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규칙이란 무엇인가
택의 부모는 봉분 하나에 합장되어 있었고, 할아버지의 묘는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묘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제사상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이 각각의 묘 앞에 모두 마련되어 있었다. 택은 진수의 도움을 받아 향촉에 불을 붙여 모든 묘 앞에 꽂고서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상(常)씨 아저씨, 아주머니, 저 택이에요. 상용을 대신해서 왔어요……. 전(錢)씨 아저씨, 전리를 대신해서 절을 올리러 왔어요……. 이(李)씨 아저씨, 아주머니! 이고를 대신하여 뵈러 왔어요…….”
택은 십여 개의 묘에 각각 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다시금 자신의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묘 앞으로 돌아왔다.
“택아 내가 청신(請神)과 송신(送神)을 배웠으니, 이 잿밥의 기운을 저승으로 보내줄게.”
진수가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결인(結印)을 맺자,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와 무덤가를 감싸고 돌았다. 뒤이어 택과 계연은 단향의 향불이 십여 개의 봉분 위로 맴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청신과 송신은 널리 알려진 술법으로, 선도(仙道)에만 국한되지도 않았고 ‘신(神)’에만 국한되지도 않아 그 용도가 무척 다양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신령뿐만이 아니라 어떤 신비한 사물을 가리키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소통을 위한 술법으로, 선도에서는 각각 청법(請法), 송법(送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청신의 방식은 구신술과는 근본적으로 비교할 수 없었다. 청신술은 마치 한 무리의 팬들이 어느 유명인에게 이쪽으로 와달라 소리치는 것과 비슷했다. 그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두 상대의 의사에 달려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청신술도 꽤 쓸만했다.
“택아 봐봐! 향불이 곧바로 흩어지지 않으니, 이건 저승에 있는 누군가가 받았다는 거야. 이제 안심해도 돼!”
택은 그 말에 안도와 기쁨을 드러내며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계연도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진수의 말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잘됐다!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가 아직 계시는 거지? 곧 그분들을 만날 수 있는 거야?”
“물론이지, 계 선생님이 계시잖아. 장교께서 주신 신물(*信物: 뒷날에 보고 증거가 되게 하고자 주고받는 물건)이 없다더라도 그자들은 감히 계 선생님을 막아서지 못할 거야.”
진수는 이렇게 말하며 은근히 계연을 띄워줬다. 그런 뒤 진수가 몰래 곁눈질로 살펴보니, 계연이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러자 진수는 자신의 아부가 먹혔음을 확인하고 조용히 기뻐했다.
택이 살던 마을은 묘동촌(廟洞村)이라고 불렸다. 2년 전 온 마을이 몰살된 후로는 마을이 완전히 황폐해져, 주위의 논밭도 당연히 돌보는 이가 없었다. 이는 묘동촌뿐만 아니라, 인근 두 곳의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인적이 드문 이 지역은 그 후로 완전히 죽은 땅이 되어버렸다.
계연은 이번에 하늘로 날아가지 않고, 택과 진수를 데리고 직접 땅을 밟으며 걷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이 동천 안의 세계를 관찰하기가 더욱 쉬웠다.
물론 보통 사람의 다리 힘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므로, 계연은 은밀히 술법을 펼쳤다. 세 사람은 별 특징이 없는 지방을 지나며 그들도 모르는 사이 나는 듯이 걷고 있었다.
적막에 뒤덮인 근방의 두 마을을 지날 때도 시체 썩는 내가 뒤섞인 악취가 느껴졌다. 그들은 오래도록 살아있는 사람 하나 만나지 못한 채 황무지를 걸었다. 날짐승과 들짐승을 제외하고는 이 땅에 마치 그들 세 사람만이 살아있는 듯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택과 진수는 기분이 무언가에 억눌린 듯 무척 저조해졌다. 택은 마음의 상처가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고, 진수는 마을 몇 곳의 참상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는 놀란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구름 위에 있을 때는 쉼 없이 재잘댔던 두 사람이 지금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세상천지 어느 곳이든, 역사를 되돌아보면 분쟁은 항상 끊이지 않았단다. 어떤 갈등은 그저 말싸움 정도이지만, 어떤 갈등은 엄중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 또한 사람은 모두 성현(*聖賢: 성인과 현인)이 아니므로, 그렇게 쌓인 은원(恩怨)은 사라지지 않고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단다. 꼭 다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 분노와 원한은 계속 남아있는 거야. 그러니 우리 모두 최대한 그런 분쟁을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진수를 향해 덧붙였다.
“너는 산에서 수행을 닦으니 속세에서 일어나는 온갖 참상을 볼 기회가 적겠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스승의 가르침과 세상의 도리에 이미 이런 내용이 담겨 있을 거야. 다만 네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그러니 후에 기회가 생기면, 바깥세상을 많이 돌아다녀 보렴.”
“네!”
진수는 계연의 말에 얼른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택은 계연을 다른 어른들처럼 대했지만, 구봉산 제자인 진수는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하기에 진수는 이미 계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한 고인(高人)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으니, 마땅한 예를 차리는 것이 옳았다.
조금 전 계연이 남긴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택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계연을 향해 물었다.
“선생님, 분쟁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니,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어찌하면 피할 수 있나요?”
“좋은 질문이구나!”
계연은 한쪽 손을 뒷짐을 진 채 걸으며, 오른손으로는 허공에 대고 이리저리 선을 긋기 시작했다. 계연이 가로세로로 왔다 갔다 몇 번이나 줄을 긋자, 마침내 공중에 빛나는 격자무늬가 생겨났다. 그것은 세 사람의 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이게 무엇인가요?”
“바둑판이다.”
택과 진수는 의혹에 찬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바둑판이요?”
‘바둑을 두는 게 방법인가?’
계연은 눈앞의 바둑판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물었다.
“대국을 둘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계연의 물음에 택은 가만히 눈썹을 찡그렸고, 진수도 마찬가지로 깊이 고뇌하는 모습이었다. 한편 선도를 닦는 진수는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는 고인이 제자에게 도를 전하는 것과 아주 비슷했다. 만약 계 선생님에게서 어떤 가르침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자신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각자 적절한 답을 떠올린 듯 차례로 대답했다.
“바둑돌하고 바둑판이요.”
“바둑을 두는 사람과 양측의 실력이요.”
그들의 대답에 계연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가 말한 것도 모두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대국의 규칙이야! 그것을 바탕으로 바둑의 온갖 기예(技藝)와 기도(*棋道: 바둑을 두는 방식과 예의범절)가 펼쳐지는 것이지.”
계연은 다시 이 동천 안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어디든 규칙이 없으면 세상이 원만히 돌아가지 않는 법이지. 이에 인간의 성품을 잘 알던 옛 성현들은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었단다. 왕과 권력자들은 이런 성현의 이치를 빌려 그것을 법으로 제정했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용도로 그것을 사용했지.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 이익을 얻기도 했지만, 확실히 백성들을 보호한 셈이야. 인간 세상뿐만 아니라 만물(萬物)도 일정한 규칙을 따르며, 이곳 천지 또한 마찬가지란다.”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공중의 바둑판을 하나둘 짚었다. 그러자 바둑판 위에 하나둘 반짝이는 ‘별’이 나타나며 대국을 이루다가, 마침내 바둑판 전체가 빛을 잃으며 사라졌다.
택은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렇게 질문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라도 있고 법도 있는데, 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모두 살해된 건가요? 왜 다른 나라에서 이곳을 침범하러 온 거죠?”
“글쎄, 어쩌면 세워진 규칙만으로 모든 이를 보호할 수 없었거나, 규칙 자체에 오류가 있어서 일수도 있어. 그도 아니면…… 규칙의 짜임새가 너무 작아서일 수도 있지!”
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엄청난 거리를 건너뛰고 있었다. 택과 진수가 알아차렸을 때는, 어느새 발밑이 더는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가 아니게 되었고 저 멀리 관리가 잘 된 논밭이 보였다. 그러자 계연이 마침내 속도를 늦췄다.
다시 일각(一刻)을 걸어간 끝에 세 사람은 마침내 자신들을 제외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한창 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던 나이 든 농부는 거친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두립을 쓰고 있었다. 그는 어깨에는 괭이를 멘 채로 잡초를 뿌리째 뽑아내 옆 길가로 던졌다.
계연은 마침내 살아있는 사람을 만난 택이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편 나이 든 농부는 그들의 옷차림이 무척 깔끔한 것을 보고서, 빈한한 집안의 사람이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굳이 이들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저렇게 잘 차려입은 이들이 여기는 무슨 일로 왔을까? 이렇게 불안한 세태에 나쁜 놈들한테 잡혀갈까 두렵지도 않은가?’
농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지만, 계연이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물어왔다.
“어르신, 저 앞이 북령군성(北嶺郡城)이죠?”
“예, 예. 저 북쪽 고개를 넘으면 바로 군성입니다요. 하지만 요즘 험한 일이 많이 일어나니, 저 고개를 넘으려거든 인근 마을에 잠시 머물렀다가, 넘어가는 일행이 생기면 함께 가는 게 좋을 것입니다.”
농부는 이렇게 말하며 세 사람의 뒤쪽을 살폈지만, 따라오는 마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 앞에는 아직도 갈 길이 한참은 이어져 있었다.
“세 분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요?”
그러자 택이 약간 흥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는 산 남쪽에서 왔어요. 저쪽에 마을 몇 개가 있는데, 저는 묘동촌에 살았고요.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혹시 거기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거나 직접 만난 적이 있나요?”
택의 목소리에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이전에 진수 누나의 말에 따르면, 어쩌면 도망쳐 나온 게 자신을 포함한 다섯 아이뿐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했었다. 아이들도 내내 숨어 있었으니, 요행히 목숨을 건진 다른 사람들이 있어 어딘가로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경천산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다른 지방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산 남쪽?”
이 지역은 경천산 산맥에 가까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 대부분이 뻗어 나온 산맥에 가로막혀 있었다. 이렇게 넓은 지역 곳곳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는 데다가 사는 이들도 적어 원체 인적이 드물었다. 하지만 근처의 어느 지명이라든가 길 이름은 인근 백성 대부분이 알고 있었다. 농부는 무의식적으로 남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잔뜩 흐린 하늘을 바라보고는 무언가 깨달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농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그, 그런 이들은 본 적이 없습니다요……. 저,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서…… 마저 일을…….”
농부는 이렇게 더듬더듬 말하며 땅으로 시선을 떨구고는, 엄청난 속도로 잡초를 뽑으며 그들이 있는 쪽에서 멀어졌다. 그는 마치 땅속으로 파고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르신…….”
택이 더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순간 계연이 택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르신은 바쁜 일 마저 하세요,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연은 농부를 향해 살짝 인사해 보인 다음, 두 사람을 데리고 북쪽 고개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이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잡초를 뽑던 농부가 조심스레 농작물 사이에서 허리를 폈다. 그러나 근처 어디에도 계연의 일행이 보이지 않았고, 시선을 돌린 끝에야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세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농부는 잠시 멍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온몸에 한기를 느끼며 부르르 떨었다.
“어이쿠, 오늘은 빨리 집에 가야지!”
‘산 남쪽 사람들은 전부 죽었는데 저게 대체 어디서 나온 이들이란 말인가? 대낮에 귀신을 보다니!’
농부는 자신이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잡초만 대강 뽑고는 밭두렁 위로 올라가 다시 신발을 신고서 괭이를 멘 채 얼른 떠나갔다.
“계 선생님, 저 어르신이 왜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 같죠?”
진수는 도행도 얕고 사람의 기운을 살필 수도 없었지만, 농부가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가 한순간에 바뀐 것을 알아보았다.
“우리를 귀신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단다.”
계연은 뒤이어 택을 향해 말했다.
“택아 나중에 다른 사람들한테 네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오면, 그냥 재난을 피해 도망쳤다고만 말하렴.”
“네, 그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