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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530화 (530/892)

530화. 동천 안의 세계

계연은 곁눈질로 임점을 살폈지만, 남에게 보여줄 수 없는 일도 아니니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검의첩 위의 글자들을 향해 가볍게 일렀다.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하거라.”

그는 다시 붓에 먹물을 묻히며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차분히 했다. 그런 뒤 붓을 종이 위에 내려 세심히 먹물을 덧입히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임점은 서첩 위의 글자들에게서 기이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특징 없는 보통의 글자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글자 하나하나에서 영성(靈性)이 드러났다. 이 기이한 감각은 마치 백여 명의 작은 수선자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깨달음을 구하는 장면과 비슷했다.

계연의 붓이 종이에 닿자 글자들이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그가 일필 일획을 써 내려가는 과정은 더는 단순히 먹물을 덧입히는 과정이 아니었다. 이 모습에서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운치가 느껴졌다.

그렇게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먹물을 입힐 때까지는 한 시진(2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물론 시간 대부분은 먹을 가는 데 소요되었다. 두루마리 위의 글자들은 모두 색깔이 선명해지며 광채를 내뿜었고, 이로 인해 검의첩 전체가 희미한 빛무리에 뒤덮였다.

‘저 글자들은 지금 수행을 닦고 있는 거야!’

이는 임점이 자연스레 깨달은 사실로, 임점은 그와 더불어 저 글자들이 계연이 전수하는 정법(正法)을 닦고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계연은 정법을 전수한다기보다는, 이 글자들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글자 정괴들에게 문자에 담긴 도(道)를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임점은 저 글자들이 수행을 닦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마당에,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게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말하자면, 사부가 제자에게 술법을 전수해주는 자리에 외부인이 지켜보고 있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점은 계연을 향해 예를 올린 뒤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계 선생님, 저는 먼저 물러날 테니, 식사를 다 드신 후에는 쟁반을 운하원 바깥쪽에 놓아주시면 됩니다.”

“네, 그럼 멀리 안 나갈게요.”

임점이 떠나자 계연은 붓을 내려놓았다. 글자들에게 먹물을 입혀줬으니 자신도 슬슬 식사할 때였다. 탁자 위의 쟁반에는 가지각색의 따뜻한 요리와 아직도 얼음이 맺힌 찬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고, 술 한 병도 곁들여져 있었다.

“모양은 괜찮은데 양이 너무 적네…….”

계연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그로서는 드물게도 이렇게 불평했다. 많은 수선자가 식사를 할 때 그 맛을 즐기는 데에 중점을 두는 것과 반대로, 계연은 아직도 식사 후에 느껴지는 포만감을 즐겼다. 이 정도 크기의 쟁반에 여덟 가지나 되는 요리가 놓여 있으니, 요리 하나당 주어진 양은 젓가락질 몇 번이면 사라질 정도뿐이었다.

하지만 이를 두고 구봉산을 쩨쩨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양은 적었지만 모든 요리가 보기도 좋고 맛도 좋았으며, 원기와 영기를 품고 있었다.

구봉산이 이토록 정성을 쏟는 데에는, 선유대회를 주관한 선문으로서 그 도량을 선보이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계연과의 관계를 공고히 다지고픈 속셈도 있었다. 또한 그들은 계연 덕분에 선래봉과 같은 확실한 이득을 얻은 뒤였다.

다섯 명의 고인이 제련한 법보는 무척 비범한 물건이었으므로, 그 과정에서 생겨난 기운이 여전히 선래봉에 남아 음양오행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한 선문에 있어 무척 얻기 힘든 진귀한 것이었다.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이런 기연에 구봉산 고인들이 성심을 다해 좋은 술과 요리로 계연을 접대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래봉이 발이 달려 도망갈 것도 아니니, 그곳은 앞으로 도를 깨닫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수행의 성지로 남을 것이었다. 이는 구봉산 수선자들뿐만 아니라, 선유대회에 참석했던 모든 수선자가 알고 있었다.

계연은 술을 한 잔 따라 살짝 맛을 보았다. 술맛이 농후한 데다 영기와 원기를 억지로 불어넣지 않고 제대로 빚어낸 좋은 술이었다. 이에 계연은 미소 지으며 요리를 한 젓가락 집어 맛보았다. 비록 스스로 만든 요리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맛이 무척 뛰어났다.

슬쩍 검의첩을 바라보니 작은 글자들이 모두 수행에 집중하고 있었다. 계연은 술과 요리를 맛보며 이렇게 당부했다.

“너희도 이제 어느 정도 능력이 생겼으니, 이번에는 너희 어르신인 나를 도와 천서(天書)의 천기(*天機: 모든 조화를 꾸미는 하늘의 기밀)를 가려주렴!”

글자들에게 먹물을 덧입혀 준 것은 그들의 수행을 돕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계연 스스로의 수행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글자들과 자신의 능력을 검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자 정괴들은 본래부터 글자에 담긴 도를 펼칠 수 있는 존재였으나, <천지묘법>을 쓸 때는 그들의 능력이 아직 충분치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 쓸 새로운 천서에는 글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 * *

구봉 동천은 외부 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동천 안은 외부와 거의 독립적으로 분리된 세계라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이 동천만의 규칙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마음만 먹는다면, 부분적이나마 천도(*天道: 천지자연의 도리)를 움직일 힘도 있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선계(仙界)였다.

선문이 동천 안에 위치하면 평온함을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광활한 공간에서 각종 진귀하고 기이한 풀과 꽃을 키울 수도 있었다. 도를 깨우치는 데에도 동천의 환경은 큰 도움이 되었고, 동천 안에 사는 평범한 이들 중에서 좋은 인재를 골라 선문에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지만 말이다.

구봉산의 시간은 외부 세계와 같아, 계연이 구봉산에 하루를 머물면 바깥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났다.

하지만 구봉산 아래, 진정한 동천 안쪽의 세계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구봉산에 위치한 선문과 그 아래는 열흘의 차이가 났으므로, 구봉산에서 하루가 지나면 구봉 동천에서는 열흘이 지난 셈이었다.

그래서 계연이 다른 네 사람과 함께 곤선승을 제련하고, 파자산에 갔다가 돌아와 책을 쓰기 시작하는 동안, 구봉산 아래 구봉 동천 안에서는 이미 석 달이 넘게 흐른 뒤였다.

운무(雲霧)가 자욱이 깔린 깊은 산속에는 몇 사람이 힘들게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석 달 전 길을 떠나 한 달 반 전에야 이 산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각종 고생을 한 이들은 현재 정신적이든 신체적이든 온몸의 피로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그들은 모두 청소년 즈음으로 보이는 나이였고, 일행 중에는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어린아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이끼가 잔뜩 낀 돌무더기 위를 걷고 있었는데, 아무리 조심해도 체력이 극심히 떨어진 터라 결국 누군가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앗!”

철퍽!

미끄러진 소년의 팔과 다리가 돌에 긁히며 상처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으흑흑……. 여기까지 도대체 왜 온 거야, 여기에 와서 뭐 한다고! 난 안 갈래! 안 가!”

“안, 안 되겠어…….”

“나도 더는 안 되겠어, 못 갈 것 같아. 이제 찾고 싶지도 않아…….”

일행 가장 앞에서 밧줄을 등에 지고 가던 소년도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소년은 이 밧줄 더미가 자신을 짓누르는 철근처럼 느껴졌다.

퍼억……!

밧줄 더미를 땅에 집어 던진 소년은 그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다른 아이들처럼 눈물을 닦았다. 이 힘든 여정 중에 아이들은 한두 번 운 게 아니었고, 지금도 이전과 비슷한 순간인 동시에 또한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택(澤)아, 우리 돌아가자, 돌아가면 안 돼?”

“나도 가고 싶어,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밧줄 위에 앉은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소년의 손 틈새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일행의 말을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한참 후, 소년은 목이 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어, 집은 없어…… 우리가 돌아가도 집은 없다고…….”

“그, 그렇다고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올 필요는 없잖아. 우리…… 우리 바깥에 잠시 숨어있으면 어때?”

그러자 소년이 또다시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소년은 깊은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인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야 해. 경천산(擎天山) 안으로 들어가서 신선을 찾아야 해.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경천산 동쪽에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봉우리가 있대. 거기가 바로 천계(天界)가 있는 곳이야. 선, 흐윽, 선인을 만나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랑 할아버지를 다시 살릴 수 있어!”

소년이 눈물을 닦으며 하는 말에 다른 아이들도 함께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함께 우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피폐한 정신에 체력은 다 떨어진데다, 배도 고프고 온몸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모두 극한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조금 전 소리친 소년도 밧줄 더미 위에서 일어날 때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꼈었다.

“택 오빠, 나 춥고 배가 고파…….”

“나도 배고파…….”

아직 이른 봄이라 날씨는 쌀쌀했고, 산속의 습기 찬 날씨 때문에 입고 있는 옷은 보온 효과를 잃은 지 오래였다. 아이들은 계속 산길을 걸을 때는 몰랐지만,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하니 다시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고, 바깥에 드러난 손과 얼굴은 상흔으로 뒤덮여 있었다. 모두 가시덤불이나 나뭇가지에 긁히거나 산길에 넘어져 부딪힌 상처였다.

“일단, 일단 쉬면서 불을 피울만한 곳을 찾자. 배도 좀 채우고.”

택이라고 불린 소년은 소맷자락으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냈다. 얼굴에 난 상처가 눈물 때문에 따끔하게 아팠다.

“가자, 어서 일어나. 계속 앉으면 여기 주저앉게 돼!”

“모두 일어나. 비바람을 피할 만한 곳을 찾자!”

“누군가 뒤처지지 않도록 서로 잘 살펴야 해!”

“응!”

아이들은 곧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먼 곳의 산봉우리는 여전히 운무에 뒤덮여 있었고, 최근 며칠은 햇빛도 들지 않아 방향을 잡기도 어려웠다.

다른 아이들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 어린아이를 포함한 다섯 명의 아이들은 피로가 극에 달하고 산길이 험한 탓에 아주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반 시진(1시간) 후, 아이들은 마침내 쉴 만한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은 절벽 아래가 삼각형 모양으로 움푹 파인 곳으로 위쪽에는 커다란 돌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있었다. 비를 완벽히 피할 수는 없었지만 바람을 막기에는 충분했다.

“저기! 저기로 가자. 불을 피우고 쉴 수 있겠어. 어서 서두르자!”

택의 목소리에 아이들 사이에는 마침내 쉴 곳을 찾았다는 흥분이 감돌았고, 다른 아이들은 그 말에 힘이 났는지 걸음을 서둘렀다.

그러나 행운은 잇달아 오지 않고 불운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이들이 저곳에서 등을 대고 기대어 앉아 드디어 따뜻한 불을 쬘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소년이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소리쳤다.

“없어! 어디 갔지? 어딨지? 여기도 아니고…….”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온몸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마침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모두를 향해 말했다.

“부싯돌을…… 잃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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