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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가기연-555화 (555/892)

555화. 살아 숨 쉬는 듯한 글자 (1)

매파 일행이 떠나자 계연도 마침내 손씨 일가와 모두 인사를 마쳤다. 그러자 손아아와 그녀의 부모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가고, 손복과 그의 두 형들만 남았다. 손복은 그의 다른 두 아들을 불러 세우지 못한 것을 약간 아쉬워했다.

저녁 식사는 손복이 직접 나서 실력을 발휘했고, 손아아의 부모는 주로 옆에서 거들기만 했다. 계연은 응접실 입구에 서서 주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안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아의 아버지가 바삐 움직이고 손복이 때때로 그를 꾸짖는 것을 보면서, 그는 어쩌면 손기의 국수 맛이 대를 이어 전수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무얼 보고 계세요? 여기 와서 어서 앉으세요. 곧 요리가 다 될 거예요!”

손아아가 대청에서 그를 불렀다. 그 안에는 이미 원형 식탁이 놓여 있었고, 주위로 의자가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 함께 식탁이 둘러앉았다. 식탁 위에는 생선과 고기 요리는 물론이고, 손씨의 국수와 양 내장 요리도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상석에 앉은 계연에게 가장 먼저 술을 대접했다. 이에 계연도 거절하지 않고 몇 잔을 연달아 받아 마셨지만, 그의 얼굴은 술을 마시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간의 있었던 일을 모두 주고받자, 마침내 다시 손아아의 혼사로 화제가 돌아왔다. 손복은 계연에게 다시 술을 한 잔 따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 선생님, 아아가 오늘처럼 잘 자란 것은 선생님께서 저 아이에게 글씨를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 아이도 혼인을 논할 나이가 되어, 좋은 상대를 골라야 할 때입니다. 조금 전에 그 풍씨 집안을 어떻게 보십니까?”

손아아가 듣자마자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대답했다.

“할아버지, 그 풍씨 가문의 공자, 춘혜부에 있을 때 봤었다니까요, 전 그 사람이 싫어요!”

“혼사는 예로부터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것이니, 소란 피우지 말아라!”

손아아의 부친이 이렇게 꾸짖자 아아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자리를 떠나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계연은 씹던 음식을 마저 삼킨 뒤,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복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예전에 제가 손씨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도 된다고 했었지요. 그 기회를 아아의 혼사에 쓰시려고요?”

계연이 웃으며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손복은 황망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지만, ‘예’라는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보세요!”

손아아가 다시 응접실로 돌아와 자신이 쓴 글을 계연의 눈앞에 펼치자, 계연은 눈앞이 단번에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글자는 부드러운 물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야말로 글자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하였는데, 심지어 자세히 보면 그 안에 물이 얼어붙어 만들어진 고드름처럼 굳센 기세가 느껴졌다.

“좋은 글씨구나!”

“선생님, 손씨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선생님을 찾아도 된다지만, 다른 이들은 제 입장을 대변하지 못해요!”

손아아가 낭랑한 목소리로 힘차게 말하자 계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계연은 굳이 다른 이들에게 더 질문하려 하지 않고, 아아의 손에서 서첩을 받아 자세히 살폈다.

보면 볼수록 아아의 서체가 지닌 독특함이 느껴졌다. 생동감과 부드러움 가운데에 은은하게 숨겨진 기세가 엿보였다.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 서첩 위의 글씨는 손아아 자신 그대로였다. 그녀의 마음은 청정함을 갈망하면서도 사방에 거센 물결이 일고 있었다. 이는 변화를 갈망한다는 뜻인 동시에,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했다.

“계 선생님, 제 글씨가 어떤가요?”

손아아가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묻자, 계연이 솔직하게 칭찬해 주었다.

“대가의 작품이라고 불릴 만하구나! 분명 많은 이들이 네게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했겠지?”

그의 칭찬은 전혀 과장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몹시 자제한 편이었다. 손아아의 글자에는 계연의 가르침의 진수(眞髓)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글씨는 윤재성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는데, 이는 계연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계연의 칭찬에 손아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있긴 있었어요, 많지는 않았지만요. 이 서첩을 쓰고 난 후로는 밖에서 글씨를 쓰지 않고 집에서만 연습했거든요. 꼭 지금 제 상황처럼 글씨도 이 수준에서 멈춰있는 상태예요. 만약 제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계연이 다른 이들을 둘러보자, 그들도 손아아의 글씨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모두 글을 몰랐지만, 그래도 아아의 글씨가 아주 아름답다는 건 알았다. 다만 그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손복은 계연이 그들을 훑어본 다음 다시 서첩을 바라보기만 하고, 자신의 보배인 손녀딸의 말투에 원망이 묻어나는 걸 느끼자, 어색한 분위기를 풀려고 급히 입을 열었다.

“동명(東明)아, 어서 주방에 가서 화조주(*花雕酒: 쌀로 빚어 여러 해를 묵힌 황주(黃酒))를 좀 더 가져오너라. 이건 곧 다 마시겠구나. 옥란아, 너는 솥에 아직 삶은 고기가 남은 게 있으니 좀 더 퍼오너라.”

“예!”

“예, 아버님!”

그들은 빈 술주전자와 빈 접시를 들고서 자리를 떠났다. 손복은 아직 술이 조금 남은 술주전자를 기울여 계연과 자신의 두 형제에게 각각 따라주면서, 제 손녀딸을 한껏 칭찬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자자, 계 선생님, 늙은이가 한 잔 더 채워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형님, 셋째 형님도…… 다들 받으시지요, 하하하……. 우리 아아가 이토록 학문이 뛰어나니, 정말 가문을 빛내는 아이입니다! 어디 감히 자기들이 와서 아아를 고른답니까, 우리 아아가 골라도 모자랄 판에!”

웃으며 자신을 달래면서도, 아직도 은근히 자신이 시집가기를 바라는 듯한 할아버지의 말투에 손아아는 화도 나고 웃기기도 했다. 그녀도 현실적인 문제를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였다.

“할아버지, 그리고 둘째, 셋째 조부님, 적게 드세요. 계 선생님은 주량이 세지만, 할아버지들은 연세가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고요!”

“괜찮다, 괜찮아. 오늘은 기쁜 날이니 말이야!”

“맞아, 맞아. 한 잔 더 따르려무나!”

그들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아를 향해 웃으며 대꾸하자, 아아는 답답한 마음에 계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계연은 여전히 서첩을 손에 들고서 글씨를 보는 듯, 또 아닌 듯도 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식탁에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자 손아아는 어렸을 때 거안소각에서 자신이 쓴 글씨를 계 선생님께 보여주던 때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손아아의 부모는 함께 주방으로 와서 한 명은 고기를 가득 퍼담고, 다른 하나는 화조주 단지에서 주전자로 술을 퍼 담았다. 그러다 손아아의 모친이 불이 환히 밝혀진 응접실 방향을 보더니, 쭈그려 앉아 술을 담는 남편의 등을 팔꿈치로 툭 치며 말했다.

“여보, 만약 우리가 계 선생님께 손씨 집안을 부귀한 집안으로 만들어달라고 하면 들어 주실까요?”

그 말에 손아아의 부친도 마음이 동한 듯, 목을 빼고 응접실 방향을 슬쩍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 될 것이오. 몇 년 전에 부마와 공주께서도 계 선생님을 뵈러 직접 거안소각에 들르셨다 하지 않소? 그러니 우리가 부귀를 얻는 것도 계 선생님의 말 한마디면 가능할 테지…….”

손아아의 부모는 비록 계연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그가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예전에 손아아가 거안소각에 글을 배우러 가면서부터 부부 두 사람은 계연과 윤 재상의 교분은 여전히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들은 계연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는데, 다만 그들의 부친인 손복이 계연에게 가지는 존경심과는 조금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이를 떠올린 부부는 점차 마음이 떨리기 시작했고, 아아의 모친은 남편을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계 선생님께서 오늘 저녁에 하신 말씀이 혹……?”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이렇게 말을 이었다.

“혹 우리 아아를 위해 고관대작의 집안과 연을 맺게 해준다는 뜻이 아닐까요? 듣자 하니 윤 재상께 둘째 아들이 있다던데요!”

“쓰읍…….”

손아아의 부친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즉시 강렬한 흥분에 휩싸였다.

“만약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풍씨 공자 같은 이는 상대도 되지 않겠지!”

두 사람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술과 고기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들이 계연을 대하는 태도는 전보다 훨씬 정성이 담겨 있었다.

“자자, 고기와 술을 가져왔습니다. 계 선생님,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손아아의 부친이 술주전자를 들어 계연에게 따라 주려던 찰나, 그는 계연의 잔에 여전히 술이 가득 담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술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계연은 여전히 온 신경을 서첩에 쏟은 채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오른손 검지와 중지로 식탁을 박자에 맞춰 두드리며, 글씨를 보는 듯도 하고 자신이 만들어내는 박자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앉아라, 앉아, 선생님 방해하지 말고.”

손복의 아들을 향해 손짓하자, 손동명도 얼른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계 선생님께서는……?”

그러자 손동명의 둘째 백부가 술을 한입 입에 머금더니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저러고 계셨다.”

“아…….”

손동명이 다시 아아를 바라보자, 딸아이는 엄숙한 얼굴로 단정하게 앉아 계 선생님의 평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에 자연히 다른 이들도 입을 열지 않았고, 응접실 내의 분위기가 기묘해지며 침묵에 빠져들었다.

한참을 기다리던 손동명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손복 곁으로 다가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버지, 계 선생님께 대신 좀 물어봐 주십시오. 그, 도성에 있는 고관대작 중 혼인할 나이가 된 적당한 공자가 있는지요. 듣자 하니, 윤 재상의 둘째 아드님께서도…….”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손복이 고개를 홱 돌리며 아들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욕심에 눈이 멀어 도를 넘었구나!”

그의 말과 동시에 계연이 내내 식탁을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그는 마치 무언가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처럼, 고개를 들어 단정히 앉아 있는 손아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계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전에 제가 한 말이 어떤 뜻인지 잘 모르시는 듯하니,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계연은 손아아에게 자신의 서법을 전수해 주었고, 오늘 그녀가 자신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 그 진수를 이어받은 것을 보았다. 자신이 가르침을 주었다 하나, 엄밀히 따지자면 손아아는 그와 사제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사제 간에나 가능한 가르침이 전수된 상태였다.

계연은 원래 일반 백성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그저 인간 세상의 일이라 여기며 관여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손아아를 위해 그 전례를 깨려 했다.

계연은 그렇게 말을 뱉은 뒤 잠시 말을 멈추고 잔뜩 기대를 품은 손씨 일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그들의 모습은 모두 흐릿했으나 오로지 아아의 모습만이 또렷했다.

“원하기만 하면 인간 세상의 모든 부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권세, 절세의 무공을 얻거나 높은 덕행을 쌓아 후에 신령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아니면 저와의 선연(仙緣)을 얻어, 오동나무에 올라서서 동해를 내려다보고, 사해(四海)와 동천(洞天)을 모두 유람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손씨 집안은 대대로 저와 깊은 연을 잇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아아를 아주 좋아하고요. 앞서 이야기한 것 중 하나를 고르시면 됩니다.”

그의 말을 듣던 손아아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입을 살짝 벌린 채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저 선생님이 자신의 글에 대해 평가를 해주시길 기다렸던 것뿐인데, 이토록 놀라운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손씨 일가가 모두 넋이 나간 얼굴이었고,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마치 우물에 비친 달처럼, 사당 밖에서 보는 불상처럼 그들에게는 요원하고도 심오하게 들렸다. 그들은 계연이 한 말을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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