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66화 (466/892)

466화. 청첩장

“아아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오렴.”

손아아는 뜻밖에 공주 전하를 만나 뵙게 되어 현재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그래서 계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선생님…….”

“착하지, 말 들으렴.”

“네에…….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손아아는 탁자 위의 문방사우를 정리하더니 옆에 있던 작은 서책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는 대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를 등에 짊어지고 연신 뒤를 돌아보며 대문을 나섰다.

손아아가 떠나자 계연이 시위 두 명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들은 마치 마에 씐 것처럼 담장 쪽으로 걸어가 벽에 딱 붙어섰다. 이를 본 양평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으나, 윤청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계연이 양평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토록 침착한 걸 보니, 과연 황가(皇家)의 기품을 지니셨군요.”

상평 공주는 거안소각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으나, 윤청이 평온한 모습으로 곁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녀도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계연의 말에 담장에 붙어선 두 시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양평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서 이렇게 대답했다.

“본디 황가에서 태어난 여인이니 황가의 기품을 지닌 것이 당연하지요.”

윤청이 옆에서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와 평아(*萍兒: 공주인 양평을 친근하게 부르는 것)은 내년에 혼례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혹 시간이 되신다면 도성에 오셔서 저희 혼례에 참석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호운도 데려와 주시면 좋고요.”

이렇게 말한 윤청이 품 안에서 붉은 봉투를 꺼내 두 손으로 계연에게 전달했다. 계연은 잠시 겉에 금박을 입힌 글자를 쓸어보다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이가 마침내 가정을 이루는구나!”

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추나무 곁으로 가서 섰다. 그는 대추나무 가지를 잠시 올려 보다가, 다시 우규산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안현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늙었고,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그들 모두 흙으로 돌아가겠지. 거안소각의 계연이 20년간 늙지 않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불로장생한다고 여기도록 만들어선 안 되겠지. 그러니 그들의 생활에 섞이지 않고 이렇게 천천히 잊히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모르겠구나.”

“선생님, 저는 결코 선생님을 잊지 않을 겁니다.”

윤청이 깍듯하게 대답했다.

한편 계연의 말을 들은 양평은 탁자 아래의 왼손으로 자신의 치맛자락을 힘주어 꼭 잡았다. 그러자 이를 눈치챈 윤청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양평은 심장이 쿵쿵 뛰었으나 애써 침착하려고 자신을 다독이며 평온한 어조로 계연을 향해 물었다.

“선생님이 방금 하신 말씀은, 선생께서는 선인(仙人)이란 뜻인가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진정한 선인은 없습니다. 그저 선도를 닦는 이들만이 있을 뿐이지요. 사람들은 거리에서 점을 치고 부적을 써주는 사람을 법사(法師)라거나 강호의 술사(術士)라고 부르고, 산에서 구름과 비를 부리는 사람은 선장(仙長)이라 부르지만, 실은 모두 같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인은 없다지만, 선도를 닦는 이들 모두가 그 풍모와 뜻을 배우고자 하지요.”

계연의 말은 에둘러 양평의 질문에 긍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윤청의 손을 더욱 힘주어 꼭 잡은 양평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황족인 양 씨들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정도로 맹목적으로 신선과 인연을 맺으려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선인으로 의심되는 이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공주 전하, 전하께서는 총명하시니 황족들이 몇 번이나 신선과 인연을 맺으려다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한 것을 아시겠지요. 아, 정확히 말하자면 황족들이 원하던 결과 말입니다.”

계연은 늙은 거지인 조염생에 관한 일은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공주도 알아들었을 터였다.

“오늘 함께 거안소각으로 데려온 것만 봐도, 청이는 공주 전하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일전에 그에게 부부 사이에 작은 비밀은 서로 가질 수도 있지만, 큰 비밀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러자 양평이 무의식적으로 윤청을 바라보았고, 윤청도 그녀와 눈을 맞췄다. 양평이 이대로 윤씨 집안에 들어오면 두 가지 상황 중 하나가 펼쳐질 것이었다. 앞으로 마주칠지 모르는 모든 신비로운 일을 그녀에게만 비밀로 하거나, 한 가족처럼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터놓고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윤청은 양평을 믿어보고 싶어 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윤씨 집안이 오늘날의 지위를 얻은 데에 있어 제가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여기시겠지요?”

계연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모두 이런 생각을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결코 공주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도움은 아닙니다. 윤 재상께서는 본래 학문이 깊고 호연정기를 갖췄으니 온 세상의 귀감이 되는 분이지요. 하지만 저는 윤씨 집안과 가까운 지기(知己) 사이로 왕래해왔을 뿐이에요. 설령 제가 누군가를 온 힘을 다해 돕더라도, 만백성과 귀신들조차 존경하는 윤 재상 같은 분을 뚝딱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한 계연은 미소 띤 얼굴로 자리로 돌아와 붉은 청첩장을 손에 들고 윤청과 양평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주 전하. 윤청에게 시집오게 되면 제게도 아끼는 다른 손아랫사람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앞으로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 한뜻이길 바랍니다!”

계연이 오른손을 뻗자 소매 안에서 한 줄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손끝에서 늑대 털 붓으로 변했다. 붓끝에는 은은한 빛이 맺힌 가운데 먹이 묻어 있었다.

붓끝이 붉은 종이를 먹으로 물들이자, 은은한 묵향(墨香)이 주위에 퍼졌다. 계연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운치 있는 글씨가 붉은 종이 위에 드러났다.

《百年好合, 永結同心》

백년해로하고, 영원히 한마음 한뜻이길 바란다는 글귀였다.

마지막 글자까지 완성되자 종이 위에서 빛이 흘렀다 사라졌다.

계연은 청첩장을 윤청에게 돌려주었다.

“잘 챙기렴. 만약 다른 여인을 맞아들인다면, 그때는 써주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이 감히 그럴 리가요!”

상평 공주가 윤청을 세게 꼬집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계연에게 만복례(*萬福禮: 여자들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머리와 무릎을 숙이는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께서는 이제 제 웃어른이시니, 저를 평평 혹은 평이라고 불러주세요.”

“알겠다. 이후에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그렇게 부르마.”

이때 윤청이 무언가 떠오른 듯 허벅지를 탁 때리더니, 탁자 아래에서 술병을 들어 올렸다.

“계 선생님, 이건 흙 속에 20년간 묵혀있던 천일춘입니다. 원자포에서 이걸 사 오기가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선생님께서 좋아하시는 걸 알고, 제가 특별히 준비해왔습니다!”

계연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원자포 주인장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자야. 20년 전이었으면 이런 흙 속에 묵힌 20년짜리 천일춘은 확실히 귀한 것일 테지만, 지금은 과연 얼마나 숨기고 있는지 모르지. 그러니까 다음에는 30년 이상을 찾아보렴. 음, 어쨌든 네가 받는 봉록으로는 충분히 살 수 있겠지.”

그러자 윤청이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20년짜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 봉록으로 30년짜리를 사면, 남은 날은 손가락만 빨면서 살아야 합니다!”

* * *

원래 윤청과 상평 공주 일행은 현성 안의 주루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고 했으나, 계연의 초대로 거안소각에서 계연이 직접 만든 요리를 먹게 되었다.

두 사람이 떠나던 시각에는 이미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윤 씨 가족들이 살던 옛집은 비록 따로 관리하는 이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머무르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예비부부는 성안의 객잔으로 향했다.

대추꽃 향기가 은은하게 풍기는 천우방을 나서며, 양평이 윤청과 나란히 걷다가 이렇게 물었다.

“서방님, 계 선생님은 정말로 신선인가요? 저분은 바람과 비를 자유자재로 부리고, 불로장생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신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술법을 부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거든요. 그저 계 선생님 덕분에 항상 마음 한쪽이 든든한 건 있었지요. 선생님께서 바람과 비를 부리고, 불로장생을 할 수 있는지가 그리 중요한가요? 제가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로장생은 결코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양평은 마음속에서 계속 생각하던 것을 내내 망설이다 결국 이렇게 물었다.

“그럼, 이 일을 아바마마께 알려도 될까요?”

그러자 양평의 예상과 달리 이를 들은 윤청은 외려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

“일단 그게 국사(國事)를 망치는 일인지 아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대정국에 도움이 되는 선인이 있다면, 영명하신 황상께서 그자가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 판단하실 수 있겠지요. 게다가 이 일은 제게 묻는 게 아니라, 계 선생님께 물어야 합니다. 전하께서 느끼시기에, 선생께서 어찌 생각하실 것 같습니까?”

그러자 양평도 깨달음을 얻고 더는 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 * *

거안소각에서 마신 차 덕분에 둘은 배와 마차를 타며 쌓인 여독이 단번에 풀렸다. 다음 날부터 윤청 일행은 가까운 친척 어른들을 찾아뵙고 청첩장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윤청은 청첩장을 전달하며 집안 어른들을 위해 도성까지 오는 마차와 배를 준비해 놓겠다고 말했다.

넷째 날, 특별한 소식을 받아든 윤청은 상평 공주를 데리고 우규산으로 향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우규산을 구경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윤청의 친우인 호운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호운을 만나게 된 양평은 예전에 ‘붉은 털을 가진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 여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선(狐仙: 여우가 수천 년 동안 도를 닦아 되었다는 신선)’을 만난 양평은 거안소각에서 보다 더욱 흥분했다. 호운은 거리낌 없이 양평의 앞에서 요법(妖法)을 부려 호위들을 떨쳐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만든 부적을 자랑하며, 모습을 드러낸 인영(人影)을 ‘영매(影魅)’라고 불렀다.

그날 공주와 준 부마를 모시던 시위들은 모두 가슴이 철렁했다. 이전에 식인 호랑이가 나타났었다는 산에서, 대단한 무공 실력을 지녔다는 시위들이 두 사람을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윤청과 양평은 반나절 후에 무탈한 모습으로 산에서 나타났고, 식은땀을 흘리던 시위들은 그들을 보고 크게 안도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벌을 내리기는커녕 이번 일을 숨겨주겠다고 하여 전전긍긍하던 시위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번 일 때문에 영안현을 떠나 다시 도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시위들은 두 사람에게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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