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하릴없이 지내는 교용
상대가 뜻밖에 자신을 알고 있자 교용이 놀란 얼굴로 계연을 바라보았다.
“선생께서는 누구십니까?”
그러자 계연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저를 잊으셨군요? 예전에 동해에서 제가 정사께 선단을 이끌고 귀향하라 말씀드렸었는데요.”
그 말을 들은 교용은 온몸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눈동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아래턱을 덜덜 떨며 기쁨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그때 그 계 선장(仙長)님이시군요? 동해에서 만났던!”
“네, 드디어 기억이 나셨군요.”
교용이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젓다가 다시 얼른 끄덕였다.
“어떻게, 어떻게 잊겠습니까! 마침내 찾아와 주셨군요. 제가 어서 두 분을 모시고 국사를 뵈러 가야겠지요? 아, 참. 시간이 이렇게 늦었으니 일단은 제 처소로 먼저 가시지요. 오늘은 제가 두 분을 잘 접대한 뒤 내일 국사께 모시고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교 정사의 말씀대로 할게요.”
“예, 예! 이제는 일개 백성일 뿐이니, 정사라는 호칭은 가당치도 않습니다! 자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가 시정에서 채소 장사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집안 사정이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두 분을 접대하기에는 충분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용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전보다 훨씬 가볍고 빠른 걸음걸이로 계연과 노염생을 이끌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선장(仙長). 바로 저 앞입니다!”
“예.”
앞에서 길을 이끌던 교용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멈춰서서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도 이 두 사람이 신선 같은 존재이며, 결코 길을 잃지 않을 것임을 알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할 예의는 다해야 하는 법이었다.
교용은 더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지만, 여전히 힘이 좋고 건장했다. 그는 멜대를 짊어지고서도 두 사람을 가벼운 걸음으로 이끌었다.
노염생은 앞서 걷는 교용을 바라보며 계연과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계 선생님, 고관대작의 집에 간다고 한 끼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틀간 물 한 모금, 쌀 한 톨 먹지 않아 배 속이 텅텅 비었는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배불리 먹긴 그른 듯하군요.”
그러자 계연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만약 오늘 노 선생께서 만족스럽게 먹지 못하신다면, 후에 제가 선생을 모시고 주루로 가서 제대로 대접할게요. 그럼 괜찮으시죠?”
“좋습니다. 선생께서 직접 말씀하신 거니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하하…….”
“선생님도 참…….”
계연은 주머니 형편이 넉넉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쪼들린 것도 아니었으므로 밥 한 끼 정도는 충분히 대접할 수 있었다. 호운이 찾아다 준 금덩어리도 건드리지 않은 채였다.
이렇게 합의한 노염생이 다시 교용을 바라보며 계연에게 말했다.
“선생께서 대신 말을 전하라며 저들을 귀향하도록 한 뒤에, 정작 신분을 증명할 어떤 신표도 남겨주지 않으셨잖습니까? 아무래도 교용이 거리에서 채소 장사를 하게 된 데에는 그것이 원인인 듯합니다.”
“그럴 수도요. 하지만 얼굴이 불그스름하니 혈색이 좋고, 기가 허약한 상(相)도 아닌 데다 관리의 기운이 옅긴 하나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으니 아직은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네요.”
두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교용을 따라 골목길을 꺾어 넓은 길로 나왔다. 그러자 눈앞에 꽤 위엄있는 저택이 한 채 나타났다. 교용이 그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두 분 선장님들, 저기가 바로 제 집입니다. 어서 안쪽으로 드시지요!”
이렇게 말한 교용이 걸음을 서둘렀다.
편액 위의 글자가 크긴 했지만, 가까이 가야만 보이는 크기였으므로 노염생이 계연을 위해 세심하게 읽어 주었다.
“계 선생님, 편액에 교(喬)씨 집안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추측만 해도 알겠네요!”
교씨 집안의 저택은 예전과 같았지만, 그때와 같은 위용은 없었다. 대문 앞에는 문지기도 없었고 떨어진 낙엽조차 쓸려있지 않은 상태였다.
교용은 멜대를 진 채 대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두드렸다.
쿵쿵쿵…… 쿵쿵쿵……!
“덕(德)아, 덕아! 어서 문 열어라, 내가 돌아왔다!”
“예, 갑니다!”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대문 옆의 측문(側門)이 열리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나타났다.
“어르신? 왜 정문 앞에 서 계십니까? 저 두 분은 누구시고요?”
교용이 이마를 치며 다급히 말했다.
“아이고, 어서 이 문부터 열어라. 귀한 손님이 오셨단 말이다! 두 분 선장이 들어가실 수 있도록 정문을 열어라!”
“예? 아아아, 정문, 정문을 열어야지요…….”
저택에는 하인이 교덕(喬德) 하나뿐이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교씨 집안에서 일을 해왔으므로, 가세가 기운 후에도 여전히 교용에게 충성스러웠다.
계연과 노염생은 교용의 행동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교용이 예의를 중히 여기니 주인인 그의 말대로 따를 작정이었다.
끼익-!
아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정문이 천천히 열리고, 소식을 듣고 나온 교용의 가족들이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교용은 부인과 자녀들에게 저녁 식사를 풍성하게 차리라고 특별히 당부했다. 교용은 재료를 아끼지 말라고 다시 한번 강조한 후, 계연과 노염생을 모시고 응접실로 향했다.
교씨 집안의 저택은 도성 전체로 보면 그리 손꼽히게 큰 저택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결코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지금은 이들 가족과 교덕 외에는 머무는 이가 없어, 이들로서는 전부 다 청소할 수가 없었으므로 비워둔 건물과 방이 많았다.
교용의 가족들은 계연과 노염생의 방문에 무척 호기심을 느꼈다. 특히나 아이들은 주방에서 바삐 움직이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분이 그 선인(仙人)이지? 어째서 거지랑 같이 오셨을까?”
“쉬, 입조심 해. 그건 겉모습일 뿐이야!”
“천사처의 선사들과는 좀 달라 보여. 천사처의 선사들은 전부 선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선인이라고 모두 똑같지는 않지. 너랑 나도 생김새가 다르잖아.”
“쓸데없는 소리 마라. 밥 짓게 어서 불부터 붙이렴. 나는 가서 닭이나 두 마리 잡아 와야겠다.”
“오늘 우리 닭 먹어?”
“우와!”
주방의 분위기가 단번에 시끌벅적해졌다.
응접실에서는 교용이 계연과 노염생에게 차를 따라준 뒤, 귀향한 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바다에서 몇 년을 돌아다녔지만 대수국의 항구에 도착하기까지는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교용도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 돌아오는 길에는 폭풍을 만나거나 방향을 잃는 일 없이 내내 항해가 순조로웠기 때문이다.
교용 일행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대수국 황궁에 있던 황제의 용안은 활짝 피었다. 대수국 황제는 교용 일행이 선단(仙丹)을 구해온 줄 알고 즉시 교용에게 입궁하라 명했고, 금군과 어전 시위들을 보내 일행을 맞아들이게 했다.
황제는 선단을 구하기 위해 총 세 무리의 특사들을 파견했고, 특사들은 각각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선문을 찾으러 떠났었다. 교용의 선단은 동해로 파견되었으니, 원래라면 가장 소식이 늦어야 마땅했다. 그러므로 그리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았던 황제는 그들이 가장 먼저 돌아왔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하하, 황제가 무척 기뻐했던 모양이군.”
노염생은 교용의 설명에 한껏 조롱을 담아 비웃었다. 그에게는 과거 황제였던 제자가 있었고, 그에게 머리가 한번 잘리기도 했었다. 듣고 보니 대수국의 황제도 예전의 양종과 무척 비슷한 모양이었다.
노염생의 말에 교용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선단이 항구에 들어오기도 전에 관해사(觀海司) 사람이 저희를 먼저 발견했고, 입항하자마자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저희를 영접했지요.”
교용은 기억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 저희를 영접하러 나왔던 관원은 저희가 선단을 구하지 못했을뿐더러 계 선생님의 구두 약속만을 받고 돌아왔다는 말에, 어떻게든 저를 함께 도성으로 데려가려 했습니다.”
“그 후에는요?”
“도성에 도착한 후, 황제께서도 저희가 선단을 구하지 못했고 계 선장의 약속만을 얻어왔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셨습니다. 선인이 직접 한 말이라면 성상께서도 믿으실 것이나, 저 교용의 말은 그렇지 않지요……. 게다가 제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 선인과의 약속을 만들어냈다며 저를 탄핵하는 상소들이 올라왔습니다. 이에 크게 노하신 성상께서는 제 관직을 삭탈한 후 감옥에 가두라 명하셨습니다. 만약 국사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진작에 머리가 잘렸을 것입니다…….”
“제가 세심히 고려하지 못했군요. 부디 교 공(公)께서 양해해 주세요.”
계연이 양손을 맞잡으며 사과하자, 놀란 교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당치 않습니다’라며 손을 저었다.
계연은 자신이 그런 점까지 생각지 못했다며 사과했지만, 사실은 당시에 교용에게 남길 만한 신표가 따로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유명한 것도 아니고 유명한 선문에 몸담은 것도 아니라, 신표를 남겨봤자 별 효용은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이에 당시 계연은 선유 대회의 소식을 전해주는 게 더욱 설득력 있을 거라 여겼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계연의 실책이었다. 그는 선유 대회가 열리는 것은 수선자들 사이에서만 도는 은밀한 소식이고, 다른 이들은 모를 거라고 여겼다. 계연도 완산 나루터에 도착한 후에야 그 소식을 아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럼 국사는 교 공의 말을 믿었나요?”
계연이 이렇게 묻자 교용이 고개를 저으며 사실 그대로 대답했다.
“국사께서도 저를 완전히 믿지는 않으셨습니다. 국사는 먼저 선장에 관해 자세히 물은 뒤, 계 선장과 선하도의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지만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어 큰 도움은 되지 못한 듯했습니다. 하지만 점괘를 통해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확인했고, 후에 선장에 대해 점괘를 치려 하자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교용은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당시 국사가 성상께 이렇게 고하자, 저도 무언가 큰일이 난 줄 알고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성상께서도 얼굴에 노기를 드러내셨지요. 그러자 국사께서 이는 제가 진정한 고인(高人)을 만난 것이라 아뢰었습니다. 특별한 물건을 지니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국사 자신보다 도행이 한참 높은 수행자라는 뜻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요…….”
교용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반년 정도 갇혀 있다가, 선단을 구하러 떠난 다른 이들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이(李) 대인이 군수품을 들고 도망쳤다는 소식이었고, 성상께서는 자연히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러다 저와 사이가 막역했던 조정의 한 대신이 그 틈을 타, 그나마 교용은 황은(皇恩)을 잊지 않고 돌아와 소식을 전했다며, 공로는 없어도 고생은 할 만큼 했다고 넌지시 말을 올렸지요.”
교용이 이 대목에서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하하, 원래 성상께서는 저를 내년까지 가둬두려 하셨었습니다. 제가 말한 그 선인에게서 소식이 없으면, 내년 가을에 죄를 물어 목을 베기로 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그 일 덕분에 2주 뒤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쭉 이렇게 하릴없이 지내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