람 사이에는 그런대로 괜찮은 축에 들지만, 계 선생님의 글씨에는 발끝도 닿지 못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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