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돌아갈 길만 남는다
여자아이는 쟁반을 침상 곁에 두고서 택을 자세히 살폈다. 진수는 장교 진인께서 택을 도운 것을 알았으나, 택은 구봉산에 오기 전부터 이미 마음과 정신에 심각한 문제를 가진 상태였다. 물론 진수의 도행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어서 먹어.”
택은 뻣뻣이 거절하거나 쓸데없는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이 세상에 택의 투정을 받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신선을 찾아 산에 들어온 후로 택은 많이 성숙해졌다. 택은 고분고분 죽 그릇을 받아들고 잠시 냄새를 맡아보더니 금세 먹기 시작했다.
죽을 먹으며 택은 곁눈질로 진수를 흘끔 바라보았고, 이는 진수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신 진수는 훨씬 시원스러운 태도로 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택은 이 여자아이가 자기보다 좀 더 나이를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충 몇 살쯤일까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죽그릇이 싹 비워졌다. 택은 조금 더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더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죽을 다 먹고 난 택은 손에 난 상처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이에 팔을 걷어보고, 얼굴과 등을 만져보니 온몸의 상처가 전부 사라져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지만, 병을 고치고 상처를 낫게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진수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 뒤, 택에게 깨끗한 옷을 건넸다.
“이걸로 갈아입어, 바깥 구경을 시켜 줄게. 나가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야.”
택은 진수가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어차피 겉옷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이불을 걷고 바닥으로 내려서려 했다. 그러나 택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진수는 나가버렸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선 택은 자신이 머문 방이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곳에서는 다른 산봉우리도 보였고, 산 아래에 펼쳐진 운해(雲海)도 볼 수 있었다. 그 풍경을 보자 택의 가슴이 탁 트이는 듯했다. 낭떠러지 가까이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만장(萬丈) 깊이의 심연(深淵)이 내려다보였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떨어질까 봐 무섭지 않니?”
진수는 택의 옆에 서서 이렇게 물으며, 택의 마음속을 스쳐 지나간 충동을 모른 척해주었다. 택은 침묵에 잠긴 채 말이 없었다. 택은 우울한 와중에도 속세에서는 보지 못하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누나, 누나는 선녀인가요?”
“하하하하……! 선녀라고? 하하하! 음…… 그런 셈이지!”
진수는 택의 말이 재밌다고 느꼈고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그때 택이 몸을 돌려 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 같은 선인들에게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이 아주 보잘것없게 느껴지나요?”
그러자 진수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주 간단한 질문이지만 나한테 묻지 말고 선인에게 물어야지. 그렇지만 많은 고인(高人)께서 속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을 지푸라기처럼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건 알아. 다만 많은 일을 봐와서 무덤덤해지셨을 뿐이지.”
“누나는 고인이 아닌가요?”
그러자 진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웃었다.
“내가? 고인? 난 선유대회가 열렸을 때, 거기 가서 엿들을 자격조차 없었어. 연운봉(連雲峰)에서 멀찍이 구경이나 했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고인이라 불릴 수 있겠어!”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선인이 아닌가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모두가 고인이죠!”
“아니야,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진수는 연신 손을 내저으며 덧붙였다.
“네가 나를 선녀라고 부르는 건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어. 하지만 고인, 그것도 구봉산에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당치도 않아. 진정한 고인은 신통력이 뛰어나고, 보통 사람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분들이야. 법력이 높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품은 뜻도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지.”
진수는 택이 여전히 어리둥절한 듯 보이자 이렇게 설명했다.
“네가 처음 와서 뵈었던 장교 진인이시야말로 진정한 고인이라 할 수 있어. 산에는 많은 선배가 계시고, 또, 실은 저쪽에도 무척 대단한 고인이 한 분 계셔. 구봉산 모든 수선자들이 그분을 알고 있고, 장교 진인께서도 그분을 대단히 존경하셔. 그분은 구봉 동천 바깥에서 온 분인데, 아무도 감히 그 어르신을 귀찮게 하러 갈 엄두를 못 낼 정도야.”
진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절벽 맞은편, 구름 위에 우뚝 서 있는 선래봉이었다.
택은 진수가 가리키는 대로 선래봉 쪽을 바라보았다. 선래봉 어느 곳에는 채색 구름이 감돌고 있었고, 그 아래로 언뜻 금빛이 번쩍였다.
“그 고인께서는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데요?”
“듣자 하니 천서(天書)를 쓰고 계신대. 참, 그거 알아? 몇 년 전에 여기서 선도(仙道)의 큰 대회가 열렸었거든. 세상 곳곳의 선인들이 모두 여기로 모여들었었는데, 맞은편 저 봉우리의 대단하신 고인께서 또 다른 고인분들과 함께 대단한 일을 벌이셨었어.”
진수는 그렇게 말하다가 돌연 무언가 깨달은 듯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 대회가 열렸을 때 너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겠구나. 어쩌면 너희 부모님도 태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가만히 듣고 있던 택은 그 말에 모처럼 이 신선 누나의 말에 반박했다.
“몇 년 전이라고 해봐야 나이가 조금 어렸을 뿐이지, 태어나긴 했을 때에요!”
그러자 진수가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구봉산 위의 1년은 산 아래 세계에서는 10년이야. 6년 전에 선유 대회가 끝났으니, 그동안 하계에서는 이미 60년이 지난 거지. 그러니 그때 네가 태어났었을 리가 있니? 여기서 하룻밤 자면 밑에서는 3일이 흐르니, 거기는 이미 한 달이 지났을걸.”
그 말에 택은 너무 놀라 슬픔마저 약간 옅어질 정도였다.
“참, 너 저쪽 봉우리에 노란 구름이 껴있는 곳이 보이니?”
“네, 금빛이 나네요. 아주 아름다워요.”
“대단하네! 평범한 사람이 육안으로 그 광경을 보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야. 그럼 다음엔 저 선래봉 전체를 한번 봐봐. 그 고인께서 책을 쓰시다가 특별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가거나 하면 온 산봉우리에 변화가 생기거든. 사계(四季)의 풍경이 나타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야!”
그 후 며칠 동안 진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택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선인들이 온갖 신묘한 술법을 부릴 줄 안다지만, 마음을 다친 사람을 치료하려면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택은 정신적인 충격만 입은 게 아니라, 많은 감정이 얽힌 복잡한 문제에 놓였지 않은가.
* * *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구봉산 아홉 좌의 봉우리는 그 하나하나가 모두 거대하여, 무수히 많은 절경을 품고 있었다. 진수는 괜찮은 상황에는 택을 데리고 다니며, 선문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이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늘어날 때마다, 진수는 장교 진인께서 내린 임무를 완수한 셈이었다.
다만 진수가 궁금해했던 것은, 어찌하여 장교 진인이나 선문의 다른 어른들이 택을 제자로 받아들이자는 말을 꺼내지 않느냐는 점이었다.
‘설마 택이 정양을 마치고 나면 다시 택을 산 아래로 내려보낼 생각이신 걸까?’
이날 선래봉의 운하원에서는 계연이 마침내 마지막 글자를 쓰고 붓을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 놓인 서책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렀는데, 책 겉면에는 <묘화천서(妙化天書)>라고 적혀 있었다. 그 제목만 봐서는 법보를 제련하는 것에 관한 내용처럼 보이지 않았다.
계연이 붓을 붓걸이에 놓고 서책을 집어 들자, 심오한 도의 기운이 은은히 빛났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운하원 전체에서도 그와 같은 기운이 사라졌으며, 계연의 법상도 다시 그의 의식 세계로 돌아갔다.
계연은 깊이 숨을 내쉰 뒤 자신이 쓴 서책을 두어 장 뒤적거렸다. 종이에서는 은은한 묵향(墨香)이 느껴져 계연은 무척 흡족했다. 이 책을 이루는 모든 글자는 천기(*天機: 모든 조화를 꾸미는 하늘의 기밀)로부터 감춰져 있어, 책의 내용과 그것이 담은 뜻이 서로 착란을 일으켜 천겁을 불러오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내용을 보고 싶다면 연이 닿거나, 그것을 끌어내는 술법을 알아야 했다.
완성된 서책을 살펴본 계연은 망설임 없이 바람을 몰고 연운봉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요즘 계연이 꽤 신경을 쓰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계연이 택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얼마 전 계연이 책을 쓰며 신기한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구봉산의 선령(仙靈)한 기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택의 상태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택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그 기운은 두 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였다. 바로 그 때문에 구봉산에서 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고, 앞으로 택에 대해 어떤 처분을 내릴지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 * *
그 시각 열대여섯 살의 소년인 택은 낭떠러지 위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거리고 있었다. 택은 조금의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듯이 그렇게 선계의 절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택은 계연이 다가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선래봉을 바라보며 이전의 그 빛이 어쩐지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얼 보고 있니?”
계연의 온화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년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택이 보기에 계연은 학문을 닦는 선생처럼 보였으며, 생김새도 분위기도 무척 기품있어 보였다. 하지만 계연이 입은 옷은 다른 구봉산 선인들의 옷처럼 색이 선명하거나 부드러워 보이지는 않았다. 계연의 이런 소박한 차림새 때문인지, 아니면 듣기 좋은 목소리 때문인지는 몰라도 택은 계연에게 약간 친밀감을 느꼈다.
“저쪽의 선래봉을 보고 있었어요. 빛이 사라진 것을 보니, 무척 대단하다던 그 선인께서 책을 다 쓰셨나 봐요.”
택이 자신에 대한 말을 꺼내자 계연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 쓴 듯하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거기에 앉아 있으면 위험하니 이쪽으로 좀 더 오렴.”
“제 이름은 장택이에요. 택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택은 위험하다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엉덩이를 움직이지도 않았다. 택은 이제 선인을 만나도 그다지 놀라워하지 않았다.
계연은 택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고서 더는 말하지 않고 자기도 택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택과 마찬가지로 두 다리를 낭떠러지 밑으로 내린 채였다.
“휴, 여기서는 우리 둘 다 외부인이로구나.”
택은 그 말에 계연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선생께서도 이곳의 선인이 아니신가요?”
그의 물음에 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그 대답에 택이 퍼뜩 정신을 차린 듯 계연에게 캐물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여기 무얼 하러 오셨나요? 선인의 도움을 구하고자 오셨나요? 그분들께서 승낙하시던가요?”
“나는 선인의 도움을 구하고자 온 건 아니란다. 원래는 자유로이 돌아다니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이곳 선인들의 도움을 받았지. 너는 여기 무얼 하러 왔지?”
그러자 택이 다시 의기소침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택은 울지 않고 그저 낮은 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부모님과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원래는 그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려고 왔었어요…….”
계연은 그 말에 침묵을 지키며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마치 그의 표정은 구봉 동천 바깥, 머나먼 동쪽 운주를 넘어, 지난 인생을 돌이켜 보는 듯했다. 그러더니 계연은 탄식이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이 계시면 인생은 아직 돌아갈 곳이 있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인생은 돌아갈 길만 남는다(父母在, 人生尙有來處, 父母去, 人生只剩歸途: 작가 필숙민(畢淑敏)의 단편 <효심무가(孝心無價)>의 한 구절)고들 하지.”
그 말에 내내 굳세어 보였던 택의 눈가에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착한 아이로구나!’
계연은 속으로 안타까워하며, 이 소년의 마음에 어린 마념(魔念)에 가까운 기운을 조금 더 깊이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