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화. 귀성(鬼城)에서의 만남 (1)
“택, 너 방금 엄청 무서웠어!”
진수는 그렇게 말하며 택에게 다가가 택을 경련하는 산적 두목에게서 멀리 떼어 놓았다. 그리고는 계 선생님이 택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조심스럽게 계연을 살폈다. 그녀는 도행이 높지 않았지만, 조금 전 택의 모습이 어딘지 이상했다는 것만은 알았다.
계연은 법안을 활짝 연 채로 택과 산적 두목,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천지를 바라보았다. 과연, 택의 마념은 이 구봉 동천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택은 다시 이성을 되찾자마자 두 손에 잔뜩 묻은 피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덜덜 떨었다. 진수가 곁에서 그를 위로해주자, 택은 마침내 조금 진정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계연을 살폈다. 계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거리낌이나 노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무척 엄숙해 보였다.
계연은 택의 호흡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자, 숨이 끊어진 산적 두목을 잠시 바라본 뒤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진수는 얼른 택을 부축하며 끌어당겼다.
“이리 와, 어서 계 선생님 따라가야지.”
진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이유 없이 초조했다. 그러니 택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은 석상처럼 굳은 산적들을 바라본 뒤 얼른 계연을 뒤따라갔다.
하늘은 점차 어두워졌으나, 금방 비를 내릴 것 같았던 먹구름이 흩어지며 날씨는 오히려 맑게 개었다. 이에 별빛과 달빛이 산길을 환히 밝혔다.
택과 진수는 계연을 뒤따라가며 침묵을 지켰다. 한참 후, 택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계 선생님, 제게 화나셨나요?”
계연은 그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화가 나지는 않았다. 네가 한 행동의 결과는 내 책임이 아니니까. 내가 네게 따로 당부한 말도 없었고 말이야.”
택은 빼어나게 총명한 머리는 타고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어서, 자신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고 했어도 계 선생님이 여전히 화가 났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한 짓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에 그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계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저자들은 죽어도 싸다고 여기셨잖아요. 택도 방금은 너무 화가 나고 슬픈 마음에 그랬을 거예요……. 저런 나쁜 놈들 때문에…….”
진수가 계연에게 이런 말을 하기까지는 엄청난 압박을 이겨내고 운을 뗀 것이었다. 택과 수선자인 자신은 달랐다. 진수는 성정이 활발했지만, 그래도 계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는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특히나 계 선생님이 이토록 엄숙한 표정을 짓고 계실 때는 말이다.
계연은 약간 누그러진 표정으로 걸음을 늦추고는 두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누군가를 죽이는 것을 무작정 반대하는 건 아니란다. 저 산적들은 그간 쌓은 악업이 셀 수 없을 테니, 살해되어도 감히 억울하다고 말하지 못할 거야. 다만 네가 저자를 죽인 이유가 정말로 악인을 벌하려는 목적이었니?”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택을 바라보았다. 그 물음에 택이 무의식적으로 계연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계 선생님의 평온한 두 눈을 마주치자, 택은 마치 그가 자신의 마음속을 낱낱이 꿰뚫어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부끄럽고 혼란스러웠다.
“마음에 마(魔)가 생겨나면, 마로 변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이번엔 산적을 죽였지만, 다음번에는?”
계연의 가벼운 물음에 담긴 뜻이 택에게도 전해진 듯, 택은 두려운 가능성을 마주하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계연은 택의 마음속에 생겨난 두려움을 모두 녹여낼 듯한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마도(魔道)를 걸으면 인간성(人性)을 잃게 된다고 하지만, 사실 마성(魔性)과 인간성은 언제나 네 안에 공존하고 있단다. 오직 진마(眞魔)만이 그 예외지. 진마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이지(理智)를 갖고 있겠지만,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자들이 많다. 진마만은 정말로 인간성을 완전히 소멸할 수 있어.”
계연이 여기서 말하는 인간성은 아주 넓은 범위에 적용되어, 사람뿐만이 아니라, 요괴와 신령을 포함한 여러 생명체를 이르는 말이었다.
“네가 이 말을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말하려는 뜻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했을 것이다.”
계연이 말한 마도며, 마성과 인간성, 진마라는 말을 글자도 모르는 시골 소년인 택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다만 택은 이 모든 게 자신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택의 눈에 떠오른 두려움을 알아챈 계연이 택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는 격려의 뜻이 담긴 동작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부드러운 법력을 택의 몸에 퍼뜨려 주는 과정이었다. 고작 이 정도로 마념을 누르진 못할 테지만, 대신 택의 육신과 영혼에는 부드러운 온기가 스며들었다.
실은 계연이 사실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한 부분이 있었다. 장택에게 생겨난 마념은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서, 만약 택이 맞닥뜨린 것이 산적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마념으로는 장택의 판단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년의 마음에는 도덕적 기준이 잘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념의 영향을 걷어내고 본다면, 이 소년은 본디 천진하고 거짓이 없는 마음(赤子之心)을 지니고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처음 택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을 때 계연이 느꼈듯이 택은 조금도 위선이 없고 마음이 맑은 소년이었다. 그 때문에 계연은 택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너는 마귀가 아니고 장택이야. 만약 조금 전과 같은 감각이 다시 생겨나고, 정말로 억누르기 힘들다면 방식을 바꿔보렴. 자신에게 규칙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잘못한 것이고, 지키면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몸 안에 따뜻한 기운이 퍼져나가자 택은 조금 전의 두려움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택은 자신이 계 선생님의 뜻을 완전히 알아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연신 계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자, 지금은 그리 많은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오늘 밤에는 저승에 갈 테니 말이야.”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다시 걸음에 속도를 올렸다. 진수가 택은 나란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런 와중에도 택은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규착을 세워서, 어기면 잘못이고 지키면 잘해 낸 거야…….”
계연은 시선을 앞에 두고 있었지만 계속 택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심지어 법안도 계속해서 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소년이 가진 집념에는 죽은 가족들을 다시 살리겠다는 것 외에도 풀지 못한 원한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 저승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게 해주면, 그가 마음의 응어리를 풀고 세상을 다시 받아들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택이 가진 마념은 고향 마을이 당한 재난에서만 비롯된 건 아니었다. 마성은 완전히 뿌리뽑기가 어려웠다. 마는 집착에서 생겨난다는 말처럼, 이성이 없이 제멋대로 날뛰거나 혹은 교활하고 사악한 마귀라 할지라도 모두 그 집념이 향하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계연은 자신이 택을 도와 택이 지닌 마성을 없애지 못할지라도, 그 근본이 되는 집념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북쪽 산자락에 다다르자 세 사람도 마침내 산적들이 말한 야영하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경계를 드러내는 이들을 보며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곧바로 지나쳤다. 그러자 드넓은 황무지 저 너머로 북령군성이 보였다.
이각(二刻)도 채 안 되어, 세 사람은 북령군성에 도달했다. 성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이는 계연에게 별문제가 되지 못했으므로 세 사람은 어느새 군성 안의 큰길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밤중인 북령군성 안은 날씨가 쌀쌀했고 지나다니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밤바람이 길 한쪽에 버려진 오래된 대바구니를 이리저리 굴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성황당으로 향하는 내내 세 사람은 야경꾼이나 순찰하는 관차(官差: 관아에서 파견하던 아전)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우연인지, 아니면 이 성에서는 아예 야간 순찰을 하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계연은 저승의 야간 순시관이 돌아다니지 않는 데에는 그다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구봉 동천에는 요사한 것들이 살지 않으니, 굳이 순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게으름을 피우는 데에 있어서는 사람이나 귀신이나 그리 다를 바가 없었다.
택과 진수는 계연을 따라 걸으며 점점 앞쪽이 어두워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각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뒤이어 음산하게 느껴지는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들은 자신들이 저승에 가까워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성황당의 모습이 점점 더 모호해지더니, 택과 진수가 다시 앞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자 눈앞에 관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 앞에는 드문드문 저승의 관차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선뜩한 귀기(鬼氣)가 느껴졌다.
계연은 눈썹을 찡그리며, 관문의 수비가 바깥 세계의 저승에 비해 너무나 허술하다고 생각했다.
“멈춰라! 이곳은 삼엄한 저승 관문이다. 대체 어디에서 온 귀신이냐?”
그들은 계연의 일행을 떠도는 귀신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계연이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자, 관차들은 이 세 사람에게서 귀기가 느껴지지 않고, 꿈을 꾸다가 혼이 빠져나와 떠도는 평범한 사람들도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혹, 천계(天界)에서 오신 선인이십니까?”
관차 하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영패를 내밀었다.
“저희는 구봉산에서 왔습니다. 여기, 구봉산의 신물(信物)이에요. 확인해 보시고 통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계연이 건넨 것은 위에 ‘오뇌청령(五雷聽令)’이라고 적힌 구봉산의 영패였다. 관차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어 영패를 받으니, 손에 닿자마자 전류가 흘렀다.
치지직!
“어이쿠! 쓰읍…….”
저승의 관차는 얼른 손을 거두더니, 잇새로 숨을 들이마시며 계속해서 손가락을 비볐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선장(仙長)! 지금 바로 가서 알리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떠나는 관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표정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계연은 영패의 ‘오뇌청령’이라는 글자 위로 선광(仙光)이 흐르는 것을 보며 의혹을 느꼈다.
이곳 저승의 귀신들이 구봉산 선문을 경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저승의 관차가 이 영패를 들지도 못하는 건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곧이어 귀문관 앞으로 저승의 판관이 다급히 달려 나오더니, 계연의 일행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읍했다.
“저승 판관이 세 분 상선(上仙)을 뵙습니다. 자, 어서 들어오십시오! 상선께서 무슨 분부가 있으시거든 뭐든지 명만 내려 주십시오!”
계연은 그의 뒤쪽을 살피자 성황신은 나오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계연은 이런 겉치레를 중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일만 처리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판관 대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산 남쪽의…….”
계연이 사정을 설명하자 듣던 판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들을 데리고 저승의 귀성(鬼城)으로 향했다. 판관은 관차 하나에게 얼른 먼저 가서 택의 가족들을 데려오라고 명을 내린 상태였다.
저승에 들어서자 택과 진수는 모두 긴장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택은 긴장한 와중에도 표정에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진수는 귀성 안이 온통 무서운 악귀로 가득한 곳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성 안에 들어서자 그 안이 이승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느끼고 둘은 크게 안심했다. 행인들이 많이 돌아다녀 조금 번잡스럽기도 했다. 다만 하늘이 흐리다는 것만 달랐을 뿐이었고, 그렇다고 또 먹구름이 뒤덮인 것처럼 어두컴컴한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