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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543화 (543/892)

543화. 하늘이 무너지면 키가 큰 사람이 제일 먼저 떠받치게 된다

계연은 수하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손가락을 뻗어 성황신의 창백한 이마 위에 갖다 대었다.

“북령군 성황신 안서우께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희미한 파문이 계연의 손가락에서부터 퍼져나가 성황신의 온몸을 덮었다. 이미 마기에 잠식당한 성황신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뒤이어 뒤틀린 얼굴로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 흐아아악! 허억…….”

잠시 후, 성황신의 얼굴이 점차 평온해지기 시작하더니,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좀 전보다 눈빛이 온화하고 또렷해져 있었다. 그는 멍하니 눈앞의 계연을 바라보다가 곧 이렇게 입을 열었다.

“죄신(罪神) 안서우, 선장을 뵙습니다!”

“안 성황신, 예를 거두세요. 지금 상황이 이러하니, 속박을 풀어줄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성황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는 저 밖의 귀신과 사람 중 오직 계연과 안서우 둘만이 알고 있었다.

“성황신께서는 언제 자신이 마기에 침식된 것을 알아차리셨나요?”

계연이 조금 전의 질문을 다시 한번 묻자, 성황신이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가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저도 아주 오랫동안 제가 마기에 침식된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시작은 약 6백 년 전부터 집중이 어렵고 자주 피곤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는 생전에 악한 일을 했던 혼백에게 극형을 가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원래 제 직권 안의 일인지라,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아 그런 형을 내렸다고 여기고는 스스로 반성하며 큰 문제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4백 년 전부터 수행에 진전이 없는 것을 느끼고, 점차 초조한 마음이들었습니다…….”

성황신의 설명에 따라 계연도 점차 그가 마기에 잠식된 과정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가장 크게 변화가 생겨났던 때는 바로 이승에 전란이 일며 세태가 어지러워진 시기였다. 평화로운 시기에는 향불을 올리는 이들에 의해 끊임없이 원력(愿力)이 보충되어, 신도(神道)의 힘으로 마기의 침식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세태가 어지러워지면 성황신의 원기가 쉽게 쇠하게 되고, 올리는 향불이 줄어듦에 따라 마기가 우세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성황신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고작 1, 2백 년 전이었다. 성황신은 자신에게 큰 문제가 생겼음을 느끼고는 나라의 대성황신(*한 나라의 수도를 관할하는 성황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그저 폐관하여 홀로 수행을 닦으면 도움이 될 거라는 말뿐이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이다. 그는 마념과 싸우는 도중에 이 세상 밖에 더욱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황신의 설명을 듣던 계연이 그 말속의 요점을 짚어내며 물었다.

“대성황신께서 폐관 수행을 하라고 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보니, 분명 그쪽에도 큰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선장께서 부디 많은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

안 성황신도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때는 제정신이 아닌 터라 알아채지 못했다더라도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성황신 그 자신도 마기에 침식된 것이다.

그러자 계연이 가만히 눈을 감더니 깊이 탄식했다.

이는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레 내려오는 과정이었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지면 키가 큰 사람이 제일 먼저 떠받치게 된다(天塌下來高个子頂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언제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부터 화를 당한다는 뜻)는 말 그대로였다. 택에게 마기의 영향이 닿기까지 얼마나 오랜 세월, 얼마나 많은 이들을 거쳐 이러한 사태로 인한 영향이 층층이 내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계연이 다시 눈을 뜨니 성황신 안서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장, 제 수행길은 이미 끊겼고 원신(*元神: 육체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생겨나, 수행을 시작하면 혼백을 주관하는 역할을 함)도 곧 완전히 소멸할 겁니다. 부디 제가 아직 제정신일 때 제 목숨을 거둬가 주십시오.”

그러자 성황신과 함께 곤선승에 묶여있던 다른 귀신들이 이를 듣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입을 벌려 곤선승을 물어뜯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내뿜는 마기와 악한 기운마저 곤선승에 단단히 묶여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반면 계연은 성황신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성황신, 편히 가십시오!”

그와 동시에 계연의 입에서 삼매진화 한 줄기가 뿜어져 나와, 성황신 안서우와 마두가 된 다른 귀신들의 몸을 뒤덮었다. 뒤이어 회색빛이 섞인 붉은 불길이 타오르며 그들의 형체가 마기와 함께 재로 변했다.

“성황신, 편히 가십시오!”

판관과 상선사 기관장을 포함한 귀신들과 관차들이 잇따라 예를 올리며 성황신을 전송했다.

곤선승은 속박할 대상이 사라지자,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계연에게 돌아와 그의 팔 위를 뱀처럼 감았다.

“선장, 저희는 이제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판관이 계연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황신이 사라진 슬픔만으로는 귀신들의 두려움을 상쇄하기 부족했고, 오히려 불안을 키울 뿐이었다. 판관을 포함한 이들은 계연과 성황신의 대화를 들으며 머리털이 쭈뼛 솟을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다. 곧이어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감이 들자 판관은 계연의 의견을 구하려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평소 하시던 대로 저승의 질서를 유지하시면 됩니다.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니니까요.”

* * *

반 시진(時辰: 1시간) 후, 계연이 북령군 저승을 나오자 바깥은 아직 어두컴컴해서 해가 뜨지 않은 시각이었다.

“계 선생님, 이제 어쩌면 좋죠?”

진수는 수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수선자로서 이런 엄청난 상황을 맞닥뜨리자 잔뜩 긴장한 채로 계연에게 물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외부인이니, 일단 선문에 변고를 알리는 게 먼저겠지.”

계연은 이렇게 대답하며 품 안에서 종이학을 꺼냈다. 종이학은 계연의 손바닥 위에서 스스로 날개를 펴더니,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다 마침내 종이학이 계연을 바라보자, 계연이 영패 하나를 그의 목에 걸어주었다.

영패는 종이학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종이학은 자신이 날개를 펄럭이자 목 아래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영패를 궁금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오뇌청령’이라는 네 글자가 금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뒤이어 계연은 손가락을 뻗어 종이학의 머리에 살짝 눌렀다 떼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그 안에 담았다.

“구봉산으로 가서 조어 장교에게 구봉 동천에 큰일이 났다고 알리렴.”

종이학은 주인의 명령을 받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종내에는 가느다란 흰빛으로 변해 남쪽으로 날아갔다.

“계 선생님……. 그럼, 제 친구들을 만나러 갈 수 있을까요?”

택은 무슨 신선이니 요마니 하는 일은 잘 몰랐지만, 무언가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으니 계 선생님은 어쩌면 계획을 바꾸실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라, 곧 보러 갈 수 있을 거야.”

계연은 이렇게 달래며 종이학이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았다.

종이학은 다른 능력은 그다지 배운 게 없었지만, 넝쿨검에게서 뛰어난 둔술(*遁術: 다른 물질의 도움을 빌려 숨거나 도망치는 술법. 주로 오행(五行)의 힘을 빌림)을 배운 바 있었다. 거리가 엄청나게 멀다면 종이학이 선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북령군은 경천산맥에 닿아있는 곳이었으므로 구봉산 선문에서 아주 가까운 편이었다.

아직 하늘이 밝아오지는 않았지만, 곧 있으면 해가 뜰 시각이었다. 계연이 진수와 택을 데리고 북령군성 안에서 아침밥을 먹을 만한 곳을 찾고 있을 때, 종이학은 이미 짙은 안개를 헤치고 아홉 좌의 봉우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종이학의 목에는 영패가 걸려 있었으므로 구봉산의 금제와 진법은 종이학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누군가 종이학을 발견하더라도, 잠시 쳐다보다가 곧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구봉산의 고인(高人) 대부분은 계연에게 종이로 만들어진 신기한 학 한 마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작은 종이학은 영패를 목에 건 채 곧바로 천도봉으로 향했다. 그때 조어는 천도봉 내 사방 벽이 창문인 탁 트인 누각 안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위로는 구봉산 장경각(藏經閣)의 수사들이 둘러앉아, 선유대회에서 오갔던 토론의 내용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이것이 완성되면 각 선문에 하나씩 보내주어야 했다.

그 순간 조어는 영패가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고는 북쪽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쪽으로부터 빛 한 줄기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조어가 법안을 열어 살펴보니 엄청난 속도로 날개를 움직이는 작은 종이학이 보였다. 종이학에게는 그가 계연에게 준 영패가 걸려 있었다.

‘계 선생의 종이학이 아닌가?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조어처럼 도행이 높은 고인들은 많은 일에 있어, 한번 보기만 해도 마음에 어떤 예감이 스치고 지나가곤 했다. 그리고 그는 종이학과 영패를 본 그 순간,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느꼈다.

가는 곳마다 막힘이 없던 오뇌청령 영패는 누각 앞에서 힘을 잃어, 종이학은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종이학은 자그마한 부리로 영패를 콕콕 쪼아대면서, 자신에게는 이 영패가 있으니 들여보내달라는 뜻을 피력했다.

조어가 누각 위에 앉아 손을 한번 흔들자, 무형의 금제가 스르르 사라졌다. 이에 종이학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 들어오더니, 실내를 한 바퀴 빙 돌고는 조어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조어는 이 특이한 종이학을 향해 물었다.

“계 선생님께서 내게 전달하라고 하신 말이 있느냐?”

그러자 종이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바닥을 가볍게 쪼았다. 그와 동시에 희미한 빛 한 줄기가 퍼지더니 계연이 보낸 내용이 그에게 전해졌다.

조어는 처음에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로 듣고 있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대경실색한 표정이었다. 그는 계연이 전해온 소식을 모두 들은 후에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 멀리 북쪽을 바라보았다.

장교 진인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본 수사들은 깜짝 놀라는 동시에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그들 중 항렬이 가장 높은 수사가 질문했다.

“장교 진인, 하계(下界)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이치대로라면, 무언가 번거로운 일이 생겼더라도 장교의 영패가 있으니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어야 마땅했다. 게다가 영패를 가지고 간 사람은 ‘그’ 계 선생이기까지 했다.

조어는 종이학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다가 깊이 탄식했다.

“구봉 동천에 큰일이 생겼네. 각 봉우리의 지사(知事)들을 소집하고, 천명종(天鳴鐘)을 울리게.”

“천명종을요?”

“예?!”

실내에 자리한 수사들이 모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동천에 무슨 일이 생겼길래 천명종까지 칠 정도란 말인가?

모든 수행의 성지(聖地)에는 하나 혹은 여러 개의 특수한 법기(法器)가 존재했다. 그것은 주로 경고를 하거나 수사들을 소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구봉산에는 두 가지 법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천명종이고 다른 하나는 진산종(鎭山鐘)이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모두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음(傳音) 또는 다른 법력이 걸린 매개체를 보내거나, 곧장 상대를 찾아가는 게 더 일반적이었다.

천명종이 울리면 무언가 긴박하고 엄중한 일이 생겼다는 뜻으로, 그 독특한 도음(道音)은 폐관 수행을 하는 수사들도 들을 수 있게 구봉산 전체에 퍼졌다. 그것이 울리면 구봉산 각 봉우리의 지사들과 수행을 닦은 지 오래된 항렬이 높은 진인들은 즉시 천도봉으로 모여야 했다. 반면에 진산종은 그보다 더 특수한 경우에만 쓰였다. 바로 구봉산 선문의 생사존망이 걸린 엄청난 재난이 닥쳤을 때만 울렸다.

댕- 댕- 댕-!

천명종이 울리자 구봉산 전체가 일시에 소란스러워졌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빛무리가 모두 천도봉을 향해 날아올랐다. 또한 구봉산의 진법이 완전히 가동되어 아홉 좌의 봉우리가 경천산맥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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