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58화 (458/892)

458화. 신선을 만났구나

요정보는 환히 웃으며 조심스럽게 종이를 들어 올려 글씨를 자세히 감상했다. 그가 아는 글자는 그리 많지 않아서, 군사적인 단어는 어느 정도 알아보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종이 위의 글자는 이상하게도 무척 순조롭게 읽혔고, 한 글자 한 구절 모두 그 뜻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공들여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대단한 명필이시군요!”

이렇게 감탄한 요정보는 붓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최대한 일정하고 깔끔하게 적어보려 했지만, 종내에는 삐뚤빼뚤한 모습이 되었다. 계연의 글씨와 함께 놓고 보니 그 대비가 더욱 극명했지만, 대신 이 서신의 진실성을 더해주었다.

길고 두꺼운 서신에 더해 요정보는 자신이 그간 모아온 백은(白銀) 18냥(兩) 6수(*銖: 1냥(兩)의 24분의 1) 모두를 그들에게 맡겼다. 그는 내심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군에게 부탁해 조금 더 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계연과 상역이 돌아갈 때 장군과 요정보는 그들을 북문까지 나와 배웅해주었다. 그러고는 병사 여러 명과 마차를 붙여 그들이 관할하는 구역의 경계까지 호송할 수 있도록 했다.

계연과 상역을 태운 마차가 북문을 떠나가자, 요정보는 기분이 약간 허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곧 감정을 추스르고는 원래의 강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북문에 있던 군후는 자신의 병영에서 최근 며칠간 병사들이 주변을 순찰하고서 보고한 내용을 문서로 정리한 후, 오늘 방문한 두 사람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공문 위에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이 적혔는지, 이를 비준한 관원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에 서류를 보관하는 나무 상자를 가져와 아까 받은 통행서를 옆에 두고 문서를 작성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뒤져도 그 공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여기다 두었는데 왜 없지? 어? 이건 뭐야?”

군후는 첩첩이 쌓인 공문서 더미에서 한 장의 선지(*宣紙: 동양화와 서예에 쓰는 종이)를 발견했는데, 앞뒤로 뒤집어봐도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게다가 상자를 온통 뒤집어엎어도 아까 계연에게서 받은 공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군후는 저도 모르게 황당무계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일을 장군과 요정보에게 이야기하자, 두 사람도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장군은 군중에서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상등급의 선지를 손에 들고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장군, 지금이라도 그 두 분을 쫓아가야 할까요?”

군후가 이렇게 묻자 장군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요씨 집안에서 고인(高人)의 도움을 받은 모양이다. 이런 사소한 일로 괜히 감정이 상할 필요는 없겠지.”

* * *

계연과 상역은 변경 지역을 떠나자마자 하늘로 날아올라 서북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요정보에게 최대한 빨리 서신과 은자를 가족들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요정보를 비롯한 군중의 누구도 그게 이 정도로 빠를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한편,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 모탄촌에는 말을 탄 관아의 심부름꾼이 찾아왔다. 계연과 상역은 자신들을 ‘신분이 대단한’ 인물처럼 꾸며내어, 이 심부름꾼에게 요씨 집안으로 서신을 전달하라고 명령을 내린 후였다.

말발굽 소리는 마을 입구에 들어선 후에야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심부름꾼은 마을 내로 들어와 요 씨네 집의 위치를 묻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장 씨에 의해 요대구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장 씨는 맨 앞에서 길을 이끌었고, 관아에서 나온 이는 말을 끌고 뒤에서 따라왔다.

“나리, 바로 이 앞입니다.”

“어서 안내해 주시오.”

“예, 예!”

장 씨는 재빨리 요대구의 집 앞으로 뛰어가 목청껏 소리쳤다.

“요 씨, 요 씨! 자네 집에 서신이 왔다 하네! 정보가 군대에서 부친 거라더군!”

“뭐라고?”

요대구는 황망한 얼굴로 집에서 뛰쳐나와, 말을 끌고 오는 관아의 심부름꾼을 발견했다. 심부름꾼은 장 씨에게 말고삐를 맡긴 다음, 두어 걸음 뛰어가 요 씨를 향해 살짝 공수했다.

“이분이 의총을 세웠다던 그 선인(善人)이시군요! 아드님인 요정보가 군중에서 서신 한 통과 이것을 함께 보내왔습니다. 저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심부름꾼은 이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꽉 묶인 천 주머니를 꺼내 요대구에게 건넸다. 기대에 찬 얼굴로 주머니를 열어본 요대구는 몸동작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곧이어 심부름꾼을 집 안으로 초대했다.

“나리,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차 한 잔 마시고 가시지요!”

그러자 심부름꾼이 재빨리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직 처리할 공무가 남아서 차는 마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역병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아 지금 관아가 한창 바쁘거든요……. 이 마을에는 역병에 걸린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보아하니 착한 일을 하면 정말 하늘에서도 굽어살펴주는 모양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럼 더는 붙잡지 않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나리!”

심부름꾼은 배웅할 필요 없다며 연신 손을 내저은 뒤, 말에 올라 곧바로 떠나려 했다. 그러다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다시 고개를 돌려 요대구에게 말했다.

“참, 제 이름은 두곤(杜昆)이라 합니다. 대하현의 아역(*衙役: 관아에서 부리던 하인)이지요.”

이에 요대구는 잠시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가, 이를 꽉 깨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나리. 다음에 현성에 가면 반드시 성의를 갖추고 찾아뵙겠습니다, 지금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관아의 심부름꾼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 말은, 그저 저를 잊지 말아 달라는 뜻입니다. 선인에게서 은자를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걸 받을 엄두도 나지 않고요…….”

이렇게 말한 그는 곧바로 말머리를 돌려 마을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마을에서 조금 멀어진 후에야 채찍질을 하며 말을 달렸다.

그가 떠나자마자 장 씨가 얼른 소리쳤다.

“요 씨, 멍하니 뭐 하고 있나! 어서 서신이나 열어보게!”

“아, 아, 그렇지, 참. 그, 그런데 난 글을 모르는데…….”

“아이고, 아이 아버지! 지금 그게 중해요? 일단 열어나 봐요!”

“응, 그래. 열어보자고.”

그렇게 세 사람은 뜰에 모여 앉아 서둘러 천 주머니를 열어 안에 있던 것을 꺼냈다. 그중 하나는 무게가 꽤 나가는 작은 주머니였는데, 요대구의 부인이 다급히 열어보니 안에는 은덩이가 잔뜩 들어있었다.

“허…… 이리 많은 돈이…….”

“서신도 열어봅시다!”

요대구는 서신이 상할까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어 곱게 접힌 다섯 장의 종이를 꺼냈다.

신기한 것은 요대구가 그 서신을 정말로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어쩐 일인지 서신 위에 적힌 내용을 다 알아볼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자연스럽게 아내와 장 씨, 그리고 둘째 아들에게 서신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어머니, 아버지 친전(*親展: 편지를 받을 사람에게 직접 펴보라고 적는 말). 불효자인 요정보가 계 선생님께 대필을 부탁했습니다. 종군(從軍)한 지 9년째인 지금, 저는 고향에서 수천 리 떨어진 곳에 와 있습니다. 9년 동안 서신을 한 통도 받지 못하셨다니, 이를 듣고 제 마음도 무척 괴로웠습니다……. 아직 두 분께 키워주신 은혜를 갚지도 못했으므로, 저는 보내주신 목검을 보자마자 그리움에 눈물이 솟구쳐 나왔습니다…….”

다섯 장을 다 읽자, 일각(15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요씨 부부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뒤덮였고, 장 씨마저 듣다가 두 눈이 시큰해졌을 정도였다.

다만 그들의 어린 아들은 나이가 어린 데다 친형을 만난 적도 없었으므로, 그리 슬퍼하지 않았다. 아이는 모친의 다리에 기대어 천진한 얼굴로 물었다.

“형님께서는 아주 아주 먼 곳에 있다고 하였으니, 서신이 오려면 몇 달이 걸려야 되지 않나요? 게다가 이 서신은 계 선생님께서 대신 써주었다고 했죠? 하지만 계 선생님하고 상 선생님은 오전에 막 떠나셨잖아요?”

세 사람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네, 두 선생께서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쩌면 이 서신은 정보가 일찍이 보내놓았던 거고, 오늘에서야 현성에 도착한 게 아닐까?”

장 씨가 이렇게 말하자 요씨 부부도 막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여전히 천진한 표정을 한 그들의 둘째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형이 서신에서 목검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건 오늘 아침에 아버지께서 계 선생님께 드렸고요!”

그러자 완전히 말문이 막힌 어른들이 서로 멀뚱히 얼굴만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다.

잠시 후, 요대구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신선을 만났구나…….”

* * *

그럼 그들이 현재 신선이라 의심하고 있는 인물은 어디에 있을까?

계연과 상역은 다른 이를 찾아 서신을 전달한 후에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토지신과 함께 모탄촌의 의총 안에 서 있었다. 다만 지금은 누군가 이쪽으로 오더라도 이들을 보지 못할 터였다.

이들이 지금 서 있는 위치는 병사의 혼백이 머무는 무덤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최근 죽은 두 병사의 시신이 함께 묻힌 묘지였다. 모탄촌 마을 사람들이 연고 없는 시신들을 유족 대신 땅에 묻어준다고는 하나, 시신들을 일일이 다른 곳에 묻어줄 수는 없었다.

이때 병사의 혼백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그는 무덤가에 앉아 계연과 상역에게 자신이 죽기 전과 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의총이 있는 구역도 점차 ‘활기차’졌다. 다른 병사의 귀신이 다른 혼백들과 함께 무덤에서 줄지어 나왔기 때문이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장면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졌겠지만, 토지신을 비롯한 세 사람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병사가 죽기 전 일을 털어놓자, 얘기를 듣던 이들은 그제야 병사의 남다른 의리와 무위(武威)를 이해할 수 있었다. 병사는 원래 십장(*什長: 병졸 열 사람의 책임자)이었다가 후에 비장(*裨將: 장군을 곁에서 모시는 직위)으로 승진된 자였다. 그가 몸담은 군영(軍營)은 대하현에서 멀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군영에서 반란이 일어나 병사는 난전 중에 장군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시체가 강물을 따라 이곳까지 표류해온 것이다.

계연은 병사가 일찍 죽은 것을 무척 안타깝게 여겼다. 만약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었다면, 그는 장래에 무언가 큰일을 이루었을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조정의 기둥이 되었을지 반역의 무리가 됐을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는 중용(*中庸: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아니한,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나 정도)을 아는 자였다. 그보다 더 보기 드문 점은 그가 다른 사람의 의견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자기 생각과 판단을 행동으로 실천할 줄 안다는 데에 있었다.

사실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에 저울을 갖고 있어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다. 악한 사람들도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지만, 악인들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것뿐이다. 어쨌든 사람 대부분은 대중의 의견을 따르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고, 이 병사처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들은 극히 적었다.

“그럼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나요? 군대를 이룬 귀신들은 저승에서 받아주지 않을 텐데요.”

계연이 이렇게 묻자 의총 전체가 고요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병사가 말했다.

“그럼 더는 병사 노릇은 하지 않고 얌전히 무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니면 저승에 있는 귀성(鬼城)으로 보내져도 되고요.”

그러자 토지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은 귀성에 있는 귀신들이 이승에 사는 사람보다 많다고 들었소. 마침 일손이 부족한 시기라,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아무나 받아주지 않겠지만 역귀에 맞서 싸운 경력이 있으니 내가 보증해주겠소. 그럼 저승에서도 믿고 써줄 것이오. 비록 한동안은 저승 관리의 신분을 얻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정당한 일을 맡게 될 것이오.”

토지신의 말에 의총의 귀신들이 동요했다. 저승에 가서 하급 관리의 업무라도 맡는 것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다.

원래 계연은 술법을 이용해 이 귀신들을 무애귀성으로 보낼까 하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귀신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향에 가진 정이 깊었다. 그러니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다면, 귀신들에게는 무애귀성으로 가는 것보다 저승으로 가는 쪽이 당연히 더 좋았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정당한 저승 관리의 신분을 얻게 될 테니, 무애귀성과는 더욱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저승에서도 이들을 원한다면, 확실히 그곳에 가는 게 더 좋겠네요.”

이렇게 말한 계연은 토지신을 향해 덧붙였다.

“기회를 봐서 적당히 저와 상 선생 이야기를 꺼내면, 저승에서도 빨리 처리해 줄 거예요. 그럼 토지신께서도 번거롭게 애쓰지 않으셔도 될 테고요.”

그러자 토지신이 양손을 맞잡아 예를 취하며 계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토지신, 명을 따르겠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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