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29화 (529/892)

529화. 견식이 짧네

“과연 계 선생이군, 때로는 정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소!”

늙은 용이 이렇게 감탄하자, 곁에 있던 노염생도 깊이 그 말에 공감했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거원자는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고, 축청도는 계연을 다시 한번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계 선생은 신비한 구석이 많았다.

계연은 늙은 용이 속으로 ‘정말 계연답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모르고 웃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하하. 어쨌든 그 감각을 잊기 전에 얼른 적어놔야겠어요.”

그는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그 말에서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석유도가 다시 수행을 닦을 수 있게 된 것에는 교묘한 기연이 섞여 있긴 했지만, 그래도 계연은 자신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 노래에는 천경검세의 날카로움도 삼매진화의 사나운 열기도 없었지만, 대신 다른 방면의 성취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생각 한 번에 깨달음을 얻은 일념오도(一念悟道)의 경지에 다다랐던 그 순간은 앞으로의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는 석유도의 기연(*機緣: 기회와 인연)인 동시에 계연의 기연이기도 했다.

늙은 용을 비롯한 이들은 모두 수행을 오래 닦은 고인이었으므로, 당연히 그에 대해 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계연 스스로도 즉흥적으로 떠오른 것이라 설명했고, <정덕보공록>에 관해서는 물론 궁금하긴 했지만, 이 이상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구봉산을 향해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계연과 노염생을 제외한 세 사람은 법보를 제련할 때 일어난 변고가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함께 파자산에 간 것이었을 뿐, 이제는 정말로 헤어져야 할 때였다.

도사연과 다른 요마들은 일찍이 종적을 찾을 수도 없이 도망친 뒤였다. 그에 더해 지금은 필시 갖은 수를 써서 흔적을 숨기고 있을 터이므로, 노염생 같은 이들이 아무리 점을 쳐봐도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없었다.

계연을 비롯한 다섯 사람이 크게 바쁜 이들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 제쳐놓고 도사연만 찾으러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늙은 용의 말을 빌리자면 도사연에게 ‘아직 그 정도 자격은 없었다’. 모두는 그저 나중을 위해 이 일을 기억해둘 뿐이었다.

* * *

3일 후, 구봉산이 관할하는 완산 나루터에서는 옥회산 수선자들이 비행선에 오르고 있었다. 그들을 이끄는 거원자부터 구풍, 양명 등의 진인, 그리고 위원생 같은 제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짐이 없었으나 오직 계연만이 없었다.

“거 진인, 계 선생님께서는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위원생의 물음에 거원자가 구봉 동천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글쎄다. 그동안의 깨달음을 천서로 엮는다지만, 계 선생님 정도의 실력에다 이미 경험도 한 번 있으시니,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럼 왜 계 선생님이 다 쓸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가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구풍이 웃으며 대꾸했다.

“나한테 허구한 날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한 게 누구지? 게다가 선유대회가 끝나서 각 선문의 계역 나룻배가 운행하는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단다. 이번에 가지 않으면 앞으로 일 년 반은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 또한 우리가 여기 남아있다고 계 선생님께 무슨 도움이 되지는 않을 테니, 차라리 조용히 책을 쓰시도록 떠나는 게 더 낫다.”

구풍의 말은 사실 그대로였다.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바로 이 완산 나루터였다. 선유대회가 끝나자 전보다 확연히 썰렁해졌기 때문이다.

그 말에 위원생이 겸연쩍은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위원생은 총명했지만 어려서부터 선문에서 자라 아직도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구봉산에서 보낸 6년은 정말로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으므로, 그저 위원생은 ‘네’하고 고분고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돛을 올리고 출발하겠습니다!”

멀찍이서 구봉산 수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비행선이 천천히 상공으로 떠올랐다. 승객들은 더는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점점 작아지는 완산 나루터와 저 멀리 아홉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구름 위를 얼마간 비행하던 중, 위원생이 돌연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거원자에게 물었다.

“거 진인, 중평휴라는 분은 대체 누구신가요? 왜 계 선생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토록 놀라고 기뻐하신 거죠?”

그 물음에는 거원자도 답할 말이 없었다. 실은 중평휴라는 사람은 물론이고, 무량산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리 유명한 이름은 아닌 듯했다.

“실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계 선생님께서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 걸 보니, 대단한 인물임이 분명하겠지. 게다가 선문의 이름을 감히 무량(*無量: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는 뜻으로 한계가 없는 완전성을 이르는 말)산으로 붙인 것을 보니, 그곳도 분명 범상치 않은 곳일 것이다.”

그렇게 대답한 거원자는 잠시 먼곳을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객사로 돌아갔다. 비록 천서는 계연이 쓰고 있었지만, 법보를 제련한 다섯 사람 모두 6년 동안 얻은 소득이 적지 않았다. 이에 그는 얼른 옥회산 옥주봉으로 돌아가 수행에 정진하고 싶었다.

떠난 것은 옥회산 이들만이 아니었는데, 이 중에는 노염생을 비롯해 축청도를 포함한 선하도 수선자들도 있었다. 선문에서 그리 편안하지 못했던 늙은 용도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떠나갔다.

선하도 수선자들은 계연의 부탁을 받아, 특별히 대수국 도성으로 진인 두 사람을 보내어 최근 얼굴에 윤이 나고 혈색이 도는 황제를 방문하게끔 했다.

황제의 이런 모습을 본 선하도의 진인들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들은 수리가 완벽히 끝난 도성의 천사처에서 황제와 몇 마디 나눈 뒤 곧바로 떠나버렸다.

대화는 대략 이러했다.

우리가 비록 계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 당신을 보러 왔으나, 이게 어디가 다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이냐? 지금 이 상태라면 백 살은 거뜬히 살 듯하고, 이는 역대 대수국 황제 중에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사람이라면 무릇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일이 끝나고 현재 구봉산에 남은 것은 계연뿐이었다. 그가 머무는 곳은 여전히 선래봉의 운하원이었다. 이곳은 6년간 법보를 제련하고 도를 논했던 장소였으므로, 사람은 흩어졌으나 그 심오한 도는 아직 남아있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글을 쓰면 ‘적은 노력으로도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事半功倍)’.

계연은 서둘러 글을 쓰려고 하지 않고, <검의첩>을 꺼내 먹을 갈 준비를 했다.

검의첩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운하원 응접실이 즉시 소란스러워졌다.

“아! 어르신께서 드디어 우리를 내보내 주셨어!”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이게 대체 몇 년이야!”

“6년이야!”

“나도 6년인 거 알아. 감개무량해서 그런 거야!”

“바보, 몰랐잖아!”

“알고 있었어!”

“몰랐잖아!”

“알고 있었다고! 바보는 너야!”

“제발 싸우지 마, 나 배가 너무 고파…….”

“어르신, 저희 금향묵을 먹고 싶어요.”

“맞아, 맞아. 어르신, 부탁드려요. 금향묵이 먹고 싶어요!”

날뛰는 작은 글자들을 바라보던 계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에 들린 송연묵을 다시 집어넣고, 소매 안에서 금향묵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작은 글자들이 모두 환호했다.

구봉산 수선자인 임점이 차와 식사를 들고 운하원에 들어서자, 멀찍이서 계연이 먹을 다 갈고 늑대 털로 된 붓으로 무언가를 쓰는 것이 보였다.

임점은 방해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계연이 다시 먹을 묻히려던 순간 얼른 입구로 들어섰다.

“계 선생님, 며칠 동안은 글을 쓰지 않으신다고 해서 식사와 차를 준비해왔습니다. 제가 혹시 선생님을 방해한 건 아닌지요?”

계연은 한번 들은 목소리는 절대로 잊지 않았으므로, 동해에서 일면식이 있었을 뿐인 임점의 목소리도 곧바로 알아들었다.

“방해되지 않았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요. 여기 탁자에 놓아주세요.”

계연은 이렇게 말한 뒤 붓에 먹물을 묻히고 다시 글을 썼다. 하지만 먹물이 글자에 덧입혀져도 이상하게 글씨가 더 또렷해진다거나 새로워진 느낌은 없었다. 이를 지켜보던 임점은 왜인지 저 글자들이 무척 편안해하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곧 그런 감각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계 선생님, 글자가 아직 또렷이 남아있는데 어찌하여 그 위에 글씨를 덧입히시나요?”

그러자 계연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검의첩>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저 사람 정말 너무하잖아, 어르신더러 우리에게 먹물을 입혀주지 말라고 하다니!”

“무례해!”

“맞아, 우리가 몇 년을 기다렸는데!”

“하하하하, 저 사람 표정 좀 봐!”

“하하하하, 놀라서 넋이 나갔네!”

“저 사람은 글자가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없나 봐.”

“선유대회를 개최하면 뭐 해, 견식이 그렇게 짧은걸!”

“킥킥킥…….”

“하하하하……!”

결국 계연이 글자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조용!”

그러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임점은 그 자신이 수선자임에도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귀를 문질렀다. 다시 <검의첩>을 바라보자 이제는 어떤 특이한 점도 느껴지지 않아,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선문 안인데다 어떤 술법에 당한 것도 아닌 상태였으므로 착각이었을 리가 없었다.

계연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검의첩을 쳐다보는 임점의 두 눈에 법광이 흐르는 것을 보고, 그가 법안을 열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명백히 드러나듯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계 선생님, 저, 저 위의 글자가…….”

계연은 왼손으로 오른쪽 소매를 잘 붙잡고서 붓에 먹물을 묻힌 뒤 다시 세심히 글을 따라 썼다. 그리고는 평온한 얼굴과 어조로 이렇게 설명했다.

“세간에 정괴가 얼마나 많은데요. 이 글자들도 보통 정괴들과 다를 바 없어요. 그러니 임 도우도 그리 놀라실 필요 없어요.”

세상에 다양한 정괴가 존재하는 건 수행자들이라면 모두 아는 상식이었다. 또한 그림이었다가 영지를 얻어 정괴가 된 이들에 대해서도 임점은 들어도 보았고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서첩(書帖)이, 그것도 각 글자가 하나씩 말싸움도 능할 정도의 정괴가 되었다는 것은 듣지도 못한 일이었다.

계연이 그렇게 말하니 임점도 크게 소란을 떤 것이 겸연쩍어졌다. 하지만 호기심은 어떻게 해도 억누를 수가 없는 데다, 임점은 계연의 성격이 온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선생님께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군요.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수행을 닦아오면서, 각각의 글자가 정괴가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들은 정말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인가요?”

임점은 자신이 이렇게 묻자, 계연이 먹물을 덧입히고 있는 글자를 제외한 두루마리 위의 모든 글자가 몸을 반 정도 일으킨 채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백여 명 이상의 정괴들이 자신을 주시하는 감각이었다.

계연이 붓끝을 다른 글자를 향해 옮기자, 글자들은 다시 종이 위에 가만히 ‘누웠다’. 그러자 임점은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시선이 단번에 거둬진 것을 느꼈고, 두루마리는 다시 보통의 서첩처럼 보였다.

“하하, 그런 셈이에요. 그래서 때로는 무척 소란스러울 때도 있어요.”

그 말과 동시에 첫 번째 ‘먹물 입히기’가 끝났고, 금향묵 한 덩이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글자들을 배불리 먹였을 뿐이고, 아직 계연은 글자들에게 몇 번 더 먹물을 칠해주어야 했다.

이에 계연은 먹을 몇 개 더 꺼내 다시 갈기 시작했다. 법력의 영향을 받아 벼루 위의 먹물이 늘어나는 속도는 느렸지만, 먹은 무척 빨리 갈려 금방 사라져 버렸다.

임점은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옆에 서 있었다. 이왕 계 선생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철면피처럼 들러붙어 볼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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