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화. 이 보물은 아직 써본 적이 없는데
계연이 저승의 각 기관이 사무를 처리하는 곳에 들어오자, 몇몇 관차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기관장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척 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고, 좋지 못한 기운이 그들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음기(陰氣)와 무척 비슷하여 다른 이들은 잘 알아채지 못할 뿐이었다. 계연이 이렇게 보니, 내내 자신을 안내한 판관의 상태가 가장 좋아 보였다.
곧이어 이승에 있는 성황대전(*城隍大殿: 성황신의 신상을 모시는 성황당 중앙의 정전(正殿))과 똑같이 생긴 건물이 계연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그걸로도 모자라 금제가 걸린 듯 그 위로 법광(法光)이 흘렀다. 계연이 법안을 열어 관찰해보니, 아무리 잘 숨겼어도 마기(魔氣)가 흘러나왔다.
“북령군 성황신, 저는 산 바깥에서 온 수선자인 계연이라 합니다. 잠시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계연의 평온한 목소리에는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맑은 목소리가 저승 곳곳을 메아리치며 많은 귀신의 이목을 끌었다. 그에 따라 귀신들이 점차 성황대전 앞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황대전 안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북령군의 성황신이시여 제가 공손히 청했는데 이렇게 대답도 하지 않으시는 것은 손님을 대하는 적절한 태도가 아닌 듯합니다.”
그제야 성황대전 안에서 북령군 성황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선께서는 천계에서 오셨을 테니, 원래대로라면 소신이 침상에서 일어나 영접하러 가는 게 맞습니다만, 지금은 제가 원기가 크게 상해 금신(金身)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이에 상선의 심기를 거스를까 감히 모습을 드러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부디 상선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꼭 뵈어야겠다면요?”
계연이 이렇게 물고 늘어지자 주위의 귀신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냈다.
“저 선장 정말 무례하군!”
“그러게나 말일세. 아무리 천계에서 온 선인이라지만 여기는 저승이 아닌가!”
“선장, 부디 말씀을 가려 하시지요!”
계연이 곁눈질로 모여든 귀신들을 훑어보니,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도 용기를 내는 자가 있었고 이미 험악한 모습을 드러낸 자도 있었다. 저승의 귀신들은 원래가 흉악한 모습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지금 저자들에게서는 불길한 마기가 드러났다.
그때 성황대전 안에서 성황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장. 천계에서는 일찍이 우리 신령들에게 약속한 바대로, 구봉산 선인들은 저승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선장께서는 그 약조를 어기려 하십니까?”
“그저 성황신을 한번 만나 뵙고 싶은 것뿐인데, 무슨 말씀을 그리 엄중하게 하십니까?”
계연은 미소 지으며 주위에서 느껴지는 흉악한 눈빛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리고는 잔뜩 움츠린 진수와 택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었다.
제대로 된 성황신이 아닌 자가 구봉산과의 약조를 들먹일 자격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계연 자신은 구봉산의 수선자도 아니었다.
끼익-.
그때 성황대전의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리며, 검은 관복을 차려입은 거대한 체격의 귀신이 걸어 나왔다. 그 당당한 모습에서는 신령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선장께서 굳이 뵙고자 하신다면, 본 성황신이 나올 수밖에요!”
그러자 주위의 귀신들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성황신을 향해 인사했다.
“성황신을 뵙습니다!”
“성황신을 뵙습니다!”
판관조차 얼굴에 놀라워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저토록 풍채 좋고 당당한 성황신의 모습을 보니 마음의 불안감이 싹 사라지는 듯했다. 오직 계연만이 담담한 눈길로 성황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휴우, 생각보다 더 엉망이군. 성황신 같은 정신(正神)조차 마기에 사로잡히다니, 터주신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이 너무나 크구나. 안타까운 일이야…….”
성황신은 계연을 비롯한 세 사람을 훑어본 뒤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장, 제가 어찌…….”
성황신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계연을 향해 뱃속에서부터 새까매진 손을 뻗쳤다. 하지만 계연은 일찍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왼손 세 손가락으로 천지묘법에 담긴 감산인(*撼山印: 계연이 지은 <천지묘법>에 나오는 결인(結印)으로, 산을 뒤흔든다는 뜻)을 취했다. 그러자 천도(天道)의 기운이 담긴 뇌광(雷光)이 번쩍이며 성황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슈욱……!
콰광!
“으윽……!”
성황신의 일격과 계연의 뇌강이 부딪히자 법광이 눈부시게 폭발했다. 계연은 제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성황신은 계연의 공격에 맞아 신령한 빛을 잃은 채 뒤로 날아갔다. 그때 성황대전 안은 온통 새까만 마기로 뒤덮여 있었고, 때때로 무언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결코 네놈들을 놓아줄 수 없지. 모두 죽어라!”
쿠구구구……!
그러자 성황대전 안에서는 이승의 신상과 똑같은 모습의 거대한 성황신상이 온몸으로 마기를 내뿜었다. 그것은 천천히 일어나면서 점점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귀문관은 이제 닫혔다. 누구도 도망칠 생각은 마라! 이곳은 저승이니, 너희 같은 보잘것없은 수선자는 물론이고, 설령 진선(眞仙)이 왔다 해도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하하하하하……!”
성황신의 목소리가 저승에 쩌렁쩌렁 울리자 귀신들은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적지 않은 귀신들이 마기에 잠식당해 사악한 기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찌, 어찌 이런 일이!”
“성황신께서 어쩌다가 저렇게 되셨지?”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모두 저 선장을 도와 결사일전을 치릅시다!”
…….
계연의 손에는 어느샌가 가느다란 금빛 끈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기세가 대단하구나. 이 보물은 제련한 후로 아직 써본 적이 없는데, 오늘 드디어 써보겠구나.”
이렇게 말하며 금색 끈을 공중으로 휙 던지자, 곤선승이 음기 섞인 바람과 마기 속에서 금빛 용으로 변했다. 그것은 상공에 그 찬란한 금빛을 뿌려대며 저승 전체를 더없이 신성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저게 뭐지? 저…….”
다음 순간, 온 하늘을 뒤덮은 금빛이 아래로 떨어지며 마기가 느껴지는 것들을 속박했고, 성황신을 비롯한 몇몇 문제 있는 귀신들의 몸이 꽁꽁 묶였다. 성황신의 형체는 금빛 그림자가 온몸에 뒤엉키는 동시에 점점 더 작아지더니, 더는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 외 다른 귀신들은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다.
엉망이 된 성황대전 안에서는 성황신과 몇몇 귀신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금빛 끈에 완전히 속박되어 있었다.
계연은 담담한 눈길로 그들을 살펴보다가 느긋하게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이건 곤선승이라는 물건이다.”
악전(*惡戰: 몹시 어려운 싸움)을 치를 각오를 다졌던 귀신들이 채 반응도 하지 못한 사이 모든 상황은 끝나버렸다. 그들은 망연히 성황대전 안에서 금빛 끈에 묶여있는 성황신과 몇몇 귀신들을 바라보았다.
성황대전 안의 귀곡성과 비명 등은 완전히 잦아들었고, 성황신의 물음에 대답한 계연의 한마디만이 메아리쳤다.
조금 전까지 두려움에 떨었던 진수는 곤선승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선래봉에서 다섯 명의 고인들이 모여 제련한 법보가 끈 형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수는 그것을 본 적도 이름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벌어진 상황과 계연이 이 보물을 아직 써본 적이 없다는 말에, 진수는 곧바로 이게 그 법보임을 알아보았다.
어찌 되었든 피 묻히지 않고 끝낼 수 있게 되었으니 가장 좋은 결과였다. 하지만 성황신이 저런 상태인 것을 보고 남은 귀신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계연은 엉망이 된 성황대전 내부와 곤선승에 묶인 성황신을 바라보았다. 이곳을 뒤덮었던 마기(魔氣)도 모두 곤선승에 묶였지만, 대전 안에는 여전히 오염된 기운이 남아있었다.
그 기운은 마기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는 없었고, 신도(神道)의 기운에 저승의 음기, 원기(*怨氣: 원한 어린 기운), 악기(*惡氣: 악한 기운) 등이 섞인 오염된 기운이었다. 오히려 마기 자체는 삿된 성질을 띠고 있을 뿐, 이렇게 오염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구봉 동천 전체에서 악기와 원기가 모여든 곳은 저승뿐이었다. 그동안은 괜찮았을지 모르나, 이 동천에는 본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억눌리다 못해 저승을 돌파구로 삼은 것이다. 그에 따라 저승을 떠받치는 성황신이 가장 큰 화를 입게 된 것이었다.
그간 동천 안에 쌓였던 모든 압력이 저승에 가해졌으므로, 덕이 높은 신령인 성황신조차 버텨내질 못하고 천천히 마도(魔道)에 빠져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사자인 성황신이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사이, 이승의 세태까지 불안해지자 성황신은 더욱 쉽게 원기에 손상을 입게 되었다. 아마 성황신 본인도 어찌 된 일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컸고, 혹은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다.
택에게 나타난 문제도 무척 특수한 편이긴 했지만, 성황신이 당한 것은 그것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계연이 성황신을 향해 한걸음 씩 앞으로 걸어가자, 성황대전 안에 남아있던 오염된 기운이 계연의 발밑에서 스스로 흩어졌다. 성황신은 현재 곤선승의 힘으로 인해 온몸을 덜덜 떨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결한 정신(正神)이 되어, 신령으로서 일생을 음양의 모든 이들을 돌보며 살았는데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되다니…….”
계연의 생각이 움직이자, 성황신을 속박했던 힘이 약간 줄어들어 성황신은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성황신은 엉망이 된 관복을 입은 채로 한껏 험상궂은 표정을 드러냈다.
“너, 너는 누구냐? 구봉산에 너 같은 인물이 있었다니? 새로 들어온 제자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보았구나.”
그러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생각이 맞다. 나는 구봉산 제자가 아니다. 구봉산 장교의 영패를 빌려 일을 처리하러 온 것뿐이지. 이 일은 그만 이야기하고, 언제 자신이 마기에 침식당한 걸 알았지?”
“하하하하…… 하하하하……!”
성황신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계연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던 순간 성황신이 돌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저 하늘 밖에서 온 선인이겠지. 나는 이곳이 구봉선 선인들이 신통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작은 세상일 뿐이라는 걸 안다. 그야말로 산 밖에 산이 있고,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山外有山, 天外有天: 보통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의미로 쓰임)는 말 그대로이지. 이전에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새장 속의 새는 모두 높이 날기를 꿈꾸지, 선장은 그런 괴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나?”
‘산 밖에 산이 있고,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다고?’
저승의 수많은 귀신이 무의식적으로 계연을 바라보았고, 택의 눈길에도 호기심이 가득했다.
성황신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지만, 계연은 그리 화내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산 밖에 산이 있고, 하늘 밖에 또 하늘이 있는 셈이지.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당신 자체도 산 밖의 산이고 하늘 밖의 하늘이다.”
계연은 이렇게 대답하며 대전 바깥에 서 있던 판관에게 물었다.
“판관 대인, 이곳 성황신의 본명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판관이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선장께 아룁니다. 성황 대인의 본명은 안서우(安書禹)라 합니다. 원래 이곳에서 덕행이 어질기로 소문난 명사이셨습니다.”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황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이제 마두(魔頭)였지만 계연을 앞에 두자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스쳤다.
“선장은 바깥 세계에서 온 고인(高人)이 아닙니까? 만약 나를 놓아준다면, 이후로는 반드시 선장의 말에 복종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