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화. 거안소각의 어르신
현성 안의 큰길을 지난 뒤, 윤청은 모든 이들에게 마차와 말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는 하인 몇 명에게 객잔을 찾아 마차를 보관하라고 한 뒤, 꼭 필요한 이들만을 데리고 천우방으로 향했다.
얼마 걷지 않아 호위를 비롯한 시종들은 물론이고 상평 공주마저 얼굴에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공주는 그러다 윤청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서방님, 어디선가 향긋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정말 향기롭네요…….”
그러자 윤청이 웃으며 멀리 천우방 방향을 바라보았다.
“평(*萍: 공주인 양평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 이게 바로 제가 말했던 거안소각의 대추꽃 향기입니다. 그 나무는 매년 꽃이 피지는 않는데, 일단 꽃이 폈다 하면 영안현 전체가 그 향기로 뒤덮이지요. 제 부친이 쓴 시 중에서도 이에 대해 묘사한 구절이 있습니다. 푸르른 가지 위에 노란 봉우리가 맺히니, 현성의 반이 꽃향기로 물드는구나(靑黃結枝頭, 半縣聞花香). 이 구절이 바로 이 향기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천우방 바깥의 골목에서는 손기노점이 평상시처럼 영업 중이었다. 손아아는 당연히 노점에 있지 않고, 계연의 거안소각에서 글씨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한편 윤청과 상평 공주를 호위하는 시위들은 변복을 한 채로 이들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두 사람과 가까이 있는 호위들 또한 두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그들을 따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들을 따르는 시녀와 시종만 여전히 넷이었다.
그래서 영안현 백성들의 눈에 이들은 무척이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평생 장사를 하며 사람을 살피는 데 도가 튼 손복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손복은 멀리서부터 이미 범상치 않은 일행을 지켜보며, 대단한 지위의 어떤 인물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이에 그는 노점에 있던 네다섯 명의 손님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어이, 어서 국수나 드시게. 저쪽 사람들 오는 거 쳐다보지 마시고. 특히 저 여인 쪽은 쳐다도 보지 말고, 알겠는가?”
“예? 아저씨, 저분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살집이 퉁퉁하게 오른 젊은이가 그쪽을 바라보며 손복에게 물었다.
영안현은 평화롭고 안온한 지방이었지만, 그래도 보통 백성 중에서는 뚱뚱한 사람이 없었다. 배를 곯지는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일은 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젊은이는 예외에 속했고, 노점의 단골손님이기도 했다. 손복은 그를 자주 보았기 때문에 특별히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자네들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니,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겠지. 비록 내가 저 사람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저 거창한 일행만 봐도 고관(高官)이나 귀한 신분이 분명하다네. 그러니 남의 집 여인 쪽으로 함부로 시선 돌리지 말게. 그러다 성격 나쁜 이들을 만나면 자네들 눈알을 파낼지도 모르니!”
“어이쿠, 그렇게까지 무섭단 말입니까?”
그러자 손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러니 적당히 시선을 돌리게, 게다가 저런 귀한 집안의 여인네들은 생김새가 남달라서, 한번 보면 시선을 못 뗄까 봐 걱정스러워 그러네.”
손복은 자기 노점에서 혹여나 소란이 날까 봐 일부러 겁을 주었다.
“예, 알겠어요!”
“음, 어서 국수나 먹게.”
그런 말을 나눌 동안 윤청의 일행이 가까이 다가왔고, 손복과 손님들은 눈치껏 화제를 바꿔 소소한 일상 얘기를 나눴다.
윤청의 일행은 노점 가까이 온 후에도 곧바로 노점을 지나치지 않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윤청이 손복을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손씨 아저씨, 잘 지내셨죠? 아직 장사하고 계시는 걸 보니 정말 반갑네요.”
윤청은 당연히 노점의 주인이 예전의 손기 할아범에서 그의 아들인 손복으로 바뀐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복은 윤청을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이런 귀인(貴人)이 자신에게 예를 취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기를 아는 것 같았으므로 손복은 더욱 마음이 초조해졌다.
손복은 서둘러 앞치마에 손을 닦고는 윤청을 향해 정중히 양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아, 저는 윤청입니다. 예전 윤 훈장님의 아들인 윤청이요.”
윤청이 이렇게 말하자 손복도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아아, 윤 문곡의 아드님이시군요! 조정에서 큰 관직을 맡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과찬이세요! 참, 계 선생님 혹시 댁에 계신가요?”
손복이 즉시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예, 계십니다.”
“네, 그럼 일 보세요.”
“예, 예!”
윤청이 몸을 돌려 천우방 방문을 향해 걸어가자, 상평 공주는 미소 띤 얼굴로 손복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윤청을 따라갔다.
그들이 떠나자 노점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손님들은 즉시 윤청에 관해 묻기 시작했고, 어떤 이들은 돈을 내고 다급히 떠나기도 했다. 이런 사람들은 윤 문곡의 아들이 돌아왔다며 얼른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싶어 하는 이들이었다. 손복은 손님들의 물음에 일일이 대답해주다가, 돌연 허벅지를 탁 두드리며 손아아가 아직 거안소각에 있는 것을 떠올렸다.
천우방의 조용한 거리를 걷자, 윤청은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거의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천우방 주민들은 이 범상치 않은 일행을 보고는 멀리 피해 갔다. 윤청은 내심 반가운 마음에 주민들과 인사하고 싶었으나, 그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조용히 걸었다.
거안소각에 가까워지자 윤청은 고개를 돌려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잠시 후에 다른 이들은 모두 바깥에서 대기하고, 나와 공주 전하, 그리고 시위대장 두 명만 들어가도록 하지.”
“예!”
뒤를 따르던 하인들이 공손히 대답했다.
사실 윤청은 두 시위대장도 두고 가고 싶었으나, 그런 명령을 내리면 두 사람이 난처해질 것이다. 그들도 이곳이 안전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상평 공주를 보호하라는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온 것이었다. 시위와 시종들은 모두 물러나게 할 수도 있어도 이 두 사람만은 떼어낼 수 없었다.
곧이어 화개(*華蓋: 화려하게 장식된 햇빛 가리개용 양산)처럼 거안소각을 뒤덮은 커다란 대추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꽃향기는 전보다 더욱 짙어졌으나, 전혀 과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이쯤에서 다른 이들은 모두 걸음을 멈췄고, 네 사람만이 거안소각 대문 앞에 섰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대문 위의 편액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솜씨네요! 윤 재상의 글씨에도 뒤지지 않겠어요!”
상평 공주가 이렇게 감탄하자, 윤청은 속으로 부친의 글씨가 보기 좋긴 하지만 계 선생님에 비하면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시위가 막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윤청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는 한 걸음 나아가 가볍게 대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계 선생님, 접니다. 윤청이요!”
그러자 안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빗장을 뽑는 소리가 났다.
끼익-.
대문이 열리며 대문 안쪽에서 하얀 장포를 입은 서생의 모습을 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윤청과 상평 공주를 번갈아 보았다.
“청이 왔구나? 들어오렴.”
“선생께서 들어오라고 하시네요!”
손아아가 이렇게 말하며 들어오라는 듯이 옆으로 비켜섰다. 윤청과 상평 공주는 두 시위장과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윤청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안쪽에 있던 계연과 거안소각의 풍경을 관찰하고 있었다.
뜰 안은 무척 깔끔했고 구조와 장식도 소박했다. 우물은 석판으로 덮여 있었고, 중앙에는 돌 탁자 하나와 돌로 된 의자 네 개가 놓여 있었다. 물론 그 현성의 반을 향기로 뒤덮는다는 대추나무도 있었다. 계연은 탁자 앞에 앉아 있다가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인사했다.
“어리석은 백성 계연이 상평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계연은 상평 공주를 향해 공수하며 예를 올린 후, 대문을 닫고 돌아온 손아아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손아아도 즉시 계연이 인사하던 모습을 따라 했다.
“촌부의 딸 손아아가 상평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예를 거두세요, 선생님. 그리고 너도, 어서 일어나렴. 저는 서방님과 함께 가까운 어른들께 초대장을 보내러 방문한 겁니다. 그러니 저를 더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그저 손아랫사람의 방문이라 여겨주세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바로 한 뒤 그들을 이끌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윤청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걸 보고 계연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한 뒤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청아, 공주 전하와 함께 앉아 있으렴. 영안현 풍속에 따르면, 신랑 신부가 방문하면 손윗사람으로서 당차(*糖茶: 백설탕, 흑설탕 등을 넣어 달콤한 맛이 나는 차)를 내오는 게 관례지. 내가 가서 얼른 준비해오마.”
부부가 된 두 사람이 함께 방문하면, 손윗사람이 당차를 내어와 함께 마신다. 이는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였다. 계연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윤청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계연이 찻잔과 찻주전자, 작은 단지를 얹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계연은 직접 윤청과 상평 공주를 위해 차를 따른 뒤, 작은 단지를 열어 한쪽에 놓인 나무 숟갈로 투명하게 빛나는 결정을 퍼서 찻잔 안으로 넣었다.
이미 대추꽃 향기가 만연한 거안소각인데도, 계연이 그 단지를 열자마자 주위에 달콤하고 특별한 향기가 퍼졌다. 한번 맡기만 해도 온몸이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서 맛보세요!”
계연은 찻잔을 두 사람 앞에 각각 밀어주고는, 다시 차 두 잔을 따라 시위 두 사람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신혼부부가 아니니 당차는 내드리지 않겠습니다.”
두 시위는 눈치가 빨랐으므로 그에게 감사해하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윤청은 당연히 이 당차가 특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윤청은 양평(*상평 공주의 이름)을 향해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맛을 봤다. 달콤한 찻물이 목에 넘어오자, 그 은은한 향기가 입안에 돌면서 따뜻한 열기를 담은 청량한 기운이 사지 곳곳으로 퍼졌다.
상평 공주는 한입 마시자마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그 달콤한 맛에 즉시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졌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찻물을 전부 비워버렸다.
“서방님, 영안현의 당차는 정말 맛있네요. 황궁에 공물로 들어오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양평이 아쉬워하는 것을 눈치챈 윤청이 한입 마신 자신의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 당차는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거든요. 조정에 공물로 바칠 양도 충분치 않고요. 자, 제 것도 마저 드시지요!”
양평은 눈치가 빨랐으므로 계연을 잠시 바라보다가 탁자 위의 ‘설탕 단지’로 눈을 돌렸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자신에게 다시 당차를 만들어주지 않는 걸 보면, 귀한 물건임이 확실했다.
양평은 원래 거절하려 했으나 윤청의 따뜻한 눈길과 방금 먹은 당차의 맛이 입에 감돌아, 결국 찻잔을 받아들었다. 양평은 이번에는 천천히 몇 입 나누어 마시며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는 남은 반 잔을 윤청에게 돌려주었다.
“하하하……. 두 사람이 서로 은애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계연이 웃으며 두 사람 맞은편에 앉았고, 시위들은 여전히 좌우 양쪽에 서 있었다.
양평은 탁자 위에 문방사우가 놓인 것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종이 위에 글자가 적힌 것을 발견했다. 보아하니 글이 아니라 같은 글자를 여러 번 적은 것이었는데, 글씨가 무척 생동감 있고 수려했다.
“이건 계 선생님께서 쓰신 글씨인가요?”
양평의 물음에 꿀 결정이 든 단지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손아아가 대신 나서서 대답했다.
“아니에요, 공주 언니. 이건 제가 쓴 글자예요! 선생님 글자는 이것보다 더 뛰어나요. 제 글자와는 비교도 안 되거든요!”
그러자 양평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그것도 여자아이가 이렇게나 수려한 글씨를 쓸 줄 알다니. 상황을 보니 아이가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