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억누를 수 없는 마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름이 많아 때때로 해가 가려졌을 뿐이었는데, 그들 세 사람이 북쪽 고개에 오르자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처럼 흐린 날씨가 되었다.
북쪽 고개는 길이 하나만 나 있는 작은 고개가 아니라, 산길을 헤치고 올라가야 하는 산자락이었다. 계연 일행은 굳이 다른 일행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곧바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의 걸음이라면, 아까 그 농부가 있던 위치에서 여기 북쪽 고개까지 반나절은 걸릴 터였다. 하지만 이들 세 사람은 불과 일각(一刻) 만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그들이 산 남쪽의 묘동촌에 있었을 때는 시각이 정오였지만, 여러 곳을 거쳐온 지금은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때문에 세 사람이 산에 들어왔을 때는 어느새 주위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계 선생님, 이 산길에 강도가 있는 것 같지요?”
진수는 조금 전 농부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알아채고는 이렇게 물었다. 아마도 택 만이 여태껏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강도들이 있구나.”
계연이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택은 곁에 신선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물론 이 산에 길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계연 일행이 들어온 방향에서 가장 편한 길은 쭉 북쪽으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산을 오르다가, 평야 지대를 건너 마침내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조금 전에 탁 트인 곳을 걸으며 시선을 멀리 두었을 때와는 달리, 이곳은 좁은 산길이라 양옆이 식물로 가득한 데다 주의력이 분산될 정도로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택은 곧 자신을 둘러싼 주위가 흐릿해진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위의 풍경이 흐릿해진 게 아니라, 보이는 건 또렷하게 보였지만 자신의 시선과 발걸음이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택은 자신이 실제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곳을 디디고 있다고 느끼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누나, 나 꼭 날아가고 있는 것 같아…….”
그러자 진수가 택의 뒤통수를 내리쳐 택을 깨운 다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이형(移形)술의 일종으로 축지법이라고 불려. 이와 비슷한 술법이 많지만, 우리는 지금 한걸음에 먼 거리를 뛰어넘고 있는 거야.”
그러다 길이 마침내 넓어지기 시작하며, 앞으로 탁 트인 산길이 드러났다. 택과 진수는 앞쪽 수풀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세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도 보지 못한 듯이 거리낌 없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에 두건을 묶고서 무기를 들고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큰형님, 알아보고 왔습니다. 저자들은 오늘 밤 산에 오르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북쪽 산자락에 야영을 차렸습니다. 어쩔까요?”
한 남자가 재빨리 뛰어오더니, 산길 근처 커다란 돌 뒤편에 앉아 있던 남자를 향해 자신이 알아낸 상황을 보고했다. 이를 들은 남자와 근처의 다른 이들 모두가 이 상황에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겁쟁이 놈들, 담이 저리 작아서야! 고개가 그리 크지도 않으니 걸음만 서두르면 해가 지기 전에 나갈 수 있을 텐데. 멈춰서 산자락에 야영을 차리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놈들 담이 콩알만 하네요!”
“그럼 저희는 어찌 하는 게 좋을까요?”
이 여섯 명의 사내들은 모두 인상이 험상궂었다. 생김새가 단정치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얼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러했다.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다는 말처럼, 이들은 얼굴만 봐도 결코 선량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보아 이 사내들은 산적인 듯했다.
택은 그들이 자신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혹시라도 소리를 냈다가 주의를 끌까 봐서 입을 꼭 다물고 긴장한 채로 진수의 팔을 잡았다.
“바보야, 저놈들은 우리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아. 뭐가 무섭니?”
그 말에 택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얼른 손을 풀었다.
한편 저쪽의 사내들은 계획을 모두 세운 후였다.
“가자, 어서 다른 형제들에게도 알리자. 밤에 저놈들이 잠이 들고 나면, 아래로 내려가서 전부 털어버리자꾸나!”
“예!”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그들이 계획에 동의하며 움직이려던 순간,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춰라(定).”
그와 동시에 여섯 명의 사내들은 몸을 일으키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입으로 무언가를 씹느라 입매가 부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들은 일어나려던 자세에서 굳어버린 터라 그 모습이 무척 괴이해 보였다.
쌓은 도행이 아예 없는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정신법을 쓸 때는 법력이 거의 소모되지 않았다. 계연은 술법을 펼친 뒤 계속 걸음을 옮겼고, 진수와 택은 호기심을 느꼈지만 멈추지 않고 뒤따라갔다.
“저 사람들 굳어버렸네, 정말 웃기다! 계 선생님, 저 사람들 얼마나 있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나요?”
굳이 추측할 필요도 없이 이는 계 선생님이 술법을 펼친 게 분명했다. 술법에 대해 자세히 캐물을 수는 없었던 진수는 이렇게만 물었다.
계연은 사흘이라고 대답하고는 그 ‘동상’들 앞을 지나쳤다. 깊은 산속에서 3일 동안 움직이지 못한다는 뜻은, 목숨을 하늘에 걸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택과 진수가 ‘큰형님’이라 불린 남자의 앞을 지나던 순간, 택이 돌연 그 어정쩡한 자세를 한 남자 앞으로 다가가 그의 허리춤에서 비수 하나를 뺐다.
택은 이와 비슷한 비수 한 자루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택의 할아버지가 준 것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도 바로 이런 비수 한 자루가 있었다. 할아버지를 땅에 묻어줄 때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더니, 그걸 여기서 발견한 것이다.
“흐…… 흑…… 허억…….”
택의 호흡이 거칠어지며 눈에 핏발이 섰다.
“당신, 당신이야? 당신이지?”
택이 산적을 향해 소리쳤으나, 상대는 험악한 미소를 짓는 얼굴 그대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허…… 허억…… 당신이야, 바로 당신이야!”
챙……!
택은 비수를 뽑아내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오른쪽 눈을 찔렀다.
푸욱……!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살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으나, 사방으로 피가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다.
“택아!”
진수가 깜짝 놀라 얼른 달려가 택을 끌어당겼다. 택의 두 눈은 온통 핏발이 서서 붉었다. 택은 눈물을 흘리며 이를 꽉 문 채 산적을 가리켰다.
“저 남자야. 이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이 틀림없어!”
택은 이렇게 말하며 다시 비수를 휘둘러 남자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하지만 각도가 맞지 않아, 그저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기만 했다. 그 흔적을 따라 피가 비쳤으나 눈이 찔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피가 뿜어져 나오거나 흐르지는 않았다.
계연은 눈썹을 약간 찡그린 채 택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어, 산적의 목을 노리던 세 번째 시도를 가로막았다. 택이 고개를 드니, 계연의 평온한 두 눈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우물 안에 달그림자가 비친 것처럼 고요하고 잔잔했다.
“먼저 물어보자꾸나.”
그는 택의 호흡이 조금 평온해진 것을 보고는 다시 산적을 바라보았다. 계연이 생각하는 바가 변하자 산적에게 걸린 정신법이 풀렸다.
신체에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산적은 찌르는 듯한 고통에 비틀거렸고, 뒤이어 오른쪽 눈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 어윽…… 내 눈, 아아…… 내 눈……!”
산적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리고는 두 손으로 오른쪽 눈을 꽉 막았다. 벌건 피가 손가락 틈새로 흐르자, 남자는 엄청난 고통에 이리저리 굴렀다.
“어서 와서 나 좀 도와라! 대체 다들 무얼 하는 거냐? 으윽……! 너무 아파…….”
택은 원한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고, 진수도 눈썹을 찌푸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계연은 택의 손을 잡고서 초연한 얼굴로 땅을 구르는 산적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동천 안의 세계이기 때문에, 남자의 몸에서 원기(怨氣)나 업장(*業障: 말, 행동, 마음으로 지은 악업(惡業))이 드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필시 이 남자의 혼백에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죽어도 싼 부류였다.
“으윽…… 허억……! 누, 누구 없어……! 살려줘, 살려줘!”
그가 한참 동안 땅을 구르고 소리를 질러도 그가 거느리는 형제들은 도우러 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공격을 당하기까지 한 것을 떠올리자, 산적 두목은 자신이 마주한 상황을 점차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의 강렬한 통증과 두려움이 가시자, 고통을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눈앞에는 세 사람이 서 있었는데, 하나는 우아한 서생의 모습을 한 남자였고, 하나는 자태가 고운 낭자였으며, 다른 하나는 성인 키 반만 한 소년이었다. 만약 다른 상황에서 이들을 마주쳤다면 산적 두목은 곧바로 낭자를 향해 덤벼들었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어느 고수를 만났다고 여기며 두려워했다.
“이, 이보시오, 살려주시오! 무슨, 무슨 오해가 있는 듯하오…….”
“이 비수, 어디서 난 거지?”
택의 눈에 선 핏발이 더욱 짙어지자, 이제 택의 두 눈이 온통 빨개져 무척 괴이해 보였다. 이에 산적 두목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비수는 확실히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이었지만, 너무 두려운 탓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그건 다른 이가 제게 준 것입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라! 묘동촌 백성들을 죽이고 뺏은 게 아니냐!”
그러자 산적 두목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다는 걸 깨닫고 얼른 억울하다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백성들을 죽이고 뺏어온 게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이건 일 년 전에 여기를 지나던 상인에게서 뺏어온 겁니다. 결코 마을 하나를 도륙 내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제 형제들을 모두 합해도 채 서른 명이 안 되는데, 어떻게 감히 마을을 쳐들어가겠습니까? 그랬다간 최소 백 명이 넘는 농사꾼들이 낫이며 도끼를 들고나와 저희를 결딴낼 것입니다!”
그가 흥분하여 목소리를 키우자, 오른쪽 눈을 막은 틈새로 피가 더욱 많이 새어 나왔다. 택은 그 말에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으나, 약간 망연자실한 듯 보였다.
“마념(魔念)을 가진 것 자체는 두려운 게 아니다. 두려운 것은 마념에 휘둘리게 되는 것이지. 설령 진마(眞魔)라고 해도 모두 이성을 잃고 날뛰지는 않는단다. 진마라도 해를 피하고 이익을 따를 줄 안단다. 오늘 네가 만약 무고한 사람을 잘못 죽였다면 평생 후회와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설령 이자가 정말로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더라도, 일단은 가족들을 위해 사실을 명확히 밝히는 게 먼저다. 또한 이자가 네 할아버지를 죽인 자가 맞다더라도, 마을 사람들을 죽인 자는 이 사람 혼자만이 아니잖니? 네가 마념에 사로잡혀 제대로 묻지도 않고 이자를 죽이면, 이자 말고 다른 원흉은 잡지 못하게 된다.”
택이 산적을 바라보는 눈길은 싸늘했으나, 계연과 진수를 볼 때면 그 눈길은 살짝 부드러워졌다.
“선생님, 이자의 말이 사실인가요?”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하고 대답했다.
택은 그 말에 비수를 꼭 쥐더니 산적 두목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칼이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억! 어흑……! 윽!”
산적 두목은 손으로 목을 감싼 채 입으로 ‘억억’ 소리를 내며 땅을 굴렀다. 그의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
반면 택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금 전 그의 머릿속은 온통 이자를 죽이고 싶고,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속에 들끓는 불길이 곧 가슴을 찢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