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해치(獬豸)
“폐하, 어젯밤에 소신이 정탐꾼에게 받은 보고에 의하면 교씨 집안에서 귀한 손님을 두 분 접대했다고 했었습니다. 각각 푸른 옷을 입은 서생과 나이 든 거지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을 대접하려고 교씨 집안에서 닭 두 마리를 잡고 생선을 하나 샀다고 합니다.”
“뭐라? 그리고 그걸 이제야 짐에게 알려?”
황제가 노기 띤 얼굴로 곁에 서 있던 시위를 쳐다보았고, 시위는 즉시 한쪽 무릎을 땅에 꿇으며 죄를 청했다.
“소신, 죽어 마땅합니다! 교씨 집안에서 고작 손님을 접대한 일로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덕은 천사처에 보고하러 간다고 했지만, 사실상 그 소식을 받아드는 것은 황제였던 것이다.
이를 보던 국사는 상대가 왜 구신술을 썼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황제와 성황신에게 각기 예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 그리고 성황신이시여. 이왕 고인께서 저를 찾으시니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국사, 짐이 함께 가도 되겠는가?”
그러자 성황신이 옆에서 덧붙였다.
“제가 두 분 선장께 폐하를 뵙고자 하냐고 물었더니, 계 선장께서는 국사를 청해오라고만 하셨지, 폐하를 뵙지 않겠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랬나!”
이를 들은 황제가 얼굴 가득히 희색을 띠었다.
“그럼 짐도 함께 가도록 하지!”
국사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황제를 향해 정중한 태도로 당부했다.
“폐하,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번 만남이 꼭 길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나이 든 황제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심한 듯 이를 꽉 물고 말했다.
“그래도 짐은 꼭 가야겠소!”
* * *
“황제 폐하 납시오!”
“국사 대인 납시오!”
천사처의 대전 안에 앉아 차를 마시던 계연과 노염생은 바깥에서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국사 문옥통은 황제와 함께 천사처에 도착한 후, 대전 앞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수행인들을 모두 물렀다.
교용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가운데에 서서 황제가 들어오는 쪽을 향해 장읍례를 올렸다.
“죄인 교용, 폐하를 뵙습니다. 국사 대인을 뵙습니다!”
“친애하는 교 경(卿), 어서 일어나시게!”
황제는 얼른 대전 안으로 들어가 친히 교용을 일으켜 세웠다. 동시에 그의 안색이며 차림새를 세심히 관찰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계연과 노염생을 향해 몸을 돌려 살짝 양손을 맞잡고 예를 갖췄다.
“이쪽이 바로 그 두 분 선장이시겠군요.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국사도 이때 앞으로 몇 발짝 나와 두 사람을 향해 장읍례를 올렸다.
“후학(後學)이자 손아랫사람인 문옥통이 두 분 어르신을 뵙습니다!”
계연과 노염생은 인사를 받고만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가벼운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계연이 황제를 향해 말했다.
“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시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굳이 계실 필요가 없으니 잠시만 자리를 피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한 계연이 소매를 휘두르자, 황제와 교용은 몸이 중심을 잃은 듯 기우뚱해지더니 주위의 풍경이 모호해진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자 그들은 이미 대전에서 두세 채 떨어진 한 건물의 뜰에 서 있었다. 대전 주위에 시립해 있던 시종과 호위들도 그들과 함께 이동한 뒤였다.
“짐은…… 아직 말도 몇 마디 못 했는데!”
“폐하, 아무래도 저희는 선인에게 쫓겨난 듯합니다.”
시위가 황제 곁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짐도 안다.”
황제가 사방을 둘러보니 천사처의 선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국사를 제외하고 두 선인과 동석해 있던 선사 세 사람은 대전 안에 남은 것이다. 다시 시선을 돌려보니, 불안한 얼굴로 한쪽에 서 있는 교용이 보였다.
그러자 황제는 즉시 온화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친애하는 교 경, 저 두 분 선장을 어찌 만났는지 얘기나 해주게.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는가? 여봐라, 당장 여기 앉을 자리와 찻물을 대령하거라. 여기서 교 경과 이야기나 나누어야겠으니 말이다.”
교용은 황제의 친절한 태도에 깜짝 놀라 연신 ‘명을 받들겠습니다’라며 허리를 굽혔다. 시종들이 탁자와 의자 등을 가져오자 그는 황제와 함께 자리에 앉아, 계연과 노염생을 만났던 일에 관해 설명했다.
막 채소 노점을 정리하고 집에 가려던 중이었다고 말하던 교용의 말에 황제는 경악한 얼굴로 그의 말을 끊었다.
“뭐라? 교 경이 시정에서 채소를 팔아야 할 정도로 사정이 곤궁해졌단 말인가? 설마 조정의 간신배가 그대를 겁박한 것인가? 짐은 분명 오랜 세월 바다를 떠돈 경의 노고를 헤아려 집에서 잠시 휴식하라 명했을 뿐이네. 지금까지도 경이 계속 조정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찌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인가?”
황제가 정말로 몰랐던 것이든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든, 교용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일개 서민인 그가 대단한 선장을 안다고 하여 감히 황제에게 불충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에 그는 신중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로 황제의 관심에 황송해했다.
“폐하께서 저 같은 죄인에게 이토록 세심히 관심을 기울여 주시다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저를 음해한 것이 아니라, 제가 거느리던 형제 같은 사람들을 볼 낯이 없어 제가 스스로 가산을 판 것입니다. 그들의 사정이 좋지 못해,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베풀어주고자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낼 정도는 되니 심려치 마십시오. 채소를 파는 것도 그저 하릴없이 지내는 것보단 무슨 일이든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한 것입니다.”
황제는 그 말에 더욱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느리던 이들을 볼 낯이 없다니, 교 경, 짐에게 자세히 말해보게.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구휼금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설마 누군가 제 주머니를 채운 것인가?”
황제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스쳐 지나가며 황제가 곁에 서 있던 시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위가 즉시 황제의 말뜻을 알아듣고 포권하며 예를 올렸다.
“폐하와 교 대인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신이 지금 바로 가서 조사해보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시위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 자리를 빠져나온 다음, 경공을 운용하여 재빨리 천사처를 벗어났다. 그로서는 정말로 누군가 도중에서 제 주머니를 채운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그것이 황제의 뜻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반드시 누군가 교용의 부하에게 갈 돈을 가로챈 것이어야만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는 결코 실수할 리 없기 때문이다.
시위가 떠나자 황제는 깊이 탄식하며 다시 온화한 얼굴로 교용을 향해 말했다.
“이런, 교 경이 그간 고생이 많았겠군. 자, 다시 천천히 말해보게!”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교용은 감히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자리에 꼿꼿이 앉아 자세히 이야기했다.
그들이 앉은 뜰의 나무 위에는 종이학이 앉아 있었다. 종이학은 내내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위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기도 했다.
* * *
천사처의 대전 안에서는 국사와 다른 천사처 수사들이 계연의 손짓 한 번에 황제를 비롯한 이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이들에게 불경하다는 죄를 물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이 두 사람처럼 대단한 실력의 고인(高人)들은 아마 그다지 거리끼는 것이 없을 것이었다. 속세의 고관대작이나 황제는 물론이고, 요괴와 마귀, 온갖 이매망량(魑魅魍魎)도 그들에게는 조금의 영향도 끼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교 대인께 듣기로, 계 선생님께서 저를 만나고자 하셨다고요. 오늘 두 분 선장께서 이곳에 걸음 하셨으니, 혹 무슨 특별한 분부가 있으십니까?”
문옥통은 계연이 그들을 대신해 선하도에 말을 전해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꺼내지도 않았다. 물론 황제는 그쪽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테지만 말이다.
“하하, 그리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실은 오늘 일을 크게 벌인 것도, 교용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제가 그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니까요. 오늘 국사를 찾아온 이유는…….”
계연의 말에 노염생도 귀를 쫑긋 세웠다. 이곳에 오기 전 자신이 물을 때마다 계연이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설마 나도 여기서 쫓아내진 않겠지!’
계연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마침내 운을 뗐다.
“일전에 국사께서는 선악(善惡)과 정사(正邪)를 구별할 수 있는 옥패를 교용에게 건네셨었지요. 아직 기억하시죠?”
그러자 문옥통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것은 해치(獬豸) 옥패였습니다. 선단을 이끄는 이들이 길흉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하는 용도였습니다. 삿된 것을 만나면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고, 길한 것을 발견하면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말입니다.”
“으음.”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이 세계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요괴가 되었고, 각종 신기한 정괴가 탄생하기도 했으며 용도 있었고 봉황도 있고 신령도 있었다. 그러니 정말로 특별한 신수(神獸)가 있다고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계연은 용과 봉황을 제외하면 신수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 둘도 실은 용 쪽이 훨씬 많고, 봉황에 대한 것은 잘 몰랐다.
해치는 무척 상징적인 신수였다. 계연은 다른 사람의 입으로, 지난 생에 자신이 알던 상상 속의 동물과 같은 의미와 이름을 지닌 존재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그럼 국사께서는 그 법기(法器)를 어떻게 얻게 되신 건가요? 또 해치에 대해 잘 아시나요?”
“해치?”
노염생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연이 저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무척 대단한 존재인 듯했다.
그러자 국사는 계연과 노염생을 향해 살짝 예를 올린 후, 오른쪽 소매 안으로 손을 넣어 건곤납물술을 이용해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보아하니 글자가 아니라 그림인 듯했다.
“보십시오, 선장!”
문옥통이 계연과 노염생에게 다가가 1척(약 30cm) 길이의 두루마리를 펼치자 안에는 계연의 예상대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루마리 안에는 위엄 넘치는 맹수가 그려져 있었는데, 온몸은 빽빽한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고 두 눈은 또렷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마에는 커다란 뿔이 돋아나 있고, 사지는 굵고 단단했으며 갈고리 같은 발톱은 날카로워 보였다. 꼬리는 짧고 몸통은 굵었으며, 입은 크고 이빨이 길었다.
“크르릉…….”
그림이 펼쳐질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두루마리가 완전히 펼쳐지자 그림 속의 맹수가 살아나더니 화폭 바깥을 향해 포효했다. 좌우로 몸을 움직이는 맹수는 마치 바깥으로 나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화폭 안에 담겼을 뿐인데도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크릉……!”
노염생과 게연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연은 흥분감에 휩싸였기 때문이었고, 노염생은 화폭에 담긴 맹수의 기세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요수(妖獸)입니까? 어찌 이 늙은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대체 이것이 무엇입니까? 계 선생님은 아십니까?”
국사는 양팔로 두루마리를 꽉 잡고 온몸의 법력을 운용했다. 아마 이 화폭은 펼친 것만으로 끝이 아닌 듯했다. 계연은 두루마리 앞으로 다가가 그림을 관찰하며 대답했다.
“이건 해치예요. 해태라고도 하죠. 인간의 말을 하고 우리와 같은 감정을 지닌 데다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상고(*上古: 아주 오랜 옛날) 적의 신수예요.”
문옥통은 원래 계연이 동해에서 이 옥패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대답하는 걸 들으니, 자기보다 훨씬 이 화폭에 담긴 신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해태라는 별칭은 그 자신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