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금빛으로 빛나는 글자와 계연의 법상(法相)
“너희는 경천산을 통과해서 도양(都陽)에 간다고 했지, 거기는 분명 평온할 거야. 사지 멀쩡하니 배곯을 일도 없을 테고.”
경천산은 중원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이었고, 아이들이 듣기로는 온 천하에서 가장 크고 높다고도 했다. 산맥이 차지한 면적은 무척 광활해서, 깊은 산속은 항상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경천산이 대체 얼마나 큰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는데, 어쩌면 이를 알아보려 한 사람이 아예 없던 걸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광활한 산인 만큼, 선인이 살고 있다는 전설도 가득 품고 있었다.
험준한 경천산은 쉽게 넘어가기 어려운 천혜의 장벽이었지만, 경천산을 일직선으로 통과하면 동승국의 번화한 도시인 도양에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관도(官道)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도양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사냥꾼들조차 잘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경천산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럼 너는?”
누군가 이렇게 묻자 택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선인을 찾으러 가야지. 그러면 선인께 부탁해서 마을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한 다음, 다시 너희들을 찾아갈게.”
“선인을 못 찾으면?”
“택아 선인을 찾는 일은 포기해. 경천산에서 신선을 찾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심지어 살아나온 이도 거의 없다고 들었어. 우리도 그동안 이렇게 오래 산을 헤맸으니, 너도 이제는 찾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을 거 아냐.”
그러자 택이 고개를 저었다.
“장동공(長東公)은 성공했잖아. 장동공은 홀로 경천산에 들어와서, 계속 동쪽을 향해 걸으며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어.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그 사람은 선인의 의복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자신을 도왔던 이웃들에게 부귀를 베풀었어! 다들 그 이야기 들어봤잖아!”
도양 사람인 진장동(晋長東)이 신선을 찾아 헤맨 이야기는 동승국에서 널리 퍼진 민간 전설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장동공(公)이라 불렀는데,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신선에 관해 퍼진 이야기 중 가장 근거 있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포기하지 말고 꾸준히 해 나가라고 조언할 때 종종 장동공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었다. 게다가 그동안 이 장동공에 관한 전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선을 만나러 경천산이나 다른 명산으로 향했는지 모른다.
택이 이렇게 말하자 용이 즉시 그 말에 반박했다.
“하지만 너는 장동공이 아니잖아! 전설 속의 장동공은 본디 신선이 될 재능을 품고 태어났고, 한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아 뭐든 한 번만 보면 배울 수 있는 하늘이 내린 인재였다고 했어. 원래부터 속세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야! 택, 우리 같이 도양으로 가자, 응?”
그러자 택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장동공에 관한 전설이 진짜냐 가짜냐는 둘째치고, 그 사람이 날 때부터 남과 다른 사람이었을 리는 없다고 했어. 모두 후대 사람이 미화시킨 거라고. 강인한 신념만 있다면 누구든 장동공처럼 될 수 있다고 하셨어!”
이를 들은 용이 결국 화가 나 이렇게 소리쳤다.
“네 얼굴하고 손발을 좀 봐, 한 군데도 성한 데가 없어! 산중엔 맹수도 살고 온갖 독충도 사니까, 선인을 찾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고!”
“아니, 나는 선계에 가서 선인을 만날 거야. 3개월쯤 전에 우리 모두 경천산 꼭대기에서 선광(仙光)이 빛나는 걸 봤잖아. 다들 기억하지?”
그리고 바로 그 선광 때문에, 전란 중에 살아남은 소년들은 산에 들어올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이 재난을 피해 몸을 숨길 겸 선인을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3개월 동안 산에서 온갖 고생을 한 아이들은 진작에 그런 환상을 접어버린 후였다. 택 만이 고집스레 그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택의 물음에 용이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래, 우리 모두 봤어. 하지만 그게 뭐? 만약에 우리가 잘못 본 거면? 넌 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앞으로는 밤에 교대로 깨어 있을 일행도 하나 없을 텐데, 그럼 영영 잠도 자지 않으려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한 장씨 할아버지 본인도 돌아가셨잖아!”
“너!”
택은 단번에 화가 솟구쳐 자리에서 일어나 용을 향해 덤벼들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당장 사과해!”
용도 마찬가지로 화가 나 택과 함께 땅바닥을 뒹굴었다.
“장씨 할아버지가 살아있었으면 반드시 너를 말렸을 거야!”
“할아버지는 살아날 거야, 살아날 거라고! 내가 선인만 만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싸우지 마, 그만해!”
“그만해, 으아앙……!”
* * *
반나절 후, 아이들은 경천산 깊은 곳이 아니라 도양이 있는 동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산속으로 깊이 들어갈 때는 안쪽으로 걸어갈수록 비바람이 불거나 벼락이 떨어지는 등 날씨가 궂어졌다. 공기도 축축하고 쌀쌀했으며, 가시덤불이 길을 막고 맹수가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방향을 바꾸자마자 길이 평탄해지고 때때로 흐르는 샘물이 나타났으며, 날씨도 따뜻하고 온화해졌다.
그렇게 2주가 흐르고, 아이들은 마침내 경천산 동쪽 경계에 다다랐다.
마침내 산에서 빠져나왔다는 안도는 잠시뿐, 다섯 명 중 누구도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택은 밧줄을 등에 지고 결연한 모습으로 다시 산으로 향했고, 네 아이는 택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설득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울어도 보고 때려도 본 뒤였다. 택은 결코 결심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 * *
그동안 구봉산 위쪽에서는 겨우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 이 시각 운하원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고, 응접실의 대문도 열려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실은 진법으로 뒤덮인 상태였고, 구봉산 제자들 모두가 운하원 가까이 가지 말라는 명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법보를 제련하는 것도 아니고, 삼매진화 때문에 선래봉 전체가 머물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운하원만 제한된 것이다.
책상 위에는 문방사우가 모두 갖춰져 있었고, 백여 개의 작은 글자들이 은은한 금빛을 내뿜으며 계연의 주위에 떠 있었다. 그들은 평소의 소란스러움과 달리 나란히 서서 의젓하게 침묵을 지켰다.
계연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어느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붓에 가볍게 먹물을 묻힌 뒤,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갔다.
“허(虛)는 음양으로 나뉘고, 실(實)은 오행으로 나뉘니, 이것이 천지만물이 생겨나는 이치다.”
계연이 글을 써 내려가자 주위의 글자들이 진법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책상 주위로 은은한 빛무리가 덮이고, 총 110개의 글자들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현재 계연이 쓰는 글자 하나하나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계연이 한 글자를 쓸 때마다, 그와 같은 거대한 금빛 글자가 공중에 나타났다.
현재 계연은 무척 신비로운 상태였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종이 위에 글을 써 내려가는 동시에, 의식 세계 속에서는 선래봉 위에 선 거대한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다. 계연의 법상은 운하원과 그 안에서 글을 쓰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연의 거대한 법상(法相)은 계연 자신만 느낄 수 있었다. 구봉산의 수선자들 중에는 계연을 보거나 느낀 자가 아무도 없었다.
‘천서(天書)가 완성되면 <천지묘법>의 하권(下卷)도 쓸 수 있겠어!’
계연은 원래 <천지묘법>의 요점은 상권(上卷)에 담긴 천지화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보를 제련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음양오행에 관해 논하면서 크게 식견을 넓힌 뒤였다. 게다가 모두가 도를 논하던 과정이 천지의 뜻에 부합하였던 모양인지, 계연은 그 과정에서 천지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천지묘법>의 하권은 계연이 전에 생각하던 만큼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더해 석유도를 깨운 도가(道歌)를 통해 얻은 깨달음까지 녹여낼 수 있을지 몰랐다.
서로 긴밀히 연계된 각각의 깨달음을 떠올리던 계연은 <천지묘법>을 완벽히 수련한 자는 자신이 쓰는 천서의 진의(眞意)를 더욱 쉽게 깨달을 수 있으리란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따져보면 모두 같은 곳에서 뻗어 나온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쉽다는 것은 상대적인 말이어서 정말로 이를 다 배우고 깨우치려면 무척 힘들 것이다.
실체 없는 계연의 법상은 또 하나의 눈처럼 구봉산 주위를 둘러보며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응접실 안의 계연은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지만, 계연의 법상은 돌연 멀리 남쪽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그것은 무척 기이한 감각이었다. 시각(視覺)을 이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시각이 아닌 듯했다. 계연은 저 멀리 궂은 날씨를 넘어 강렬한 집념을 느꼈다.
한편, 구봉산 천도봉에는 꼭대기에 있는 평평한 대(臺) 말고도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수행을 닦을 수 있는 도장(道場)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구봉산 장교가 수행을 닦던 별실 바깥에 서서 선래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지만, 눈빛은 그 표정과는 달리 혼란스러워 보였다.
계연의 법상이 눈을 한쪽을 향해 눈을 돌리자, 구봉산 장교도 그 시선을 따라 멀리 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어떤 기운을 감지한 계연의 법상이 천도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법상은 그곳에 쳐진 금제를 뚫고서, 천도봉 별원에 서 있는 구봉산 장교 진인인 조어(趙御)를 볼 수 있었다.
이 순간 계연은 하나의 마음으로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따로 분리된 두 개의 영역으로 함께 사고하고 있었다. 실체가 있는 한쪽은 아래에서 글을 쓰고 있었으며, 허상인 한쪽의 법상은 상공에서 멀리 구봉산 아래의 상황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계연의 법상(法相)은 자신의 의식 세계에서만 존재했지만, 높은 도행을 지닌 데다 심오한 경지에 오른 구봉산 장교는 충분히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구봉산 장교는 계연의 법상을 발견하고는 놀라워하며 저게 대체 무슨 신묘한 술법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계연의 법상이 그가 법상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래봉을 바라보는 조 장교의 시야는 뻥 뚫려 있는 데다 그가 서 있는 천도봉, 특히 이 별실이 있는 곳은 진법과 금제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계연의 법상은 그것을 모두 뛰어넘어 조 장교 본인을 볼 수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조어(趙御)는 계연과 같은 고인(高人)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슨 기이한 술법을 부릴 수 있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저 멀리 산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좀 더 흥미를 끌었다.
계연의 법상이 시선을 거두자 구봉산 장교 조어(趙御)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적당한 이에게 전음(傳音)을 보내 산 아래로 내려가 상황을 살피도록 했다.
한편 본인은 계 선생이 얼마나 오래 글을 쓰든, 가만히 그것을 기다리며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책의 내용을 보려 하지는 않았고, 멀찍이서 심오한 도를 품은 각종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