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66화 (566/892)

566화. 보잘것없는 사람

장예는 계연이 본 점괘에 관한 것과 바닥에 쏟아진 술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이를 듣던 왕립은 점차 안색이 창백해지며, 괴이쩍은 표정으로 깨진 술병 조각을 바라보았다.

“저 술은 독주(毒酒)였던 겁니까?”

“독주라고 할 수는 없어요. 독을 타면 너무 티가 나니까요, 그래도 좋지 않은 걸 넣은 건 확실해요. 그렇지 않았다면 종이학도 저걸 부수지 않았을 거예요.”

“종이학이요?”

왕립은 의아한 얼굴로 이렇게 묻고는 곧 계연의 어깨 위에 하얀 종이학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에 본 흰빛을 떠올린 왕립은 즉시 상황을 파악하고는 얼른 공손히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계 선생님. 종이학 은공(恩公)께도 감사드립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가자고?”

장예가 그를 재촉하자 왕립은 저도 모르게 그에 응하려다가 갑자기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제가 만약 이렇게 떠나버리면 탈옥인데, 그럼 형벌이 두려워 도망친 셈이 되는 게 아닙니까? 윤 대인께서 저를 위해 나서 주셨는데, 제가 이렇게 도망치면 조정에 있는 대인의 정적(政敵)들이 이 기회를 붙잡고 늘어지지 않을까요?”

“답답하게 구네, 정말! 윤 대인은 조정의 관원이고, 윤 공의 아드님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래 봐야 질책을 좀 당하고 체면이 조금 떨어지는 게 다겠지. 하지만 당신은 목숨을 잃게 될 거라고!”

왕립은 담담한 표정의 계연과 다급히 채근하는 장예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주저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옥졸들이 떠드는 걸 들어보니, 윤 공께서 병으로 위독하시다지요? 이런 시기에…….”

“아잇! 그래서…….”

장예가 급한 마음에 왕립에게 다가가자, 왕립은 조건반사적으로 얼른 귀를 가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를 본 장예가 화가 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여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제가 감옥에 계속 머무른다 해도, 장 낭자가 있으니 저들도 저를 죽이진 못할 겁니다!”

왕립은 정말로 죽음이 두렵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장예가 자신이 죽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장예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무리 귀신이라고 해도, 계속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틈에 누군가 당신의 목숨을 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윤씨 집안의 일에 당신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잘것없는 이야기꾼 주제에 무슨 고상하고 꿋꿋한 척이야!”

원래 왕립은 장예의 앞에서 계속 절절매는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때 장예의 말을 듣고는 그의 마음에 돌연 알 수 없는 고집이 생겨났다. 그는 귀를 가리던 두 손을 내려놓고서 주먹을 꽉 쥔 채 장예를 향해 대꾸했다.

“보잘것없는 게 뭐가 어때서요? 보잘것없는 사람도 기개를 가질 수 있다고요! 윤 공께서는 현시대의 대학자이고 윤씨 집안 모두가 충신으로, 천하의 문인 중에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어요. 그런 윤씨 집안에 위기가 닥쳤는데, 저처럼 보잘것없는 인물이 도움은 주지 못할지라도,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자가 진짜!”

장예가 갑자기 훅 다가오자 왕립은 기세가 단번에 팍 꺾여, 얼른 두 손으로 귀를 가리며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그만하세요, 두 분 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잊은 모양이네요…….”

계연이 참다못해 이렇게 말을 내뱉자 장예와 왕립이 동시에 찔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계 선생님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계 선생님…….”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잊었습니다…….”

두 사람이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자, 계연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보아하니 이들은 자신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듯 보였다. 물론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계 선생님, 이 왕씨 놈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자기가 쇠를 두드려 만들어진 줄 아나 봐요! 만약 제가 3일이 멀다 하고 음식을 갖다주지 않았으면, 지금 아주 피골이 상접해져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제게 이렇게 소리치는 꼴을 좀 보세요! 흥!”

왕립은 내심 찔렸는지 장예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는 그저 계연을 바라보며 그가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랐다.

계연은 감방 안의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별안간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 하죠, 선생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도록 함께 감방 안에 들어갈게요. 어떤가요?”

계연은 이렇게 말하며 왕립과 장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의 말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지 못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장예가 의아하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계 선생님, 그러니까, 계 선생님께서 저자와 함께 감옥에 계시겠다고요?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맞습니다, 여기는 선생님께서 머무시기에 너무 불편할 겁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보다 더 불편한 곳에서도 지내봤어요. 게다가 여기서 따로 할 일도 있고요.”

왕립과 장예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중, 계연은 자연스럽게 감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다시 잠갔다.

감방 안쪽에는 대략 8척(약 2.5m) 길이의 흙으로 다져 만든 침상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낮은 탁자와 촛대가 놓여 있었다. 한쪽 벽의 천장과 가까운 곳에는 손바닥 정도의 길이에 팔 길이 정도 너비의 자그마한 창이 나 있었다. 이곳은 원래 죄수 두 명이 함께 쓰는 방이었지만, 왕립이 단독으로 쓰고 있었다.

“하하, 꽤 괜찮네요!”

장예와 왕립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보아하니 계 선생님은 정말 진심으로 하신 말인 듯했다. 고인(高人)의 언사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더니.

시간은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장예는 이미 떠나고 감방 안에는 왕립과 계연만이 남아 있었다. 왕립은 침상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탁자 너머 다른 한쪽 침상에서 계연이 옆으로 누운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계연을 부르려다가 감히 그를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눈을 감고는 잠을 자려 애썼다.

계연의 존재는 왕립을 약간 긴장하게 했지만, 그와 동시에 왕립은 훨씬 안심되기도 했다. 게다가 계연에게서 느껴지는 온화하고 맑은 기운 덕분에, 왕립은 채 일각(15분)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왕립이 잠이 들자 계연은 다시 눈을 뜨고는 다른 쪽 침상에 누운 왕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의 기운을 살펴보니 그는 한창 꿈을 꾸는 중이었는데, 그 꿈이 일반적인 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계연은 두 눈을 좀 더 크게 뜨고서 법안을 열어 그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자 왕립의 온몸이 은은한 흰빛으로 감싸인 것이 보였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화기(火氣)와는 다른 종류여서 계연도 그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정말 신기하네!’

계연은 한참을 생각해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이 세계에 온 지 어느덧 30년이 지난 만큼, 계연에게 아직 모르는 것이 남아 있다고는 해도 계연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견식을 쌓은 후였다.

왕립을 감싼 빛은 왕립을 보호하는 목적도 아니었고, 호연정기도 아니었다. 인간이 지닌 화기라면 이보다 좀 더 바깥쪽에 있었고 붉은색을 띤 데다, 정수리와 양쪽 어깨 부근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게 느껴졌다. 지금 저 흰빛 몸에 딱 붙어있지는 않았다.

‘아무런 힘도 작용도 없는 저 빛은 대체 무엇일까?’

계연은 이처럼 자신의 두 눈으로도 정체를 꿰뚫어 볼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린 적이 몇 번 없었다. 특히나 왕립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고, 심지어 계연은 아직 실체가 갖춰지지 않은 그의 바둑돌도 가지고 있었다.

‘잠깐, 바둑돌이라?’

계연은 의식 내 바둑돌을 불러와 손에 쥔 채로 천천히 감응을 느꼈다. 동시에 그는 왕립의 몸을 감싼 빛은 어쩌면 그다지 신비로운 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둑돌과 감응하던 계연은 어느 정도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왕립의 몸을 덮은 이 은은한 빛은, 방 안에서 등을 켜면 방문의 틈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왕립이 꾸는 꿈이 그렇게나 특이하단 말인가?’

계연은 점차 호기심이 커지는 것을 느꼈다. 현재 상황으로 보자면, 이는 왕립의 꿈 때문에 일어난 변화처럼 보였는데 또 어떻게 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하지만 계연은 다른 사람의 꿈에 들어갈 수 있는 대단한 술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신령들이 흔히 쓰는 현몽(*現夢: 죽은 이나 신령이 꿈을 빌어 나타나는 것)도 그의 실력보다는 뛰어날 터였다.

하지만 신령들이 쓰는 방법과 선도의 입몽술(入夢術)은 서로 달랐다. 입몽은 말하자면 배우기도 펼치기도 어려운 고급의 술법으로,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술법을 펼치려면 심신(心神)이 튼튼하고 원신(*元神: 육체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생겨나, 수행을 시작하면 혼백을 주관하는 역할을 함. 사람이 죽은 후 환생하는 근간이 됨)이 단단해야 했다. 어떻게 보자면 천마(天魔)들이 쓰는 방법과도 비슷했다. 반면 현몽은 사람의 의식을 현몽하는 자의 의식 세계에 대입하는 것이었다.

계연은 자신의 심신이 남달리 강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경검세의 위력이 그렇게 강한 데에는, 2할은 넝쿨 선검 스스로의 힘이었지만 8할은 계연의 자신의 심신과 의식 세계가 지닌 힘 덕분이었다.

계연의 심신과 원신의 힘이 충분하니, 평범한 사람의 마음에 쉽게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벽을 무너뜨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왕립은 아예 깨어나지 못하거나 깨어난다고 해도 백치가 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던 계연은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어 천천히 천지화생을 펼쳐 의식 세계를 이끌어냈다. 그는 이렇게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혹시 왕립의 마음에 있는 세계에 자신이 닿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계연의 통제 아래 그의 의식 세계는 대야에 담긴 맑은 물이 넘치는 것처럼, 천천히 감방 곳곳으로 뻗어나갔다. 그것이 왕립이 있는 곳까지 닿았을 때, 계연은 자신이 설령 꿈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이 빛이 새어 나오는 그 안쪽 세계가 어떤지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었다.

잠시 뒤, 왕립의 의식 세계와 계연의 의식 세계가 만나 섞이는 부분이 생기자 계연은 천천히 눈을 감고 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황혼 녘의 하늘 아래, 한 여인과 남자 세 명이 말을 탄 채 질주하고 있었다. 여인은 그들 무리 중 가장 앞섰는데, 가슴 앞에 ‘으앙’ 하고 울어대는 어린 아기가 묶여 있었다. 그들이 탄 네 필의 말 뒤로는 수십 기(騎)의 말을 탄 사내들이 쫓아왔다.

“안 되겠어. 저들은 자주 말을 바꾸면서 쫓아왔지만, 우리가 탄 말은 이미 힘이 다 빠진 상태니 멀리 도망칠 수 없을 거야. 내가 막을 테니, 너희들은 먼저 가!”

그중 한 사람이 말의 속도를 늦추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가 탄 말은 코와 입에서 거센 김을 내뿜었고 심지어 흰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승언(勝言)!”

맨 앞에서 달려가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뒤를 따라오던 다른 두 사람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여인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 안 그러면 우리 모두 다 죽을 거야!”

“승언의 희생을 헛되게 할 순 없어!”

이내 완전히 제자리에 멈춰선 맨 뒤의 남자가 그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서 가!”

그 뒤 남자는 매고 있던 활을 푼 뒤, 발 근처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들었다. 화살을 활 위에 얹고서 활이 한껏 구부러지자, 남자는 차분히 호흡을 조절한 후 손을 놓았다.

텅!

슈웃-!

화살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던 추격자들을 향해 날아가자, 가장 앞줄에 있던 검은 장포를 입은 남자가 칼을 빼 들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오던 화살이 반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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