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장생주(長生酒)를 남기고 가다
반 시진(1시간) 후, 황궁의 어서방에는 황제와 노태감 공순, 그리고 교용과 국사 문옥통 네 사람이 모여 있었다.
황제는 계연이 남기고 간 서신을 세 번이나 읽은 뒤, 자신이 빼먹은 부분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내려놓았다.
“휴우, 계 선장과 노 선장께서 인사도 없이 떠나셨군. 비록 계 선장께서 선하도에 말을 전해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선하도의 선장께서는 또 어떤 반응일지……. 그리고 이 선주도……. 국사, 어찌 보는가?”
황제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선주는 물론 좋은 물건이지만, 그는 이미 선주를 마셔본 적이 있었다. 국사가 술법을 부려 영기를 술 안에 녹여, 속세의 명주를 선주로 바꿔버린 것이다. 마셔보니 몸이 따뜻하고 좋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문옥통은 작은 옥병을 쳐다보고 있다가 황제의 말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얼른 설명을 시작했다.
“폐하. 선하도에 관해서는 신도 감히 확언할 수 없으나, 계 선장께서 나서신 일이니 어느 정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술은 진정한 선주로, 신이 술법으로 영기를 불어넣어 만든 조잡한 선주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진정한 선주는 재료를 고르는 단계부터 빚고 숙성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모두 독특한 묘법(妙法)이라 일컬을 만합니다. 단약을 제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지요…….”
문옥통은 이렇게 말하며 작은 병의 마개를 조심스럽게 뽑았다.
그러자 용연향의 독특한 향기가 퍼져나가며 실내에 자리한 이들은 벌써부터 몽롱하게 취하는 듯했다.
“더군다나…… 계 선장께서는 이 술을 일컬어 강물과 일대 물길을 다스리는 왕을 세심히 제련하여 만든 선주라고 표현하셨지요. 폐하, 계 선장께서는 왕이라고 하셨지, 신하라고는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에 차이가 있소?”
황제가 옥병에 손을 뻗으며 약간의 긴장과 기대를 담아 물었다.
“물론 차이가 있지요……. 엄청난 차이입니다…….”
문옥통은 조심스럽게 옥병을 황제에게 건넨 뒤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물을 다스리는 존재 중에는 용족을 최고로 칩니다. 그러니 감히 강물과 물길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자는 진룡뿐입니다! 폐하, 이 술은 진룡이 직접 제련한 용연향입니다! 이것은 다른 진룡이 보더라도 군침을 흘릴 만한 물건입니다! 진정한 장생(長生)의 술이지요!”
이에 나이 든 황제가 경악한 표정으로 작은 옥병을 세게 그러쥐었다. 그는 단번에 마셔버리고픈 충동을 억누르고 이렇게 물었다.
“국사, 이 술을 마시는 데에 따로 주의사항이 있는가? 짐이 곧바로 마신다고 해도 약효가 낭비되거나 하진 않겠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계 선장께서도 따로 당부의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 곧바로 음용하시면 될 듯합니다. 혹, 혹시 소신이 연구할 수 있도록 아주 약간만이라도 남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많이도 필요 없고, 몇 방울이면 충분합니다!”
황제는 더는 참지 않고 국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곧장 옥병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올려 병 안의 액체를 마시기 시작했다. 곧바로 방 안에 농밀한 주향(酒香)이 퍼져나갔다.
꿀꺽, 꿀꺽…….
이를 지켜보던 교용과 공순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고, 문옥통마저 목구멍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이 들어가자 황제는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뱃속까지 내려가더니 곧이어 사지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근육과 뼈가 뜨거워졌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았고 오히려 무척 편안한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황제의 눈앞이 흐려지더니 현기증이 일기 시작했다.
“좋은…… 술이로다…….”
용연향의 취기가 오르자 황제는 이 한마디를 겨우 내뱉고 두어 번 비틀대더니 한쪽으로 쓰러졌다.
“폐하!”
교용과 노태감이 얼른 나서 좌우로 쓰러진 황제를 부축했다. 반면 문옥통은 황제의 손에서 떨어지던 작은 옥병을 잡아챘다.
하지만 병 안을 자세히 보던 문옥통은 곧 나직이 한숨을 내뱉었다. 몇 방울은커녕 잔향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옥통은 얼른 마개를 다시 끼워 용연향의 잔향이 날아가는 것을 막았다.
“국사 대인, 폐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노태감이 걱정 어린 기색으로 묻자 문옥통이 웃으며 대답했다.
“술기운이 올라 취하신 것뿐이니, 별일은 없을 것이오. 폐하를 침궁에 모셔다드리시오. 짧으면 하루, 길면 3, 5일 내에는 반드시 깨어나실 것이오.”
“예!”
노태감과 교용은 그제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 * *
계연과 노염생이 떠난 것은 도사연이 깨어난 것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법보를 제련하기에는 교씨 집안의 후원이 적당한 장소가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가장 적당한 곳은 구봉산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그전에 파자산에 한번 들르기로 했다. 도사연이 깨어났다는 낌새는 아직 없었지만, 그 여우는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나는 길에 한 번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과연 파자산에 다가갈수록 도사연이 깨어났다는 것이 느껴졌다.
계연과 노염생은 곧 파자산에 이르러 여우 요괴를 가둔 큰 산의 봉우리에 내려섰다. 그러자 산 아래쪽에서 금갑 역사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두 사람을 향해 양손을 맞잡고 예를 취한 후 다시 모습을 숨겼다.
계연과 노염생의 감응과 달리 도사연은 두 사람이 이곳에 돌아왔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도사연은 옥호동천의 여우들이 자신이 선인에 의해 갇혔다는 것을 모를 때를 대비해, 외부의 도움 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계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백 년은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 한평생보다도 긴 시간이었고, 이는 여우 요괴에게도 마찬가지로 긴 시간이었다.
게다가 동작을 조금만 크게 해도 곧바로 몸이 짓눌리며 고통에 시달리니, 갇힌 이가 누구라도 이는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고작 며칠뿐이었지만 도사연은 얼른 이 산 아래에서 벗어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도사연은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방법이 있어, 분명 있을 거야. 특히 산신은 다루기가 쉬워 보였어. 하지만 신장(神將) 쪽은 나와 말을 섞으려 하지도 않고, 표정도 드러내지 않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산신도 그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데다가, 어떻게 해도 뜻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정말 골치가 아프군……. 아니면 계연과 늙은 거지에게 빌어볼까? 그들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야. 정말로 나를 여기에 백 년 동안 방임할 리가 없어.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 아, 어르신의 머리카락을 계연에게 뺏기다니……. 그것만 있었어도 이런 상황은 아니었을 텐데……!’
도사연은 이전의 일을 떠올리며 고뇌에 차 있었다. 그 늙은 거지와 맞붙을 때 머리카락 쓰지 말고 조금만 참을걸. 자신이 그 비렁뱅이 놈을 얕잡아 본 게 문제였다.
‘아니지! 아예 처음부터 계연이 짠 덫이니, 내가 얕잡아보든 말든 아무 관계가 없었을 거야.’
산 정상에 서 있는 계연과 노염생은 마치 산 아래쪽의 도사연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과연 깨어났군요, 역시 팔미호입니다. 보통 요괴처럼 취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계 선생님, 어서 내려가 저 요괴를 만나봅시다. 구봉산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아 계속 의견도 나눠봐야 하고, 적당한 토 속성의 영물도 찾아야 하는 데다, 오행의 영물을 각기 제련도 해야 하니 할 일이 많습니다!”
계연은 잔뜩 흥분한 노염생을 바라보며 대체 자신이 법보를 제련하는 것인지, 노염생이 법보를 제련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내려가보죠.”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마치 떨어지는 낙엽처럼 천천히 아래로 내려섰다. 그가 내려선 곳은 산에 뚫린 작은 틈 바로 앞이었다.
산신 석유도는 쭉 이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계연과 노염생이 도착한 것을 알고서 얼른 나타나 예를 올린 뒤 물러났다. 신장 대인이 이렇게 하고 물러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도 행여 두 선장을 귀찮게 할까 봐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은 것이다.
“도 낭자, 일어났습니까?”
돌연 계연의 목소리가 들리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도사연이 놀라 펄쩍 뛰었다. 하지만 도사연은 재빨리 냉정을 되찾고는 특유의 요염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이렇게 큰 산이 짓누르니 다진 고기가 되게 생겼는데 어떻게 깨어나지 않겠어요? 선생께서도 정말 마음이 모지시군요, 그 일검(一劍)에 저는 정말 뼛속 깊이 아팠는데…….”
이렇게 말하는 도사연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더욱 애절해졌다. 하지만 계연과 노염생은 가만히 미소 띤 채로 도사연을 바라볼 뿐 그 이상의 반응은 하지 않았다.
계연은 이곳에 오기 전에 자신이 아는 도사연의 모든 것과 대정국에서 마주쳤었던 옥호동천에서 온 것으로 의심되는 또 다른 여우 요괴에 대해, 노염생에게 말해주었다.
노염생은 계연의 말을 듣고서 도사연과 계연의 관계가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도사연을 계연의 적이라고 부르기에는 도사연에게 계연의 적이 될 만한 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흥! 도를 닦은 진선(眞仙)이라더니, 심장이 꼭 돌덩이 같군요. 묻고 싶은 것이나 어서 물어보세요. 놓아준다고 약속만 하면, 아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그러자 노염생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계 선생께서 물으실 것이고, 이 산은 이 늙은이가 남긴 것이지. 선생께서 묻는 건 묻는 거고, 산의 봉인은 나한테 달려있으니 곧바로 놓아줄 수는 없겠구나. 하지만 만약 계 선생께서도 동의하신다면, 백 년이 아니라 일 갑자(甲子: 60년)로 줄여주마. 어떠냐?”
“뭐어? 이 늙은이가 감히!”
도사연이 분통을 터뜨렸다.
“자, 그럼 이제 묻겠습니다. 일전에 대정국에서 왜 소씨 가문의 공자에게 그토록 악독한 부적을 주었습니까? 만약 그 부적을 그대로 놔뒀다면, 대정국에 커다란 혼란이 일 것임을 알고 있지 않았나요?”
도사연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인 후 느릿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 그 나이 어린 연인 말씀이시군요. 선생께서 말씀하셔서 생각해 보니 겨우 생각이 나는군요. 신첩은 그저 그들의 깊은 사랑에 감동하여 도와준 것뿐입니다. 부적에 관해서는, 아무래도 선생께서 조금 과장을 하신 듯하군요? 그게 그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닐 텐데요…… 설령 혼란이 일었다 해도, 그것은 신첩이 좋은 마음으로 벌인 일에 나쁜 결과가 생긴 것뿐이지요. 어쨌든 제 동기는 선했으니까요. 게다가 신첩은 일부러 그 여인을 대신해 청루(靑樓)의 놀잇배에서 손님들을 상대하기도 했었지요, 만약…….”
도사연은 여기까지 말한 뒤 일부러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날 계 선생님을 만나지도 못했겠지요. 비록 하룻밤일 뿐이었지만, 저는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답니다.”
노염생은 그 말에 계연을 슬쩍 쳐다보았다. 계연은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알고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저번에도, 그 인간들이 여우들을 먼저 공격했었지요. 최소한 제가 본 광경은 그러했습니다. 이에 순식간에 노기가 일어 제가 조금 과한 수단을 쓴 듯합니다. 만약 두 분 선장께서 그 일로 화가 나셨다면, 신첩이 지금 당장 사죄드리지요.”
그러자 계연이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도 낭자는 정말 말도 번지르르하게 하는군요, 모르는 척은 그만하시지요. 당신은 감히 신령을 빙자하여 소씨 가문의 공자를 속여넘긴 뒤 악독한 부적을 남겼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의지가 약해 그 부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다행히 그것은 이제 통천강 강신이 직접 거둬갔지만, 만약 보통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피가 다 빨렸을 겁니다. 게다가 당신은 청루의 여인으로 모습을 바꿔 사람들의 원기(元氣)를 빨아먹고, 제 넝쿨검을 훔치려고까지 했었지요. 게다가 조월국에서 만난 여우가 보자마자 나를 알아보는 것을 보니, 당신이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더군요. 옥호동천은 멀리 서역의 남주에 있는데, 대정국 같은 변두리에서 옥호동천의 여우를 두 마리나 마주치다니……. 당신들 옥호동천은 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