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동천의 자정(自淨) 효과
약 일각(15분)이 흐른 뒤, 계연은 진수와 택을 데리고 함께 구봉산을 떠났다. 계연이 영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산속의 안개는 그들을 피해 흩어졌으며 구봉산의 진법이며 금제도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두 달간 장택이 구봉산에서 머무르며 진수가 시간 날 때마다 장택을 곳곳으로 데리고 다녔지만, 장택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혼자였다. 그러다 마침내 구봉산을 떠나니 택에게서는 확연히 전보다 생기가 느껴졌다.
“계 선생님, 저는 산에서 벌써 두 달 넘게 머물렀어요. 진수 누나 말로는 산에서 하루 머무르면 산 아래에서는 열흘이 지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벌써 산 아래 세상에서는 2년이 지난 건가요? 부모님 묘는 어떻고 용 그 아이들은 어찌 지낼지…….”
택은 지금 기대감과 걱정이 섞여 복잡한 심경이었다. 실은 계연도 구봉 동천의 시간 흐름에 대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택의 말을 듣고는 그저 위로해줄 수밖에 없었다.
“묘지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으니 별일 없을 것이다. 또 예로부터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고도 했잖니. 네 친구들은 이미 병사들에게서 도망친 데다 굶주림을 견디며 경천산을 넘기도 했으니, 도양에서는 분명 잘 지낼 거란다.”
“네…….”
한편 진수는 사방 곳곳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수는 산에서 내려올 기회가 무척 적었으므로 택보다 훨씬 흥분해 있었다. 때때로 택을 붙잡고 속세에 관해 궁금한 것들을 묻기도 했다.
반면 계연은 시선을 멀리 둔 채로 구봉 동천의 시간 흐름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동천이라 하더라도 바깥 세계에서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었다. 동천 안쪽의 해와 달, 별은 진짜가 아니거나 혹은 바깥 세계에서 끌어온 것이었다. 동천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든지 간에, 그것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천지의 일부라고 보는 게 옳았다. 다만 엄청난 신통력으로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영향을 최대한 적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구봉 동천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원래대로라면 시간도 구봉산 위쪽과 바깥 세계와 동일하게 흘러야 했다. 하지만 동천의 아래쪽은 위쪽보다 열 배가 빨랐으니, 이는 분명 구봉산 수선자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것일 터였다.
이렇게 만든 이유를 계연이 떠올리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각종 기이한 화초며 진귀한 약재들이 엄청나게 빨리 자라나기 때문일 터였다. 또한 동천 안에는 요마도 없고, 구봉산 선인들이 직접 인정한 산신과 토지신이 지키고 있으므로 걱정할 게 없었다.
동천 안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은 이론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수선자들이 만들어낸 환경에서도 사람들은 번영하며 각자의 생을 일궈나갔고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그러다 평범한 사람 중에서 진장동처럼 자질이 뛰어난 이가 생기면 구봉산 제자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들은 어느새 구봉산의 구름층을 뚫고 나왔다. 이들의 발밑에는 수많은 산봉우리가 높이 솟은 경천산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계연의 생각도 시선을 따라 더욱 멀리 퍼졌다.
동천의 시간을 바꿀 정도라니 구봉산의 저력은 과연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이 세상천지에 속하는 어느 한 부분의 시공(時空)을 그들이 비튼 것이 아닌가?
‘과연 정말로 조금의 영향도 없을까?’
“계 선장(仙長)님, 무슨 생각 하세요?”
진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계연은 얼른 다른 생각을 떨쳐버리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다. 곧 산에서 나갈 수 있겠구나. 택이 너 고향이 북쪽이라고 했지?”
“네, 조금만 낮게 나시면 제가 길을 알려 드릴게요!”
택은 무척 담이 큰 소년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흥분보다도 두려움을 더 크게 느꼈을 것이다. 선인(仙人)이 곁에 있으니 추락하지 않으리란 것은 알 테지만,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었으므로 평정을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잘 보고 있다가 알려주렴. 또, 진수 너도 나를 선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택처럼 계 선생님이라고 부르렴. 그게 더 듣게 좋구나.”
그러자 진수가 기뻐하며 즉시 대답했다.
“네, 계 선생님!”
택이 고향에서부터 경천산에 올 때는 고되게 산 넘고 물 건너 몇 개월이 흐른 후에도 아홉 봉우리를 눈에 담지 못했었다. 하지만 구름을 타고 계연과 함께 가니, 채 반 시진(1시간)도 되지 않아 산 바깥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늘에서 길을 찾는 것과 땅 위에서 길을 찾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얼마쯤 적응하지 않으면 길을 제대로 찾기가 어려웠다. 이에 택은 제대로 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여러 번 허둥댔으나, 다행히 계연이 마치 길을 아는 사람처럼 방향을 잡았다. 택이 마침내 익숙한 고향의 풍경을 눈에 담을 때까지 계연은 택에게 한 번도 길을 묻지 않았었다.
태양의 위치로 보아 정오(正午)쯤 되었을 때, 그들은 택의 고향 마을에 내려섰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진수는 눈썹을 찌푸리며 저도 모르게 코와 입을 막았고, 택조차 그 냄새에 숨을 참았다. 오히려 그들 중 후각이 가장 뛰어난 계연만 표정이 담담했다.
“가자, 가족들에게 제사를 지내야지.”
계연은 흐릿한 시각으로도 이곳이 원래는 소담하고 작은 집들이 세워진 보통의 농촌 마을이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건물이 무너져 있었고, 완전히 타버린 곳도 적지 않았다.
곳곳에 잡초가 자라나 푸릇푸릇한 것이, 얼핏 보면 생기가 넘쳐흐르는 듯했으나 실은 곳곳에 시체가 널려 있었다. 어떤 시체는 이미 백골이 된 지 오래였고, 어떤 시체는 바싹 말라 있었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곳은 대부분 시체가 있는 곳이었다.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의 근원도 바로 그 시체들이었다.
세 사람이 마을로 들어서자 까마귀 떼가 놀라 날갯짓하며 도망쳤다.
까악- 까악-!
푸드덕!
까악! 깍!
파닥파닥……!
…….
처음에는 고작 몇 마리뿐이었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엄청나게 많은 까마귀 떼가 보였다. 까마귀들이 모두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르자, 수선자인 진수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양팔로 얼굴을 가릴 정도였다. 하지만 계연과 택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고는 진수는 얼굴이 새빨개져 얼른 담담한 척했다.
세 사람이 마을로 들어서자 택은 마치 그날의 참상을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처럼 넋이 나간 듯했다. 진수는 가만히 그들을 따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계연은 곳곳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그날 최소한 수백 명이 죽었을 테지만, 택과 그의 친구들은 각자 자기 가족들을 묻어주었기 때문에 다른 시체는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을이 이렇게 편벽한 곳에 있는 데다가, 예상치 못하게 닥친 전란이었기 때문에 저승사자들도 때맞춰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땅에 묻힌 이들을 제외한 다른 망자들은 후에 모두 몽롱하고 무지한 상태의 넋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 햇빛을 피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했을 테고, 나중에 알아차렸다 해도 시체가 온전하지 않은 이들은 그 안으로 숨지도 못했을 것이다.
계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태양은 비록 바깥 세계의 진짜 태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태양의 힘은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을 사람들은 병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후에는 햇빛에 의해 소멸했을 것이다. 요행히 도망친 이들이 있다고 한들 떠도는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시신 근처에는 강렬한 원기(怨氣)가 모여드니, 거기서 어떤 삿된 존재가 생겨났을지도 몰랐다.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요괴가 들끓는다는 옛말이 바로 여기서 유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계연이 지금 보아하니 그런 강렬한 원한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생겨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가 정화한 것일까?’
이런 생각에 잠겨 있던 계연이 두 눈을 크게 뜨자, 천지의 색깔이 미세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푸릇푸릇한 광경에 몇 가지 색채가 더해지며 어슴푸레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계연이 하늘을 올려다보니, 태양의 힘이 갈래갈래 요동치는 불길처럼 대지에 떨어지고 있었다.
“계 선생님, 저기가 바로 저희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묻힌 곳이에요.”
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계연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은 어느새 마을 뒤편으로 들어온 상태였고, 이곳에는 십여 개의 작은 봉분이 있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각자의 가족들을 위해 구멍을 파서 만든 묘지였다. 무덤 앞에는 조잡한 나무 팻말들이 꽂혀 있었는데, 아이들이 글을 몰랐던 탓에 누구의 묘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만약 이런 일이 인터넷이 발달한 계연의 지난 세상에 알려졌다면, 분명 누군가는 자기 가족만 무덤을 만들어주었다며 아이들을 욕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적, 신체적으로 극한에 달한 아이들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묘를 만들어주려 하였대도, 아이들이 구멍을 다 파기도 전에 시체들은 모두 썩어 버렸을 것이다.
택은 무덤가로 달려가 가장 앞쪽의 두 봉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택이 왔어요. 제가 돌아왔어요!”
택은 이렇게 말하며 쉬지 않고 땅에 머리를 조아렸다. 군데군데 작은 돌멩이가 섞인 땅에 택이 온 힘을 다해 머리를 찧자, 택의 이마가 찢어지며 피가 났다. 하지만 택은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비틀거릴 때가 되어서야 멈췄다.
계연은 이를 보며 가볍게 탄식한 다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토지신당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저곳은 원래부터 비어있는 신당이었다. 이곳에는 토지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수는 택의 옆에 꿇어앉아 택을 부축하며 위로했다.
“저분들을 묻어주어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저승에 들지 못하셨을 거야.”
계연은 그 말에 눈썹을 찡그리며 지금 이 상황을 보니 저승사자가 망자들을 데리러 왔던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계연이 무덤을 바라보며 가만히 점을 쳐보니, 다행히 각각의 무덤에서 연결된 곳이 느껴졌다. 무덤 주인들은 모두 저승에 든 것이었다.
“자, 어서 제사상을 차리고 초를 붙여라. 곧 저승에 가서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계연이 이렇게 말하며 소매를 한번 휘두르니, 과일과 떡 등이 계연의 소매 안쪽에서 날아갔다. 그것들이 십여 개의 봉분 앞에 가지런히 놓이자, 그 옆으로 향촉(*香燭: 제사에 쓰이는 향과 초) 몇 개가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계 선생님!”
택은 흐르는 눈물과 이마의 피를 닦고서 향촉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진수가 작은 불씨를 일으켜 택을 도와 불을 붙여주었다. 택은 그것을 봉분 앞에 꽂고서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계연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택을 지켜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작 이 마을 하나를 둘러봤을 뿐이지만, 계연의 마음에는 얼마간 짐작 가는 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만 내세울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어 추측에 그칠 뿐이었다.
구봉산에서는 엄청난 신통력으로 동천을 만들어냈고, 강력한 ‘자정(自淨)’ 능력을 부여하여 삿된 기운이 자라나는 것을 방지했다. 삿된 기운이 없으니 삿된 존재가 생겨날 리 없었고, 동천 안에는 기껏해야 귀신뿐이었다.
오래도록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 이번에 계연도 택을 만나지 않았다면 동천의 자정 능력이 무척 신기하다며 감탄을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택에게 나타난 문제를 보니, 이 동천은 결코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