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법보가 상서로움을 드러내다
다음 날 아침, 폭우가 멎은 하늘은 구름 없이 파랬다. 깊은 산속에서 터져 나온 홍수와 산사태로 산간 마을이 재해를 입었다. 무너진 건물도 꽤 많았지만, 다행히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고작해야 몇몇이 감기에 걸린 것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길고 길었던 두려움에서 마침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노인과 아이들은 무너지지 않은 건물로 옮겨졌고, 부녀들은 함께 모여 마을 사람들이 먹을 식사와 감기에 걸린 이들을 위한 생강탕을 준비했다. 사냥꾼들은 혹 누군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이가 있는지 확인하러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체격이 좋은 촌장은 활을 등에 지고 창을 든 채로 젊은이들과 함께 마을을 살폈다. 그러다 그들은 쓰러진 건물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다가가 확인했다.
“너희들, 건물 안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봐라.”
“제가 가서 볼게요!”
촌장의 곁에 서 있던 그의 큰아들이 즉시 달려가 문틈으로 안쪽을 살폈다.
“아버지, 안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러자 어느 젊은이가 서둘러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촌장 어른, 여긴 제 둘째 숙부 집입니다. 숙부님 가족은 모두 마을 저쪽에 있습니다. 다들 괜찮으세요.”
“아, 잘되었구나! 참, 저쪽도 살폈느냐?”
“살폈어요, 전부 아무도…… 아무…… 엣취! 아무도 없어요, 에취…….”
그러자 촌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서 가서 생강탕이나 한 그릇 마시거라. 휴우, 재해가 일어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산신께서 보우하신 모양인지 마을 사람들은 무탈하구나. 참, 가서 산신당도 살펴보자!”
“아버지, 설마하니 산신당에 무슨 일이 있으려고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네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결국 촌장을 따라 산신당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 마을은 이미 파자산 외곽 쪽에 자리해있었지만, 산신당은 지나는 이들이 참배하기 편하도록 그보다 더 바깥쪽, 산길 근처에 세워져 있었다.
산신당은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았지만, 어젯밤의 홍수로 일어난 산사태 때문에 가는 길목마다 나무가 부러지고 돌멩이들이 쏟아져 내려온 상태였다. 이에 더해 산길이 전부 진흙탕이 되어 반각(7~8분)이면 도착할 거리가 이각(30분)이나 걸렸다.
“아버지, 보세요, 산신당은 멀쩡하잖아요!”
“음, 그래. 어서 가서 산신께 절을 올리자. 산에 사는 맹수들을 위로해, 깊은 산에서 튀어나와 사람들을 해치지 않도록 말이다.”
“예!”
산에 사는 백성들은 원래부터 미신을 믿었고, 게다가 이곳 산신은 확실히 존재하는 신령이기도 했다. 산신당은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거의 형태만 잡힌 상태였다. 주칠(朱漆)할 재료나 안에 놓일 물건들은 아직도 관아에서 실어와야 했다. 하지만 산간 마을의 백성들은 거의 매일 산신당에 와 절을 올렸다.
산신당의 문은 살짝 열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촌장의 아들은 가볍게 밀어젖혔다.
‘끼익’ 소리와 함께 산신당 문이 열리자, 그 안에 펼쳐진 광경에 모든 이들이 놀라 펄쩍 뛰었다.
“허억!”
“산신 어른!”
“어찌, 어찌 이런 일이!”
그들은 너무 놀라 산신당 안쪽을 향해 끊임없이 절을 올렸다. 안쪽에 있던 산신상은 이미 부서져 있었고, 신상의 머리는 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다.
이곳은 새로 지은 신당이었으므로, 신상도 마찬가지로 새것이었다. 그런 신상이 훼손되자 마을의 백성들은 엄청난 두려움에 휩싸였고, 이들은 곧바로 관아에 사람을 보내 이 일을 보고했다.
그러자 대수국 천사처에서는 곧바로 조사할 관리를 파견해왔다. 곧이어 천사처에서 파견된 관리들은 산신상만 부서진 게 아니라, 산신조차 종적을 알 수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딘가에 숨은 것일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은 것일 수도 있었지만, 산신상의 상태를 보건대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컸다.
대수국 천사처는 한가롭게 놀고먹거나, 위험이 닥치면 즉시 내뺄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었다. 천사처는 대수국 황실과 공존하는 단체였다. 게다가 천사처에 부여된 책임도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두렵더라도 변영부 천사처에서는 이를 악물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이 일을 조사해야만 했다. 따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이 일은 산에 있던 봉인과 관계된 것이 분명했다.
반나절을 돌아다닌 끝에, 천사처 관리들은 거대한 원숭이의 반쪽만 남은 사체를 발견했다. 사체에서는 짙은 요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이미 살기가 모여들어 장독(*瘴毒: 독을 품은 더러운 기운)으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이는 이 거대한 원숭이가 결코 만만한 요괴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선량한 성품을 지닌 요괴일 리도 없었다. 요괴의 사체는 너무 컸고 위험한 기운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관리들이 손쓰지 않는다면 결국 사체가 장독으로 변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무언가 삿된 존재가 생겨날 수도 있었고, 근처를 지나는 백성이 그 기운을 흡입해 중병에 걸릴 수도 있었다.
천사처 관리들은 주사(*朱砂: 수은과 황의 화합물로 염료나 약에 쓰임) 가루와 부적을 태워 요괴의 시체에 불을 붙였다. 그런 후에 다섯 명의 수사들이 한참 동안 법력을 펼친 끝에 요괴의 사체를 완전히 태울 수 있었다. 그리고는 다시 반나절 후, 관리들은 요괴 사체의 다른 반쪽을 찾아내 조금 전과 같이 태워버렸다.
그런 후에야 다섯 명의 천사처 수사들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은 마침내 도사연을 가뒀던 산 근처에 도착했다. 육안으로만 보면 이곳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수사들은 직감을 통해 이곳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해냈다.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 일어났군. 고인(高人)이 남긴 봉인이 깨지다니…….”
“그 요물도 분명 도망쳤겠지요?”
수사들은 눈썹을 찡그린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봉우리 곳곳이 무너져 내린 흔적이 보였다.
“이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던 흔적이오. 그 원숭이 요괴도 저 근처에서 죽은 게 분명하오. 산신은 아마 죽은 것 같구려.”
“그럼 금갑 신장께서는……?”
“그야 모르지, 어쩌면 신장도…… 어쨌든 이곳은 오래 머물 만한 곳이 아니니, 어서 천사처로 돌아갑시다!”
“그럽시다. 참, 아무래도 산간 마을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것이 좋겠소. 마을이 산 외곽에 있긴 하지만,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
그들을 따르던 병사들은 이 말을 듣자, 언제든 요괴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들려 온몸의 털이 오소소 일어나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 사태로 인해 대수국 변영부는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그들은 후에 도성에서 전해진 소식으로부터 봉인을 남긴 그 고인이 무척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요괴가 어디로 도망갔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으므로, 부디 대수국 어딘가만은 아니기를 기도했다.
* * *
대수국이 긴장에 휩싸여 있을 때, 구봉산의 선래봉에서는 봉인이 부서진 것을 느낀 노염생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계연을 비롯한 이들이 온 정신을 집중해 법력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얼른 정신을 다잡고 제련에 집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모아 조금씩 불가능해 보였던 난관을 돌파하고 있었다. 그간 법보를 제련하며 얻은 깨달음만으로 대단한 책 한 편을 엮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음양오행은 천천히 금사 끈에 섞이고 있었고, 이제 남은 것은 법보를 세심하게 제련하는 것뿐이었다. 삼매진화의 불길과 다섯 사람의 법력 아래, 드디어 모든 것이 완벽한 궤도에 올라섰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짧으면 3년에서 5년, 길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었다.
선유대회는 그해 음력 섣달그믐에 끝이 났다. 하지만 끝난 것은 천도봉에서 열린 대회였고, 수선자들의 마음속 선유대회는 아직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래봉의 고인들이 아직 밖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회가 이미 끝난 후에도 반절이나 되는 수선자들이 떠나지 않고 구봉산에 남았다. 비록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래봉에서 나올 결과를 보고 싶었기 때문에 급한 일이 없는 이들은 모두 그대로 머물렀다.
* * *
그로부터 마침내 계묘년(癸卯年) 경칩(*驚蟄: 24절기의 하나. 양력 3월 5일경으로, 겨울잠을 자던 벌레나 개구리 따위가 깨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는 시기), 선유대회가 끝난 지 6년째 되는 봄에 선래봉 위로 무궁무진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을빛 여러 갈래가 하늘로 솟구치며, 은은한 도음(道音)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구봉산 곳곳에서는 도행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든 수선자가 무언가를 감지하고는 선래봉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떤 위치에서는 선래봉이 잘 보였으나, 어떤 위치에서는 다른 봉우리에 막혀 선래봉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구봉산 어느 곳에서나 하늘로 솟구치는 노을빛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상공으로 쏘아 올려진 노을처럼 보였다. 금(金)을 상징하는 하얀 색, 물(水)을 상징하는 검은 색, 나무(木)를 상징하는 청색, 불(火)을 상징하는 붉은 색, 땅(土)을 상징하는 노란 색 등 갖가지 색으로 변화했다. 음양을 상징하는 검은 색과 하얀색도 어우러져, 빛은 마침에 상공에 자리한 일곱 가지 색채의 상서로운 구름이 되었다.
뒤이어 구봉산에는 선음(仙音)이 울려 퍼졌다. 귀 기울여 들으면 이는 바람 소리와 비슷했으나 집중하지 않을 때는 마치 누군가 비파와 퉁소를 연주하는 것처럼 들렸다.
선래봉은 갖가지 상서로운 빛에 뒤덮여 구봉산 어디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구봉산에서 6년간 소식을 기다리던 옥회산 수선자들도 숙소를 나와 선래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청년이 다 된 위원생은 감격한 얼굴로 구풍을 향해 물었다.
“스승님, 법보가 제련된 건가요? 계 선생님과 거 진인께서도 드디어 나오시겠군요! 저희도 곧 옥회산으로 돌아가겠지요?”
“그래, 법보가 완성된 듯하구나!”
사실 구풍을 포함한 옥회산 수선자들은 법보의 제련이 실패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법보를 제련하는 다섯 사람 중 아무나 골라잡아도 능력이 대단한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축하드립니다, 옥회산 도우분들!”
누군가 웃으며 이렇게 인사하자, 양명도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축하드립니다! 노 진인께서도 곧 나오시겠군요!”
십여 명의 옥회산 수선자들 곁에는 건원종의 세 수선자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지난 6년간 옥회산 일행과 이웃처럼 지내왔다.
건원종의 세 수선자들 중에는 예전에 대풍곡 수선자들과 바다 위에서 싸웠던 노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행만으로 따지자면 이 노수사의 실력은 이 자리의 모든 이를 합친 것보다 강했다. 그는 선래봉을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저 법보의 기운이 심상치 않군요. 지금은 구봉산 선문의 금제가 걸려있고, 동천 안에 있어 이 정도이지만, 만약 바깥으로 나간다면 반드시 천겁(天劫)을 불러올 겁니다.”
“글쎄요!”
그 목소리에 옥회산과 건원종 수선자들이 몸을 돌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구봉산 장교를 향해 예를 올렸다.
“조 장교를 뵙습니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들이시니 어서 예를 거두시지요.”
구봉산 장교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선래봉을 향해 돌렸다.
“법보의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상서로운 조짐을 드러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늘의 변화를 불러올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겁’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겁이란 고통과 위험을 견뎌야 하는 것이지만, 저 법보에게 내리는 것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의식적인 성격을 띤 길조(*天瑞: 천서,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움)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구봉산 장교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듣는 이들은 그의 말에 몹시 흡족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