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여인은 자라면서 여러 번 모습이 바뀐다
계연이 걸음을 멈추자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다시 한번 관찰했다.
“정말 선생님이시군요, 아직 제 눈이 그리 나빠지진 않았나 봅니다! 아, 저는 왕소구(王小九)입니다, 집안에서 아홉째였거든요.”
“아, 이제 기억이 나네요!”
그는 이 노인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예의 있게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왕소구가 무척 기뻐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바로 접니다! 전에는 묘외루에서 점원으로 일했었지요. 한번은 선생님께 다과상을 차려드린 적이 있었는데, 함께 오신 노선생과 제게 고맙다고 인사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제가 거기서 일한 지 2년이 되는 때였는데, 저한테 고맙다고 한 손님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지요!”
그가 이렇게 말하자 계연도 즉시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그때는 바로 이곳 성황신이 자신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했던 때였다.
“선생님이 아직 저를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참, 제가 지금 채소를 팔고 있는데, 여기서 보시고 원하시는 게 있으면 가져가세요. 제가 정성껏 기르다가 오늘 아침에 갓 따온 것들입니다. 아주 신선하고 맛있어요!”
“하하하, 괜찮아요. 이제 막 돌아왔으니 집 청소부터 먼저 해야지요. 아궁이에 불을 땔 시간은 없을 것 같아요. 다음에 필요하면 여기 와서 채소를 살게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다음에 필요하신 게 있거든 언제든 와서 말씀만 하세요! 그나저나 선생님은 정말로 신선이신가 보군요,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시네요!”
노인이 이토록 정답게 반겨주자 계연은 다음에 오겠다고 약속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속으로 영안현에서는 이제 예전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곧 영안현에서 ‘작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계연은 성에 들어와 그를 알아본 노인을 빼면, 그 후로는 길에서 낯익은 얼굴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다. 이것이 오히려 정상적인 상황일 것이다. 계연은 영안현에 있을 때도 그리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았던 터라, 그를 아는 사람은 대부분 천우방 근처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 계연은 천우방 근처 골목에서 연말연시나 명절에도 거의 빈자리가 없던 손기노점이 없다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평소에 손기가 설거지용으로 쓰던 커다란 항아리만이 홀로 서 있었다.
계연은 물항아리의 나무 뚜껑이 제대로 덮여 있고, 그 안에 가득 담긴 물도 깨끗한 걸 보고는 손가락을 접어 점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소 띤 얼굴로 천우방을 향해 걸어갔다.
시간은 아직 오전으로 출타할 사람은 모두 집을 나간 시각이고, 돌아올 시간이 되려면 멀었으므로 원래도 조용했던 천우방은 거의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쌍정포에는 여전히 부녀자들이 모여 앉아 빨래를 하며 열띤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하지만 계연이 천우방 깊이 들어갈수록 주위는 더욱 조용해졌다. 드디어 저 멀리 낯익은 나무가 계연의 눈에 들어왔다. 대추나무는 계연이 온 것을 알아차린 듯, 영기(靈氣) 섞인 바람을 따라 나뭇가지를 가볍게 흔들었다.
집 앞에 도착한 계연은 거안소각의 편액을 잠시 바라보다가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었다. 이번은 다른 때와 달리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 그 낯익은 광경에 계연은 드디어 집에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오직 거안소각만이 계연에게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종이학은 벌써 계연의 품 안에서 나와 대추나무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자 대추나무도 가지를 무척 격렬하게 흔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계연은 종이학과 저 대추나무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기쁨과 분노 같은 투박한 감정만이 아니라, 어쩌면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때 종이학은 대추나무에게 이번 여정에 대해 들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과 어디를 갔고, 무슨 일을 했으며 누구를 만났는지 말이다. 뒤이어 계연은 검의첩을 꺼내 주옥(主屋) 바깥쪽 벽에 걸었다. 그러자 거안소각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와, 집에 돌아왔다!”
“거안소각에 왔구나!”
“돌아왔다, 드디어 돌아왔어!”
“누가 대추 훔쳐 갔는지 한번 세봐.”
“아, 맞아! 어서 세어 보자!”
“누가 감히 이 대추를 훔쳐 가겠어?”
“어딘가에는 그런 멍청이가 있을 수도 있지!”
“포진(*布陣: 전쟁, 경기 등을 위해 진을 치는 것), 포진! 다시 싸워야 할 때가 왔다!”
“우리 좀 기다려줘!”
“어서 진을 쳐!”
작은 글자들은 대추나무를 감싸고 돌며 진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전투’를 시작했다.
계연은 그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가 보따리 안에서 푸른색과 흰색 옷을 꺼냈다. 그리고는 보따리를 다시 소매 안에 넣지 않고, 그대로 탁자 위에 올려둔 뒤에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쌓인 먼지는 없었지만, 궤짝에서 이불과 요 같은 것을 다시 꺼내야 했으니 말이다.
* * *
이날 오후, 영안현에서는 손아아가 손에 서책을 든 채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목적지 없이 이리저리 거닐었다. 누군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면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꾸하는 게 전부였다. 마치 손아아는 사람들과 별로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복숭아색의 심의(*深衣: 상의와 하의를 따로 재단해 만든 뒤 그 둘을 재봉해 붙인 것으로, 유학자들이 주로 입던 두루마기와 비슷한 옷)를 입고 있었다. 손아아는 영안현에서는 용모도 재능도 모두 출중하기로 유명했으므로 자연히 행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조용히 있고 싶었던 손아아는 그녀와 잘 알거나,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말을 건넬 때마다 약간 짜증이 났다.
‘영안현에서 어디가 제일 조용하더라……?’
멍하니 걷던 손아아의 발길이 저도 모르게 천우방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천우방 입구에 놓인 커다란 물항아리를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할아버지가 장사하시던 곳까지 걸어오다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오래된 석문(石門) 위에 적힌 ‘천우방’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계 선생님도 안 계시는데, 천우방에 가 봤자…….”
손아아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천우방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거안소각 주위는 조용했으니 대문 앞에 잠시 앉았다 가도 되겠지.’
그녀는 천우방 안에서도 아는 이들을 만나는 걸 피하지 못했다. 어릴 때 자주 거안소각에 왔었을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바로 이 앞에서 장사를 했으니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는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다행히 깊이 걸어 들어갈수록 오가는 이가 없어 조용했다.
손아아가 쌍정포를 지나 낯익은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저 멀리 거안소각과 우뚝 솟은 잎이 무성한 대추나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거안소각과 천우방 다른 이웃들이 사는 집들은 꽤 떨어져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동안 여기에는 새로 지은 집이 하나도 없었다. 비록 풍수가 안 좋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손아아는 그런 헛소리를 믿지 않았다. 계 선생님이 사는 곳이 어찌 풍수가 나쁠 수 있겠는가?
손아아는 그제야 편안한 듯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기분을 떨쳐냈다. 거안소각 앞에 도착해 대문 앞에 앉기 직전, 그녀는 그 위에 걸려 있던 자물쇠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설마……?’
손아아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심장이 점차 빨리 뛰는 것을 느끼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었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가볍게 열리자, 손아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넓은 소매의 회색 장삼에 옥 비녀를 꽂아 머리를 고정한 남자가 뜰 안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힘껏 눈을 문질러봤지만, 눈앞의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들어오렴, 거기서 멍하니 무얼 하고 있느냐?”
계연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손아아는 단번에 눈물이 차올랐다.
“선생님, 돌아오신 거예요? 저, 저, 문을 두드리는 걸 잊었어요…….”
그러자 계연이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들어오렴.”
“네!”
손아아는 거칠게 소매로 얼굴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손아아가 걸어가며 계연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해보니, 떠났던 것이 마치 어제인 것처럼 계 선생님의 외모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계연도 마찬가지로 손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라기도 해서, 그의 잘 보이지 않는 눈에도 아아의 형체가 좀 더 뚜렷하게 보였다.
“여인은 자라면서 모습이 여러 번 바뀐다더니, 내 하마터면 너를 알아보지 못할뻔했구나.”
“헤헤, 선생님, 저 좀 예뻐졌죠?”
그러자 계연이 혀를 차며 농담을 던졌다.
“그래도 어릴 때가 좀 더 귀여웠지. 그때는 최소한 울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선생님, 이건 기쁨의 눈물이에요, 다르다고요!”
손아아는 곧바로 그의 말에 반박하며, 어느새 낯선 느낌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선생님은 여전히 그때 그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돌 탁자 앞에 앉아 계연이 자신에게 차를 따라주려는 걸 보고 즉시 주전자를 잡아챘다.
“선생님, 제가 할게요. 헤헤!”
손아아는 눈을 감고서 향을 음미하며 차를 한 입 마시자, 손아아는 그간의 번뇌가 싹 씻겨나가며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잠시 후 눈을 떠보니, 계 선생님이 자신이 가져온 서책을 들춰보고 있었다. 그 책의 이름은 <여덕론(女德論)>이었는데, 계연은 쓱 훑어보자마자 이것이 삼종사덕(*三從四德: ‘삼종’은 여인이 평생 아버지, 남편, 아들 세 남자를 따르는 것이고, ‘사덕’은 여인이 갖춰야 할 순종심, 공손한 말씨, 단정한 용모, 뛰어난 살림살이를 의미함) 같은 말을 늘어놓는 서책임을 알아차렸다.
손아아가 자신을 바라보자 계연이 책을 탁자에 내려놓고 물었다.
“이런 책은 봐서 무얼 하느냐?”
손아아는 계연에 의해 다시 현실로 끌려오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이 망할 책은 지금 아주 유행이거든요. 그리고 저도 이제 열여덟이니 곧 시집을 가야 하잖아요. 이 책은…… 어휴, 말하자면 정말 짜증 나요!”
손아아가 귀를 꽉 막고서 머리를 흔드는 모습을 보고 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모습은 정말 예전 그대로여서, 어딜 봐도 열여덟 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매파들이 하도 찾아와서 문지방이 다 닳을 지경이겠구나?”
“맞아요, 열여섯이 됐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더 심해요……. 할아버지까지…….”
손아아는 불평을 토로하며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까지 제가 열여덟이 되었으니, 이제는 정말 시집가지 않으면 원하는 이가 없을 거래요……. 계 선생님도 매파들이 찾아와 제게 말하는 꼴을 보셔야 해요……. 휴, 이 이야기는 이제 하고 싶지 않아요. 참, 대체 언제 오신 거예요? 왜 저한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막 왔단다, 이제 막 청소를 끝냈지.”
손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의 서책을 집어 들다가, 다시 분노가 치솟은 듯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제일 황당한 것은, 이 책을 쓴 사람도 여인이라는 거예요. 몇 년 전에 출간된 후로 아주 유명해졌어요. 여인이 이런 걸 쓰다니!”
손아아가 이렇게 말하며 화를 내자, 계연은 ‘여인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 여인(*女人何苦爲難女人: 유명한 드라마 제목이자 노래 제목)’이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실은 이와 비슷한 책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이 서책이 좀 더 ‘정교’한 것뿐이었다. 대정국에 아무리 윤 훈장님이 있다고는 해도, 이 사회는 여전히 봉건사회였으니 사람들 뇌리에 깊이 뿌리 박힌 인식은 짧은 시간 안에 변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가장 열받는 건 이게 아니에요. 그거 아세요? 혼담을 넣으러 온 이들 중에 어느 대단한 집안이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보낸 매파가 꼭 저한테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처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얌전히 앉아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그 말에 맞장구치는 게 아니겠어요? 할아버지는 좀 나은데, 그래도 제가 부귀한 집안에 시집가길 바라세요…….”
손아아는 이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털썩 엎드리더니 짜증을 내며 눈을 홱 뒤집었다.
“선생님, 제 기분을 아시겠어요?”
“나는 여인이 아니니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충분히 이해는 가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