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내가 가르쳐주마
계연은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치우지 않았다. 호운이 깨어나면 호운이 보고 치우게끔 할 생각이었다. 이는 계연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편이 호운에게 강렬한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연은 지난 생에서 학생이었을 때, 어려운 문제를 풀거나 기나긴 숙제를 완성한 뒤에 공책을 보던 기분을 떠올렸다. 숙제를 다 하느라 공책이 온통 새까매진 것을 보던 그 느낌. 계연은 그와 비슷한 느낌을 호운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술법을 배울 때의 고된 노력에 비하면, 3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계연 자신도 진의(眞意)를 깨닫기 위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에서 몇 년을 앉아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 3일 동안 호운이 보여준 구도(*求道: 깨달음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것) 정신이야말로 가장 귀한 것이었다. 계연은 3일 동안 조금의 거짓이나 삿된 마음도 없이 진지하게 배움에 임한 호운을 지켜보며, 호운에게 장래에 3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 믿었다.
시원하게 기지개를 핀 계연이 막 대문을 나서려던 순간, 그는 고개를 돌려 뜰 안 곳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끄럽게 해서 깨우면 안 된다.”
이는 당연히 작은 글자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글자들은 평상시 소란을 떨며 호운을 놀리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호운의 수행에 지장이 가도록 하지는 않았다. 글자들은 이미 이 여우를 ‘자기편’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 저희가 잘 지켜보고 있을게요.”
이렇게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한 것은 ‘의(意)’자였다. 글자는 마침 대문 위에 붙어있었다.
“그래.”
계연도 ‘의(意)’ 자를 향해 대답하고는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천우방을 오가는 이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낯익은 얼굴은 몇 명 없어서, 주민 대부분은 계연에게 가볍게 목례(目禮)를 할 뿐이었다. 그러다 가끔 자신을 아는 이웃을 마주치면 계연도 기쁜 얼굴로 인사를 나누었다.
쌍정포 밖 거리를 지날 때 그는 한 노인을 마주쳤는데, 그는 계연을 보고 깜짝 놀라며 서둘러 그에게 다가왔다.
“계 선생님? 정말 선생님이십니까?”
비록 나이로 인해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계연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예, 맞아요. 전(錢) 대형이시군요.”
그는 계연과 그다지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계연을 볼 때마다 서로 안부를 묻곤 하던 사이였다. 물론 그 당시 전 대형의 나이는 장년(*壯年: 서른에서 마흔 안팎의 혈기 왕성한 나이)이었고, 머리도 검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등이 굽은 모습이었다.
“아직 저를 기억하시는군요? 저도 선생께서 돌아오셨다고 듣기는 했는데, 한 번도 마주치지는 못해서 궁금해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천우방에는 벌써 몇 년이나 대추꽃 향기가 나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꽃향기가 나는 걸 보곤 선생께서 오신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향기만 맡아도 밤에 잠이 더 잘 오더라고요.”
“하하, 확실히 향기롭긴 하지요.”
계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서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아마 시기가 잘 맞았던 탓인지, 그 후로도 계연은 연이어 계연을 아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마주쳤다. 천우방을 나선 계연은 손기노점이 손님으로 꽉 차서 빈자리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 계 선생님이 오셨어요!”
손아아가 멀리서 계연이 천우방의 방문(坊門)을 나서는 걸 발견하고는 즉시 할아버지인 손복에게 알렸다.
손복이 노점에 놓인 식탁 몇 개를 바라보자 손님들로 꽉 찬 상태였다.
“이를 어쩌지? 자리가 없네!”
그가 일하는 나무 수레 근처에 놓인 식탁에는 젊은이 넷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손복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손 씨 아저씨, 저희 거의 다 먹었어요. 곧 자리 비워드릴게요.”
이렇게 말한 젊은이는 예전에 계연이 몇 년 만에 영안현에 처음 돌아왔을 때 손복이 계연을 알아보던 장면을 목격한 청년이었다. 젊은이는 손복과는 먼 친척 사이였고, 계연에 대한 인상이 깊게 남았기 때문에 계연을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아, 잘됐구먼. 그럼 어서 먹게!”
젊은이 두 명이 그릇을 들고 후룩후룩 서둘러 면발을 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식사를 끝내기도 전에 계연이 이미 노점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손복은 계연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계연이 일찍 도착하자 깜짝 놀랐다. 손복이 막 계연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려던 순간, 계연이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저 기다란 걸상에 함께 앉으시면 되죠. 서두르지 마세요. 목 막히면 어쩌시려고요.”
그러자 젊은이가 급히 그릇을 들고 동행 옆으로 가서 앉았고, 함께 온 이도 얼른 한쪽으로 비켜 자리를 내주었다. 계 선생님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는 것이 서서 먹는 것보다 당연히 훨씬 나았다.
손복도 얼른 다가와 식탁을 다시 한번 깨끗이 닦았다.
“계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항상 드시던 그대로죠?”
“네, 먹던 대로 주세요.”
다른 손님들은 계연을 몰랐기 때문에, 이쪽을 몇 번 쳐다보다가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계연은 자리에 앉아 호기심 어린 얼굴을 한 젊은이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수레 곁에 서 있던 손아아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아아는 이곳에 있었지만, 그때는 휴무일이었기 때문에 계연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아가 학당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계연이 아아를 향해 가볍게 손짓하며 부르자, 아이가 목검처럼 갖고 놀던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읏차! 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계연에게 다가왔다.
“계 선생님, 부르셨어요?”
계연은 아이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가지는 휘어진 곳 없이 곧았고 껍질도 전부 벗겨져 있었다. 보아하니 오랫동안 갖고 놀았던 것 같았다. 통통한 작은 얼굴과 커다랗고 반짝반짝한 두 눈을 보던 계연은 아이가 자라면 틀림없이 미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손씨 집안은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군.’
“아아야, 왜 학당에 있지 않고 여기 있어? 오늘은 쉬는 날이 아닌데. 아니면 아직 가족들이 학당에 데려다주지 않은 거니?”
그러자 손아아가 불만스러운 듯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가 아침에 데려다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가기 싫어했어요.”
“왜?”
손아아는 고개를 숙이고는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대답을 망설였다. 이를 지켜보던 손복이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 계연이 고개도 들지 않고 그를 향해 말하지 말아 달라고 손짓했다.
“나한테 알려주면 안 될까?”
손아아가 몸을 이리저리 흔들더니 주저하며 대답했다.
“학당에 가기 싫어요. 애들이 괴롭혀요.”
“왜 너를 괴롭히지? 훈장님은 뭐라고 안 하니?”
이왕 말한 김에 손아아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마음껏 털어놨다.
“훈장님이 혼내긴 하시는데, 계속 옆에 계시는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훈장님이 혼내도 걔들은 신경 안 써요. 그건 그래도 괜찮은데, 제일 열 받는 건 학당에 저까지 여자아이가 세 명 있는데요. 남자애들이 매일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애들이라고 놀렸거든요. 책을 못 외운다고 놀리고, 훈장님의 물음에 답을 못해도 놀리고, 글씨를 못 쓴다고 놀리고, 저희가 앉은 자리에 물을 뿌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다른 두 명을 대신해서 물을 뿌린남자애를 때려줬어요. 원래는 그 여자애들도 저한테 고마워했었는데, 며칠 뒤에는 다른 남자애들처럼 저랑 멀어졌어요…….”
이렇게 털어놓는 아이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아아는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들어보니 울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를 보던 손복은 마음이 아파 국수를 계연 앞에 내려놓고는 손녀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괜찮다, 괜찮아. 아아가 싫으면 학당에 가지 않아도 된다.”
이를 듣던 계연이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아야, 학우들은 신경 쓰지 말고 대답해보렴. 글을 읽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니, 나쁜 일이니?”
손아아가 소매로 얼굴을 훔친 뒤 계연을 향해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좋은 일이에요…….”
“그래, 글공부를 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길이야. 여자아이뿐만 아니라, 실은 많은 남자아이도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한단다. 지금은 학우들과 아직 낯설어서 그렇지만, 점차 서로 익숙해지면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손아아는 몸을 배배 꼬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식탁 위의 국수를 보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계 선생님, 일단 국수부터 드세요. 불면 맛없어요.”
“하하!”
그 말에 계연이 웃으며 손아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젓가락을 집어 들고 양념과 국수를 잘 섞고서 몇 입 먹은 후, 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일단은 학당에 다니렴. 그러다가 방학이 되면 내가 글자를 쓰고 글을 읽는 법을 알려주마. 아까 남자아이들이 너를 놀린다고 하지 않았니? 글공부를 잘하게 되어서 훈장님이 너를 아끼게 되고 나면, 그때 가서도 남자아이들이 너를 놀릴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이렇게 말한 계연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글씨를 아주 잘 쓴단다. 너희 훈장보다 내가 더 잘 쓸걸!”
윤재성이 예전에 영안현 현학(縣學)의 훈장이었기 때문에, 이곳의 현학은 면학 분위기가 아주 짙었다. 따라서 성적이 좋은 아이는 모든 이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계연이 말에 손아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한편 갓 삶은 양 내장을 수북이 담고 있던 손복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을 꾸며낸 뒤, 두세 국자면 다 퍼낼 수 있는 내장을 일부러 하나씩 집어 그릇에 담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니?”
계연은 국수를 한 입 먹은 뒤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손아아가 할아버지 쪽을 힐끔 쳐다봤고, 손복은 손녀를 향해 눈짓을 보낸 뒤 다시 바쁘게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아가 잠시 계연을 쳐다보다가, 천우방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은은한 꽃향기를 맡은 뒤 웃었다.
“계 선생님, 거짓말하시는 거 아니죠?”
“하하하하, 내가 왜 널 속이겠니?”
손복은 마음을 굳게 다잡은 뒤, 내장을 담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계 선생님, 양 내장입니다. 자자,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손복은 웃는 얼굴로 다가와 접시를 계연 앞에 내려놓았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장을 약간 집어 두 청년의 그릇에 각각 놓아주었다.
“자리를 내주어서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계 선생님!”
두 젊은이는 그의 친근한 행동에 깜짝 놀랐다. 이전에 보았던 손복의 태도에 더해, 집안 어른들께 거안소각의 계 선생에 관해 묻고 나서야 젊은이들은 계 선생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계 선생님은 윤 문곡과 막역한 사이이기까지 했다. 즉 영안현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는데, 다만 이를 모르는 이가 더 많을 뿐이었다.
그들은 계연이 나눠준 양 내장을 먹으며 계연과 손아아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서로 눈짓을 나눈 뒤 그중 하나가 이렇게 떠보듯 물었다.
“계 선생님,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계연의 젓가락질이 뚝 멈췄다. 이 문제는 정말 계연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산신당에 있던 그 거지가 원래 몇 살인지 몰랐으며, 그렇다고 자신의 나이를 말하자면 지난 생까지 함께 쳐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그래서 그는 웃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두 분 생각보다는 많을 거예요.”
“쯧!”
그러자 손복이 한쪽에서 웃는 얼굴로 젊은이들을 꾸짖었다.
“이 녀석들, 별 질문을 다 하는구나! 오늘 국숫값은 내가 받지 않을 테니, 다 먹었으면 썩 가거라!”
“아이고, 주인장이 손님을 내쫓네!”
“그러니까! 다 먹으면 썩 갈게요. 아직 다 안 먹었단 말이에요!”
두 사람은 웃으며 손복과 농지거리를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