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너 내가 보여?
계연은 처음부터 손아아에게 신묘한 술법을 보여주거나, 대단한 술법을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는 가끔가다 말로 짤막한 가르침을 주는 것 이외에는, 주로 <검의첩>을 베껴 쓰도록 했다.
손아아도 게으름을 부리거나 교만하지 않고 무척 열심히 따랐다. 이 정도의 끈기와 노력이 없었다면 계연이 괄목상대할 정도의 좋은 서체를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덧 겨울이 되어 연말에 가까워진 시기였다. 그간 손아아는 매일같이 부지런히 거안소각으로 와서 계연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동안 손씨 집안을 찾아와 혼담을 넣는 이들은 끊이지 않았지만, 손씨 일가의 태도는 이제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일언지하에 모든 혼담을 거절했고, 이에 매파들은 손씨 집안이 좋은 상대를 찾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동지(冬至)가 되자, 하늘에서 깃털처럼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떨어져 내렸다. 손아아는 거안소각의 돌탁자 앞에 서서, 붓을 들고 글씨를 연습하고 있었다. 대추나무는 그녀의 머리 위에 빽빽한 가지를 드리워, 눈송이가 아아의 몸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한겨울이었지만 거안소각의 뜰에 부는 바람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한편 방 안의 탁자 앞에 앉아 <묘화천서>를 뒤적이고 있던 계연은 무언가를 느낀 듯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다시 시선을 서책으로 돌렸다.
* * *
천우방에서는 불길처럼 붉은 털을 가진 여우가 재빨리 쌍정포를 지나쳐 좁은 골목을 통과해 거안소각 바깥에 도착한 상태였다. 여우는 담을 넘어 뛰어들려 하다가, 대문 앞에 자물쇠가 없는 것을 보고는 만면에 희색이 퍼졌다.
그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다가, 거안소각에는 자주 범인(凡人)들이 들른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담벼락 근처로 돌아가 법력을 운용한 뒤 단번에 뛰어넘었다. 거안소각의 편액이나 뜰 안의 대추나무는 그의 그런 행동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호운은 영안현을 오갈 때 항상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동안 적수들의 수가 너무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보다 도행을 많이 쌓았지만, 그래도 되도록 그들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했다.
호운은 땅에 내려선 뒤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방 안에 앉은 계연을 발견했다. 뒤이어 뜰 안에서 글씨를 연습하는 손아아도 발견했다. 이에 호운은 속으로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며 담을 넘어 온 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손아아는 ‘검(劍)’ 자를 다 쓰고는, 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붓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잠시 휴식을 취하려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는 곧바로 얼어붙고 말았다.
새빨간 불길처럼 붉은 털을 가진 여우가 뒷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사람처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우는 돌 탁자를 지나 계 선생님이 계신 방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방으로 향하던 호운은 글씨를 쓰던 소녀가 꼭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에 그가 앞발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보자, 손아아의 시선이 호운의 앞발을 따라 좌우로 흔들렸다.
호운이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손아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침착하게 들렸다.
“너 요괴니? 나 예전에 널 본 것 같은데!”
이에 너무 놀란 호운이 입을 달싹이다가 앞발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너 내가 보여?”
방 안에서 이를 들은 계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잘됐군, 이제 <천지묘법>을 보여줄 수 있겠어.’
호운이 경악한 표정을 짓자 손아아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대답했다.
“이렇게 눈에 띄는데, 안 보이는 게 더 어렵지.”
작은 글자들과 종이학 때문인지, 혹은 예전에 호운을 한번 봤었기 때문인지, 아아는 그가 어쩐지 눈에 익다고 생각하며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요괴인 호운이 더욱 놀란 상태였다.
호운은 계연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책을 읽는 것을 보고는, 앞발을 땅으로 내려 돌탁자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손아아와 눈을 맞췄다.
“네가 손아아지?”
그러자 손아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도 날 아는구나! 예전에 내가 널 봤었지, 그렇지?”
호운이 손아아의 몸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인간의 기운을 킁킁 맡았다. 그녀에게서는 선인이 가진 영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손아아의 도행이 호운 자신보다 높다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이는 결국 손아아가 보통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내가 요괴인 걸 알면서도 무섭지 않아?”
“네가 무섭게 생겼니?”
손아아는 호운의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고, 심지어 손을 뻗어 그를 살짝 밀어내기까지 했다.
“내 글씨 밟지 않게 조심해. 아직 먹물이 안 말랐어.”
호운이 무의식적으로 아아의 말에 따라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다 탁자 위의 글자를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오른발로 선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네가 쓴 거야?”
“당연하지, 선생님이 쓴 거면 이것보다 더 보기 좋을 테니, 당연히 내가 쓴 거지.”
호운은 다시 고개를 들어 손아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뿌듯한 자부심이 느껴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이 글자를 본 것만으로 호운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정말 잘 썼다!”
호운은 앞발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아아의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원래 이 대정국에서 계 선생님의 글씨가 제일이고, 윤 훈장님이 그다음이며, 윤청이 세 번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아의 글씨를 보니, 윤 훈장님이 뒤로 밀려나야 할 듯했다.
그는 아아의 실력을 진심으로 칭찬한 뒤 탁자에서 뛰어내렸다. 손아아도 자신을 볼 수 있는 데다, 계 선생님께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셨으니 그도 이제는 조심스럽게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이에 그는 계연이 앉은 방문 앞으로 가서 앞발을 모아 읍했다.
“호운이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호운이 계연에게 인사하는 동시에, 대추나무 위에 있던 종이학이 날아와 호운의 머리 위에 앉았다.
그러자 계연도 마침내 서책에서 시선을 옮겨 붉은 털을 가진 여우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몇 년 만나지 않은 사이에 훨씬 예의 발라졌구나.”
그의 말에 호운이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긁적이자, 그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종이학이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호운은 종이학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계연을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저도 영원히 우규산에 있고 싶진 않으니까요, 항상 노력해야지요……. 참, 계 선생님, 언제 오신 거예요?”
“돌아온 지 아직 몇 달 되지 않았다.”
계연은 이렇게 대답하고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손아아에게 호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여우는 호운이라고 한단다. 우규산에서 수행하는 여우 요괴지. 하지만 어르신들이 옛이야기를 해줄 때 등장하는 그런 사람을 해치는 사악한 요괴는 아니야, 호운은 아주 착하거든.”
그러자 손아아가 웃으며 걸어와 호운을 향해 공수한 뒤 읍했다.
“소녀 손아아, 인사 올립니다.”
그녀의 정중한 예를 받은 호운은 무척 쑥스러워하면서도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돌려 계연에게 말했다.
“계 선생님, 제가 새로운 능력을 갖게 되었어요! 어떤지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의 물음에 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호운의 온몸에서 부드러운 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마침내 호운은 짧은 붉은색 마고자를 입은 젊은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선생님, 보세요. 저도 사람으로 변할 수 있어요!”
“대단하구나. 환각을 이용한 흔적도 아주 희미하고, 환술(*幻術: 남의 눈을 속이는 술법) 중에서도 아주 괜찮은 실력이구나. 다만 요기(妖氣)를 숨기기가 어렵고 기운의 상(相)도 그대로여서, 도행이 높은 자나 신령들 앞에서는 정체를 들키고 말겠구나.”
뒤이어 계연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이가 좀 든 개들은 네게 괴이한 점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겠구나. 특히 사찰이나 신당에 공양했던 음식을 먹은 개들은 더욱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그의 말에 호운의 안색이 즉시 나빠졌다. 개조차 완벽히 속일 수 없다니, 이는 그에게 있어 너무 절망스러운 소식이었다.
한편 계연의 말을 들은 손아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시골 마을이든 성에 사는 이들이든 전부 개를 키우더라니…….”
예전에 손아아는 자기 할아버지에게서 어디든 흔히 보이는 누렁이나 흑구(黑狗) 또는 점박이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영성(靈性)이 뛰어나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게다가 동네 어르신들이 자주 개의 눈이 사람보다 영민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보아하니 그것이 전부 사실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수행을 통해 이 정도 능력을 얻은 것도 충분히 좋은 일이니까요. 언젠가는 저도 대요(大妖)가 될 수 있겠죠.”
호운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지녔기 때문에, 긍정적인 태도로 씩씩하게 대답한 뒤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계연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채고는 서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꿀차를 마시고 싶은 모양이구나? 가서 차를 내오마.”
“선생님, 제가 할게요.”
손아아가 얼른 나서서 대답하자 계연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글씨나 마저 쓰렴.”
계연이 차를 우려 쟁반에 받친 뒤 뜰에 가지고 나왔을 때, 손아아는 마침 마지막 글자 몇 개를 쓰고 난 뒤였다. 호운은 탁자 옆에서 그녀가 글을 쓰는 모습을 진지한 얼굴로 구경하고 있었다.
거안소각의 대추꿀을 넣은 맑은 찻물이 두 사람과 여우에게 각각 하나씩 놓였다. 호운은 두 발로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고서 계연과 손아아를 호기심 어린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계연은 찻잔을 한쪽에 내려놓고서 손아아가 다 쓴 글을 들고서 천천히 훑어보았다. 손아아도 계연과 마찬가지로 향긋한 차를 마시기는커녕, 허리를 곧게 편 채로 단정히 앉아 계연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호운만이 마치 사람처럼 찻잔을 가지런히 받쳐 들고서 때때로 한입씩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참 후, 계연이 손아아를 향해 말했다.
“잘했다, 이번에는 <유룡음(游龍吟)>을 완전히 끝낼 때까지 정신을 집중한 모양이구나. 지금까지 가장 잘 쓴 글이다.”
<유룡음>은 계연이 구두로 전수한 것으로, 그는 손아아에게 <검의첩>을 모사했을 때의 감각을 되살려 글씨를 쓰라고 말했었다. 계연은 아아도 그가 예전에 <검의첩>을 보고 얻은 그 깨달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오늘 아아는 정말로 유룡(*游龍: 승천하는 용, 아름다운 자태를 뜻함)의 뜻을 담아낸 것이다.
“휴우…….”
그 말에 손아아는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썼던 글은 계 선생님께 비평을 당했었는데 오늘은 드디어 그의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하하, 이제 차를 맛보려무나.”
계연은 찻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향기를 맡았다. 꿀이 섞인 차향(茶香)은 굳이 마시지 않아도 이미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고 흡족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