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495화 (495/892)

495화. 교활한 여우

‘원력이 흩어지지 않잖아?’

계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노염생을 흘끗 살펴보았다.

‘설마 이 산에 산신이 있나?’

“왜 그러십니까? 만약 피곤하신 거라면, 제가 구름을 조종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한 번만 다시 아래로 내려가 보죠. 시도해 볼 게 있어서요.”

이렇게 말한 계연은 다시 아래쪽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시도해 볼 것이요? 무엇인데 그러십니까?”

노염생은 이렇게 말한 뒤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에 그가 다시 계연을 쳐다보니, 어느새 땅에 내려선 계연은 이미 법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곳 산신을 뵙기를 청합니다.”

칙령 도음(道音)과 함께 계연이 오른발을 살짝 떼었다 밟았다.

그러자 지면 위로 물결 같은 파문이 퍼져나가더니, 연기가 지면에서부터 솟구치며 무명옷을 입고 놀란 얼굴을 한 황토색 정괴가 나타났다.

정괴는 얼른 계연과 노염생을 향해 공손히 읍했다.

“파자산 산신이 두 분 선장(仙長)을 뵙습니다!”

‘과연 산신이 있었구나!’

“예를 거두세요. 산속에 신당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구신술로 소환하게 되었네요.”

계연은 이렇게 대답한 뒤 노염생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산신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지맥과의 연결이 그리 깊지는 않았어요.”

“…….”

모습을 드러낸 정괴를 바라보는 노염생의 얼굴 근육이 약간 움찔거렸다. 마치 계연이 불러낸 것이 산신이 아니라, 아까 떨어진 자신의 체면인 듯했다.

계연은 노염생의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으나, 노염생은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 원래의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그의 얼굴 가죽은 진산법으로 불러낸 산보다 더욱 두꺼운 것이 분명했다.

잠시 그를 쳐다본 계연은 다시 시선을 산신에게 돌렸다. 산신은 초조한 얼굴로 서서 계연과 노염생을 연신 흘끗거렸지만, 산신이 가장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은 갑자기 나타난 눈앞의 커다란 산이었다.

파자산의 정신(正神)이 되려는 존재로서, 산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산세(山勢)와 지맥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산신은 당연하게도 이 파자산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 커다란 산봉우리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위엄 넘치는 험준한 산봉우리는 조금 전의 싸움으로 생겨난 게 분명했다.

‘아이고, 어머니……. 아니, 하늘이시여……!’

산신은 산속의 백성들이 하는 말을 따라 저도 모르게 속으로 ‘어머니’라고 했다가, 자신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그러다 계연과 노염생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산신은 재빨리 산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제 이름은 석유도(石有道)라고 합니다. 두 분 상선(上仙)께서는 무슨 일로 소신(小神)을 찾으셨는지요?”

그러자 계연이 한쪽을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저 산은 노 선생께서 펼친 진산법으로 만들어진 산이에요. 그 아래에는 요녀를 가두고 있지요. 아마 백 년 안으로는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산신은 입을 달싹이다가 새로 생긴 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파자산의 산신이니, 저 대신 이곳을 잘 감시해주세요. 산세가 파괴되거나 하여 저 요괴를 짓눌러 놓은 봉인에 문제가 생기지 않게요.”

저렇게 큰 산이 짓누르고 있는 요괴가 대체 어떤 존재일지 산신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보통의 요괴라면 이미 진작에 고깃덩이가 되었을 터였다. 게다가 백 년 동안 눌려있어야 한다니?

이렇게 생각한 산신은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만약 저 대단한 요괴가 도망이라도 친다면, 가장 먼저 공격할 상대가 자신을 지키던 ‘옥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요괴는 아직 도망쳐 나오지 않았고, 커다란 산을 불러내 요괴를 제압한 두 선장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이에 산신은 감히 거절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소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는 빈틈없이 공손한 태도로 다시 한번 그들을 향해 읍했다.

“커흠!”

노염생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 요녀를 가둔 산맥은 아직 진정한 신령이 되지 않은 당신 같은 산신에게 큰 득이 될 것이오. 저것은 장안법 같은 걸로 만들어낸 가공의 산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진짜 산맥이오. 게다가 주위의 산세와도 연결되어 있어, 아직은 드러나지 않지만 5년, 10년, 100년 후에는 파자산의 산세가 이보다 더욱 강해질 것이오. 산신이 되려 한다니,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알 거라 믿소이다.”

파자산의 산세가 강해질수록 산신의 힘도 세질 것이다. 그 뜻을 이해한 파자산 산신은 눈을 반짝이며 노염생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였다.

“상선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산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내내 들던 우려를 그들에게 털어놓았다.

“저, 소신도 무척 두 분 상선을 위해 힘을 쓰고 싶지만, 도행이 얕고 보잘것없어 법력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소신이 비록 스스로를 산신이라고 부르기는 하나 대수국 조정에서 산신이라는 지위를 허락받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에 미미한 법력도 저는 산에서 공공연히 펼칠 수가 없습니다. 산신당을 세우고 싶어도, 삿된 신을 모신다며 관아에서 즉각 부숴버릴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계연과 노염생은 다시 진지한 눈길로 산신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당연히 산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들은 상태였다.

이 산신이 이렇게까지 머리를 잘 굴릴 줄은 몰랐던 계연은 꽤 흥미를 느꼈다. 보아하니 이자는 기회를 잡을 줄도 알고 간도 꽤 큰 정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한쪽을 향해 손짓하자, 금갑 역사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우람하고 거대한 체격과 기백에 산신이 깜짝 놀랐다.

“주인님.”

금갑 역사는 살짝 양손을 맞잡으며 읍을 한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렇다 할 감정이 없는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외부 세계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에 금갑 역사의 시선이 노염생을 훑고 지나 산신에게 닿았다.

다만 금갑 역사의 기본자세가 고개를 똑바로 들고 가슴을 편 상태라, 그 모습으로 왜소한 산신을 바라보니 산신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두 사람마저 역사가 안하무인인 태도로 산신을 업신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하, 이쪽은 금갑 역사에요. 황건(黃巾) 역사라고도 부르고요. 제가 호신(護身)을 목적으로 부리는 신장(神將)입니다. 그도 산신을 도와 이곳을 함께 지킬 것입니다.”

산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한 발짝 걸어 나와 금갑 역사를 향해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저는 파자산 산신인 석유도입니다. 당분간 신장 나리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금갑 역사는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서서 허리를 굽히거나 대답을 하지도 않고, 그 자세 그대로 산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신이 고개를 들자, 금갑 역사는 시선을 옮겨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완전히 그를 무시하는 태도였다.

“아, 하하, 금갑 역사는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니에요. 일단, 대수국 조정에서 산신의 지위를 승인하지 않았다고 했죠? 심지어 관아에 산신이 되겠다고 알리지도 못했다고요. 자연히 산신당을 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고요.”

계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 일은 간단히 해결될 것 같아요. 노 선생님과 함께 대수국의 국사를 만날 예정이거든요. 그 정도 요구는 아마 들어줄 거예요.”

이에 산신은 속으로 무척 기뻐했으나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대수국 관아의 인가를 받을 수만 있다면, 산중이나 산길 근처에 산신당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이 힘을 얻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만약 대수국 황제가 성지를 내려 책봉까지 해준다면, 관아에서 백성들을 이끌고 내게 제사를 지낼 거야. 그렇게 되면…… 됐다 됐어.’

그런 생각을 하던 산신은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 정도 실력을 지닌 고인(高人)이 한 말이니, 보통 사람들이 마구 날리는 빈말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득의양양해도 본분을 잊으면 안 되는 법이었다. 산신은 다시 한번 두 사람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자신의 수행에 관련된 일이니 조금도 소홀할 수가 없었다.

“두 분 선장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소신도 안심입니다!”

계연과 노염생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신이 지켜봐 준다면, 도사연이 달아날 확률은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네, 그럼 석 산신만 믿고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저 요녀가 깨어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어쩌면 정말로 백 년 동안 지킬 필요는 없을지도 몰라요.”

산신은 계연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노염생은 아니었다. 저 팔미호 도사연은 죽이기도 쉽지 않지만, 가두기는 더욱 쉽지 않았다.

계연과 노염생이 떠나려는 것을 보고 산신이 다급히 물었다.

“두 분 상선께 여쭙겠습니다. 산 아래에 갇힌 요녀가 대체 무슨 요괴입니까? 저도 알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때 계연과 노염생의 발아래에는 이미 구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동시에 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팔미호 도사연입니다. 변신도 잘하고 언변도 능숙하니, 무슨 말을 하건 절대 믿지 마세요.”

이런 말을 남긴 계연은 노염생과 함께 산신을 향해 살짝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당연히 산신은 태만하게 굴 수 없어, 그들을 향해 읍하며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휴우……. 고인의 앞이라 그런지 압박감이 대단하군. 그래도 내게는 좋은 일이야. 하하…….”

구름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지자마자 산신은 단번에 긴장이 풀렸다. 그는 의기양양한 웃음이 드리워진 편안한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팔미호라니 듣기만 해도 두려웠지만, 저런 요괴를 가둬둔 상선은 더욱 대단한 이들임이 틀림없었다. 저분들이 있는 한 자신의 앞길은 이제 창창하니 해 뜰 일만 남은 것이다.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린 산신은 금갑 역사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어이쿠!”

산신은 화들짝 놀라 퍼덕이다가 몸을 웅크렸다. 하마터면 이 신장이 함께 산을 지킨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방금 내가 득의양양한 웃음을 짓던 모습을 전부 보았을까? 선장께 고자질하면 어쩌지?’

“저, 신장의 존함이 어찌 되십니까? 앞으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 일하게 되겠군요, 하하! 소신이 다시 한번 인사 올리겠습니다!”

산신 석유도는 금갑 역사를 향해 예를 올렸으나, 역사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에 산신은 더욱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 신장은 조금 전 자신이 한껏 거들먹거렸던 장면을 본 것이 틀림없었다.

“신장 대인, 저, 혹시 따로 좋아하는 것이 있으십니까? 소신이 이곳의 주인으로서 손님께 예를 다하고자 합니다만…….”

그러자 금갑 역사가 마침내 그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산을 바라보더니 다시 산신을 쳐다보며 말했다.

“주인님의 명을 받들어, 이 산을 지키고, 요괴를 감시한다.”

금갑 역사는 이렇게 말한 뒤 천천히 뒤로 물러나 산과 하나가 되며 모습을 감췄다.

산신은 멍하니 넋을 놓고 서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제대로 된 산신이 아니라 약간 무시당한 느낌이긴 했지만, 이는 신장의 성격이 워낙 엄격하고 빈틈이 없어 그렇다고 여겼다. 산신은 금갑 역사가 녹아든 산을 향해 살짝 양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후, 자신도 푸른 연기로 변해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구름 위의 계연과 노염생은 함께 서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뒤, 노염생은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구신술을 할 줄 아십니까?”

“네.”

“그럼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노 선생님께서도 묻지 않으셨잖아요.”

“휴우…….”

노염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이렇게 말했다.

“계 선생님의 구신술은 말을 뱉는 동시에 술법이 펼쳐지는 신묘한 경지였습니다. 제 구신술보다 훨씬 대단하더군요.”

“과찬이세요. 노 선생님의 구신술도 제가 처음으로 보는 술법이었어요. 마찬가지로 신묘하더군요.”

그러자 노염생이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그 술법은 군데군데 빠진 곳이 있었는데, 제가 혼자 수련하며 많이 고친 것입니다. 어디 내놓을 만한 술법은 아니지요.”

계연은 다시 뭐라 말을 할까 하다가 결국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다시 얼마간 침묵을 유지하다가, 노염생이 먼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계 선생님, 대체 또 무슨 현묘한 신통력을 지니셨습니까? 저에게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예를 들면 선생의 수리건곤(袖里乾坤)이라던가요.”

계연의 수리건곤술은 보기에만 그럴듯할 뿐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게 없었고, 다른 술법은 여기서 아무렇게나 펼치기에는 부적절했다. 그저 말로만 늘어놓으려니 그건 또 허풍을 떠는 것 같았다. 이에 계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저희 같은 수선자들은 언제나 감춰둔 비장의 술법이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저는 스승도 몸담은 곳도 없는 일개 수선자일 뿐이라서, 노 선생님처럼 뿌리가 깊고 튼튼하지 못합니다.”

노염생은 온 얼굴로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드러냈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큰 기대 없이 한번 말이나 꺼내 본 것이었고, 계연이 정말로 경천동지할 어떤 술법을 펼쳤다면 아마 자신이 더 놀랐을 것이다.

노염생은 도사연이 일 년 반 정도는 깨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반면 계연은 도사연을 결코 보통 요괴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만 이번에는 진산법으로 눌러 놓았으니 당분간은 괜찮을 거라 여길 뿐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떠난 3일 뒤 오후, 파자산 깊은 곳의 여우 요괴를 가둔 큰 산 아래에서는 이미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또륵…… 또르륵……!

어두컴컴한 작은 공간의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박자에 맞춰 똑똑 떨어져 내렸다. 최근 이틀간 산중에 짙은 안개가 껴 도사연이 갇힌 공간 안에도 이슬이 맺혔기 때문이다.

바깥에 얼마나 많은 비가 쏟아지든 물방울은 언제나 같은 빈도로 떨어졌다.

그때, 이슬이 고인 자그마한 샘물에 다시 이슬이 한 방울 떨어졌고, 그것이 일으킨 물방울이 도사연의 이마에 튀었다. 그 순간, 도사연의 속눈썹이 움찔하더니 도사연은 점차 의식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거대한 산 밑에 깔린 것처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깨와 한쪽 손은 바깥에 드러나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봉인 때문에 쉽게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애쓴 끝에 도사연은 마침내 눈을 뜰 수 있었다. 사방은 온통 어두컴컴한 암흑이었고, 저 멀리에 빛이 들어오는 작은 틈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내가…… 허억……!”

도사연은 돌연 머리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뒤이어 며칠 전에 벌어졌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내가 산 밑에 깔린 거야? 공중에 떠 있던 그 산?”

고개를 들려고 하자 가만히 있을 때보다 압력이 배는 심해졌다. 주위 환경에서 비롯된 공포감 때문에 도사연이 느끼는 압박감은 더욱 심해졌다.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던 도사연은 마침내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백 년이라고…… 자그마치 백 년! 안 돼, 안 돼! 그건 싫어!’

“백 년이나 이 안에 갇혀 있을 순 없어!”

도사연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이 상태에서 벗어나 보려 발버둥 쳤지만, 온몸의 요력(妖力)이 무척 굼뜨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 주위에는 영기조차 희박했고, 햇빛과 달빛도 들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법력을 운용하려 하자 진산법이 즉시 그녀를 짓눌러 왔다.

“으윽……!”

도사연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다시는 요력을 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사연이 요력을 멈춘 뒤에도 진산법은 오히려 괘씸하다는 듯 더욱 위력을 늘려 그녀를 압박해왔다.

꽈아악…… 끼긱……!

그러자 마치 거대한 암석이 온몸의 뼈와 근육을 짓누르는 소리가 났다.

“아악……! 멈춰, 멈춰……! 안 할게, 안 할게! 윽……!”

약 반각(7~8분)이 지나자, 모든 희망을 버리게 할 정도로 도사연에게 처절한 고통을 주었던 압박감이 점차 느슨해졌다. 도사연은 땀에 흠뻑 젖은 상태로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억…… 늙, 늙은이가…… 독하기도 하지…….”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도사연은 별안간 목구멍 근처에서 약간의 단맛을 느꼈다. 뒤이어 알싸하면서 동시에 짙은 향기를 지닌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사지 곳곳에 퍼지며 열기를 불어넣었다.

조금 전까지 엄청난 고통 속에 있었던 도사연은 그 따뜻함에 온몸이 편안해지며 자신이 입은 상처가 천천히 아무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원기(元氣)가 회복되었다.

이는 바로 계연이 도사연이 갇힌 동굴 속으로 날려 보낸 용연향이었다. 그것이 지금에서야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후우…… 후우……. 이건, 술법인가? 계연이 남긴 건가?”

도사연은 그 늙은 비렁뱅이가 어떤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내내 계연을 방비하며 꺼려왔기 때문에, 계연이 어떤 사람인지는 남몰래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도사연은 계연이 애주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선계와 속세를 가리지 않고, 나름의 장점만 있다면 갖가지 주종을 즐겼다. 하지만 술고래라던가 주정뱅이라 불릴 정도로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술을 가리지 않는 애주가인 그는 분명 신비한 효능이 있는 술을 지니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술은 계연이 남기고 간 것 같았다.

도사연은 계연이 두렵고 꺼려졌지만, 차마 이토록 효능이 뛰어난 술을 뱉어낼 수는 없었다. 도사연은 방금 삼킨 술이 몸 곳곳으로 퍼지도록 조절하며 고통을 줄이는 동시에 원기를 북돋웠다.

잠시 후, 도사연이 마침내 편안한 듯이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이토록 신기한 효능을 지닌 술이라니, 나였다면 아까워서 아무에게도 주지 못했을 거야…….’

이제 몸은 조금 편안해졌지만, 캄캄하고 밀폐된 공간에 대한 공포는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비록 폐관 수행을 하면 십 년이고 수십 년이고 갇혀 있기도 하다지만, 그것과 지금 이 상태는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게 달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사연은 점차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도사연은 땀을 흘리며 머릿속으로 쉬지 않고 여러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 년 동안 갇혀 있고 싶지는 않으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지금쯤이면 어르신께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아직 모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얼른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게다가 만약 어르신이 직접 온다 해도, 그 늙은이는 몰라도 계연을 상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깨어난 후로 한참 침묵하던 도사연은 마침내 큰소리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거지 늙은이, 당장 나를 꺼내! 계연! 계연…… 당장 이리 와! 이 비렁뱅이 놈아! 계연……!”

여우 요괴의 날카로운 비명이 깜깜하고 밀폐된 공간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바깥으로는 아주 작은 소리만이 새어 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계연과 늙은 거지가 근처에 있다면 분명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이에 도사연은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간다는 것을 확인한 후, 요력을 모아 자신이 지르는 고함을 정확히 틈이 있는 방향으로 내보냈다.

보통 사람들은 틈새 바깥으로 들릴 듯 말 듯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겠지만, 감각이 영민한 동물들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동굴 내에 서식하는 박쥐 같은 동물들은 불안한 모습으로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아직 해가 지기 전인데도 동굴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 * *

그 시각, 계연과 노염생은 이미 이곳에서 멀리 떠난 뒤라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파자산 산신은 이를 모두 듣고 있었다.

뒤이어 도사연을 가둔 거대한 산체(山體) 앞에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 무명옷을 입은 정괴가 나타났다.

석유도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한 뒤, 곧바로 그것이 산 아래에 갇힌 팔미호가 내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바짝 긴장한 채 자신에게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은 금갑 신장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산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저 요물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뒤 다시 사라지려 했다. 그때, 도사연이 무슨 방법을 썼는지 바깥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기쁜 기색으로 소리쳤다.

“누구지? 늙은 거지? 계연? 당신들이야? 바깥에 있는 게 누구야? 어서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지금 미치기 일보 직전이니까 빨리 대답해!”

이미 한참 전에 냉정을 되찾은 도사연은 일부러 고통에 찬 듯 절망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거의 애걸에 가까웠다.

이에 산신은 발걸음을 멈추고 도사연이 갇힌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직 저 요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했으므로, 꼬리 여덟 개 달린 여우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산신으로서 그는 산등성이에 가만히 손을 대는 것만으로 그 조그마한 틈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에 그곳에 눈을 대고 바라보니 안쪽은 온통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지? 계연도 아니고 그 비렁뱅이도 아니네! 대체 어느 고인(高人)이신가요?”

도사연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대와 초조함이 담겨있어, 누가 듣더라도 그녀의 불안정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상대가 저리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석유도는 담이 조금 더 커졌다.

“제발요, 제게 대답 좀 해주세요. 아무 말이라도 해주세요. 정말 미칠 것 같아요…….”

이렇게 애걸하는 도사연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석유도는 본래 그녀를 무시하려 했으나, 이 파자산은 원래도 작지 않은 산이었지만 이 새로 생긴 산봉우리로 인해 후에 산세(山勢)가 더욱 늘어날 것이고 자신이 바로 그 산의 산신임을 떠올렸다. 이번 기회에 산신의 위엄을 먼저 떨쳐 보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말 몇 마디 섞는 것만으로 저 요괴가 도망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에헴! 나는 이 산의 정신(正神)이다. 상선(上仙)의 명을 받아 이곳에서 너를 감시하고 있지. 그러니 무언가 속셈을 꾸미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상선께 가서 알릴 테니!”

석유도는 틈새에 대고 최대한 위엄있는 목소리로 근엄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듣자마자 즉시 도사연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속셈을 꾸민다면 상선께 가서 알리겠다고? 기껏해야 고자질할 정도의 능력밖에 없다는 말이지? 아니지! 계연이 저런 별것도 아닌 놈만 남겨뒀을 리가 없어!’

“아, 산신 대인이셨군요. 대인께 예를 다하고 싶으나, 신첩이 지금 산 아래에 깔린 터라 제대로 예를 올릴 수가 없습니다. 부디 꾸짖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석유도는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큰 산 아래에 깔렸는데 인사를 하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동시에 그는 도사연의 납작 엎드린 태도에 무척 만족해했다. 무려 팔미호가 자신에게 산신 대인이라 칭하다니!

“음, 본 산신도 네가 예를 올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아래에는 암반수가 흐르니 안심하고 머물도록 해라. 내 영기의 흐름도 끊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안쪽에서 기쁨에 차 감격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산신 대인! 신첩이 대인께 이렇게나마 머리를 조아리겠습니다…….”

쿵…… 쿵……!

그와 동시에 정말로 머리를 땅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다만, 산신 대인께서 홀로 결정하실 수 있는 일인지요? 신첩 다른 과분한 것은 바라지 않을 테니, 샘물만이라도 끊기지 않게 해주세요. 때때로 물을 마시고 세수라도 할 수 있게 말입니다.”

주저하며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산신이 당황한 듯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금갑을 입은 신장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산신은 저 안에 흐르는 암반수는 산 밑으로 고여 떨어지는 것일 테니, 분명 상선께서도 알고 계실 것이고 그렇다면 신장도 뭐라 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크흠,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그 정도 일은 신장께서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도사연이 눈을 반짝 빛내며 생각했다.

‘과연!’

도사연은 잠시 무언가 생각한 뒤 구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예에…….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비록 저는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받아들일 수밖에요. 예전에 그분의 말을 들을 것을…….”

도사연은 이렇게 알쏭달쏭한 말을 남긴 뒤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한 번에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 좋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게다가 저 산신과 말을 섞어보니 다루기 어렵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바깥에 서 있던 산신은 도사연의 말에 호기심이 들었으나, 애써 호기심을 억누른 뒤 묻지 않았다. 도사연이 입을 다물자 그는 잠시 주위를 거닐다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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