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3화. 산이 하나 늘어나다
“아, 하하……. 노 선생님, 이제는 저도 힘을 보태도 되겠지요?”
계연의 깊이 가라앉은 두 눈이 도사연을 바라보았다. 계연의 시선에는 그녀가 인간을 매혹할 때의 눈빛처럼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계연은 오른손에 이미 넝쿨검을 쥐고 있었다.
“계연……?!”
도사연의 목소리는 경악이라기보다는 날카로운 비명과 공황에 가까웠다.
‘어쩐지, 그렇게 된 것이었어! 대수국 황실과 조정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저 늙은이 같은 선인이 있을 리가 없지!’
지나가던 길이었다던 말도 다 거짓이었던 것이다.
이제야 도사연은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분명 자신을 노린 함정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수국의 천사처에서 만든 함정이 아니라, 계연이 설치한 함정일 터였다. 저 늙은 거지를 상대하는 것만도 이미 힘에 부치는데, 그보다 더 대단한 계연까지 나타나다니 이제는 살길이 없었다.
한번 이런 절망적인 감정에 휩쓸리자 천요(天妖)와 비견되던 도사연의 기세가 단번에 수그러들었고, 아홉 번째 꼬리도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진정한 구미호가 아니었으니, 한순간 생긴 아홉 번째 꼬리와의 충돌은 내내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계연의 법안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때다!’
그와 동시에 계연이 선검을 뽑았다.
챙-!
선검이 검집에서 나오며 천지를 새하얗게 비추었고, 뒤이어 선검의 검의(劍意)가 담긴 검기(劍氣)가 계연의 움직임에 따라 날아갔다.
“아악-!”
도사연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입가에 피를 흘린 채로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뒤이어 하얀 여우 꼬리 하나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홉 번째 꼬리가 일검(一劍)에 떨어지자, 노염생은 도사연의 기세가 그녀의 꼬리가 여덟 개였을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이는 도사연이 선검에 의해 원기(元氣)를 상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心氣)까지 함께 베여나갔기 때문이었다.
도사연은 땅에 쓰러진 채 둥글게 몸을 말고서 덜덜 떨고 있었다. 남은 여덟 개의 꼬리는 원래 크기로 돌아와 몸에 찰싹 달라붙었고, 다시는 전처럼 산맥을 뒤흔드는 기세를 내뿜지 못했다. 도사연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실체를 갖춘 커다란 산을 올려다보았다. 노염생은 계연이 그녀를 공격했다고 해서 진산법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계연이 넝쿨검을 다시 검집 안에 넣자, 하늘을 뒤덮었던 날카로운 검의(劍意)가 단번에 사라졌다.
넝쿨검을 검집에 넣은 계연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기류가 흐르거나 술법을 부릴 때 생겨나는 영기(靈氣)를 끌어당기는 기척도 없이 주위의 공간이 계연의 소매에 뒤덮인 것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공중에 떠 있던 여우 꼬리가 계연의 수리건곤술에 의해 소매 안으로 들어갔다.
계연이 그것을 다시 밖으로 꺼내자, 하얀 여우 꼬리는 어느새 기다란 은발(銀髮)이 되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고작 머리카락 하나였으나 그것을 쥔 계연은 무게가 꽤 나간다고 느꼈다.
쿠구궁……!
파자산이 다시 한번 진동하기 시작하자, 계연의 주의력이 다시 공중의 실체화된 산으로 옮겨갔다. 그러자 주위의 기운이 납을 쏟아부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제발, 제발 저를 가두지 마세요! 당, 당신들은 진선(眞仙)의 경지에 오른 선장(仙長)인데, 그런 실력으로 어찌하여 저처럼 힘없는 여인을 괴롭히시는 건가요? 부끄러움도 없나요?”
도사연은 뒤이어 급히 애원했다.
“계연! 계 선생님! 따지고 보면 저희는 옛 인연이지 않습니까? 그날 밤 강가의 놀잇배에서 만약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면, 함께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눌 뻔하지 않았나요? 정말 이렇게 제게 냉정하게 대하실 건가요?”
도사연은 창백한 얼굴에 입가에 피를 흘리는 처량한 모양새로 상공의 계연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누가 보더라도 가련히 여길 만했다.
이를 바라보던 노염생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계연을 쳐다볼 정도였다.
그러자 지금의 경지에 오른 계연조차 노염생의 눈빛에 일순 억울한 마음이 들어 얼른 전음(傳音)을 보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으음,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노염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상공에 뜬 산이 완벽한 모습을 갖추었다.
“낙산진요(*落山鎭妖: 산을 떨어뜨려 요괴를 제압하다)!”
그의 목소리가 우레와 같이 울리며 하늘에서 커다란 산이 아래로 떨어졌다.
우웅-!
계연은 산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산이 완벽하게 실체화된 것을 느꼈다.
“아아악-!”
쿠르릉……!
도사연의 날카로운 비명이 온 산에 울리며 파자산 전체가 요동쳤다. 산골 마을에 사는 백성들은 중심을 잃고 철퍼덕 넘어질 정도였다. 산맥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정괴마저 간담이 서늘해져 머리를 끌어안고 벌벌 떨 정도였다.
이 정도의 진동에도 무너진 산은 한 군데도 없었고, 고작해야 돌이 굴러떨어지거나 흙먼지가 일어난 정도였다.
쿠구구구……!
커다란 산이 떨어진 곳에서는 땅이 움직이며 주위의 산세(山勢)와 연결되는 굉음이 났다. 홀로 우뚝 서 있던 산이 근처의 산맥과 이어지자, 마치 원래부터 파자산에 있던 산봉우리처럼 보였다.
파자산에서 솟구치던 요기(妖氣)도 그 순간 산 아래에 짓눌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하늘을 뒤덮던 법광도 점차 빛을 잃어, 노염생의 주위에는 오색빛깔 광륜(光輪)만이 남았다.
내내 상공에 떠 있던 계연과 노염생은 그제야 지면으로 내려왔다. 그사이에 노염생의 뒤에 있던 신성한 느낌이 들게 하던 광륜이 사라지며, 그는 다시 원래의 남루한 비렁뱅이로 돌아갔다.
뒤이어 공중의 흙먼지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떨어져 내리며, 파자산이 점차 청명한 하늘을 되찾았다.
주위의 산림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지금 이 모습만 보자면 보통의 어느 저녁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계연과 노염생은 마치 유유자적한 등산객처럼, 공중에서 떨어진 커다란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에게서 1장(약 3m) 정도 떨어진 산 절벽 위에는 손가락 하나 정도 너비의 작은 구멍이 있었다. 계연과 노염생은 법안을 이용해 수십 장은 족히 이어진 구멍 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산 내부에는 몇 척(尺) 너비의 공간이 뚫려 있었다. 그 안에는 산 아래에 갇힌 도사연이 정신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목과 머리를 포함해 찢어진 옷을 걸친 어깨와 팔만이 바깥으로 드러나 있었고, 다른 부분은 전부 돌 아래에 깔려 있었다.
‘조금 심했나……?’
계연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서유기 속 손오공이 오지산에 깔렸을 때는 그나마 몸의 반 정도는 바깥으로 드러난 채였다. 비록 바람과 햇빛에 고생을 좀 했겠지만, 그래도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고 길을 지나는 목동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다.
반면 도사연은 온몸이 산 아래에 전부 깔린 채였다. 누군가와의 교류는커녕 이 아래에 그녀가 있다는 걸 누구도 모를 터였다. 숨 막힐 정도로 갑갑한 좁은 공간에 고작 공기가 통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 하나만 뚫려 있었으니, 거의 공간이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손오공에게 그런 벌을 내린 여래불(如來佛)은 무척이나 자비로웠던 것이다.
노염생은 시선을 거두고 계연을 향해 ‘하하’ 웃었다.
“드디어 저 여우를 사로잡았군요! 그나저나 계 선생님도 참 인정사정없으십니다. 미인을 아끼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줄이야. 그 일검은 정말이지 빠르고 정확하더군요!”
계연은 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듣고 노염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 선생님, 그만 놀리시지요. 도사연은 아무 말이나 거리낌 없이 입에 담는 자입니다. 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조금도 믿을 수 없지요. 예전에 대정국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저 요녀를 만났는데, 잠깐 방심한 사이에 놓쳐버렸던 것뿐이에요.”
“그냥 한번 말해본 것뿐이니,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얻은 기회였으므로 노염생은 순순히 계연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번에도 우연히 만난 것이겠지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우연히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계연은 그가 시치미를 뚝 떼며 덧붙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두 사람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고, 계연이 그를 향해 물었다.
“노 선생님, 백 년 동안 그냥 가둬두기만 하실 건가요?”
그러자 노염생이 손을 털며 대답했다.
“다른 도리가 있습니까? 스님 체면은 세워 주지 않더라도 부처님 체면은 세워 주라(不看僧面看佛面: 중요한 사람의 체면은 세워 줘야 한다는 뜻)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저것은 옥호동천의 팔미호인 데다, 우리가 알기로는 죽일 정도로 큰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으니 어쩔 수 없지요. 계 선생님께서도 그래서 죽이지 않고 꼬리만 하나 자르지 않으셨습니까?”
이에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하지만 도사연이 깨어나면 물어볼 건 물어봐야 해요. 저 요녀는 사방 곳곳을 휘젓고 다녀서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이왕 만났으니 이참에 알아내야죠.”
도사연의 미약한 기운을 느끼며 계연이 다시 한번 물었다.
“노 선생님, 도사연이 언제쯤 깰까요?”
“그건 저 요녀에게 달렸습니다. 계 선생님이 잘라낸 것은 꼬리 하나였을 뿐이지만, 그 당시에는 확실히 구미호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로 인해 입은 상처는 제가 진산법으로 내리누른 것보다 훨씬 중할 겁니다. 제가 그래서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은 것이지요.”
노염생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손가락을 접어 계산한 뒤 대답했다.
“일 년 반 정도면 깨어날 겁니다.”
* * *
파자산 밖.
한창 도망치던 병사들은 땅이 흔들리던 순간에만 잠시 멈춰 섰을 뿐, 무관의 재촉 아래 다시 속도를 올려 뛰고 있었다. 산과 땅이 흔들리던 그 광경은 바보가 봐도 선사(仙師)와 요마(妖魔)가 싸우고 있는 거라는 것을 알아챌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사위가 조용해지자 몇 리(里) 밖으로 도망쳤던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늦췄다. 호기심이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너무 힘들었던 탓이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각종 무기를 든 채 죽은 여우들까지 짊어지고 가야 했던 병사들은 말까지 전부 죽었기 때문에, 안장에 매여 놓은 물주머니나 건초 같은 것까지 직접 옮겨야만 했다. 전에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쉬지 않고 뛰어왔지만, 도사연에 의해 이미 한 차례 몹시 놀랐던 이들은 결국 더는 버티지 못했다.
“허억…… 허억…….”
무관은 장창을 땅에 꽂아 몸을 지탱한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최근 며칠은 날씨가 내내 무더웠는데, 과도하게 놀란 데다 지금까지 뛰어오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한 탓에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떨어지고 있었다. 몸에 걸친 옷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한번 멈추니 그간의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고, 다른 병사들도 하나둘 땅으로 쓰러져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무관은 장창으로 몸을 지탱한 채, 고개를 돌려 파자산 방향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산이 무너질 정도의 진동은 이미 멈춘 뒤 오래였다.
“장, 허억…… 헉…… 장군, 이제, 이제는 끝난 거……겠지요?”
“글, 글쎄다. 조금, 조금 전에 검명(劍鳴)이 들리고 흰빛이 퍼진 것으로 보아, 선인(仙人)의 검술 같았는데…… 그저, 선장께서 이긴 것이길 바라야지…… 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