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화. 언젠가 본 듯한데
계연은 문장이 매끄럽지 못한 곳을 찾아 고치며, <유몽>이 전보다 확실히 읽기 편해진 것을 느꼈다. 그는 곧 흡족한 기분이 들어, 붓을 거두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왕립이 한창 열중한 얼굴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생각이 나는 대로 고치고 덧붙이다 보니 종이가 온통 엉망이었다. 이는 계연에게 있어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광경이었다. 한편 뱃머리 쪽에서는 장예가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었는데, 그녀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장예가 신도(神道)를 닦고 도행도 전보다 조금 높아졌다고는 해도, 그녀는 자신의 실력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을 벗어나는 데에도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신령으로서의 도행이 사라지면 그냥 귀신이 되면 되겠지, 라는 생각인 듯했다. 장예의 이런 초연한 마음가짐에 계연은 무척 감명받았다. 그녀는 사랑도 원한도 거침없이 표현했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보면 그녀는 계연 자신보다 훨씬 소탈한 데가 있었다.
“계 선생님, 강물 아래에 무언가 있어요.”
장예의 목소리가 계연의 귓가에 들렸지만, 다른 이들은 이를 전혀 듣지 못했다. 장예도 이렇게 말을 전하며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계연은 탁자 위의 종이 한 장을 들고서 그 위에 빼곡히 적힌 자그마한 글자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린 순간, 글자 사이를 잇고 있던 연기인지 안개인지 모를 무언가가 보일 듯 말 듯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통천강을 순찰하는 야차예요. 신령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안 가는 이가 뱃머리에 서 있는 걸 느끼고 경계하는 것뿐이에요.”
장예는 수면 아래의 야차들이 자신을 발견한 것을 조금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도행으로 따지면, 통천강의 어느 야차를 데려와도 자신보다 나을 테니 말이다.
이때, 수면 아래에서는 녹색 쇠 창을 손에 쥔 흉악한 얼굴의 야차 두 명이 계연이 탄 배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야차들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물살에 따라 움직이며, 그들이 강물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했다.
작은 배의 노가 쉼 없이 움직이며 수면에 파문을 만들었다. 수면 아래에서 이를 바라보면 마치 빛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화로 위에 놓인 냄비의 물이 펄펄 끓자, 사공은 얼른 물을 떠올려 찻잎이 들어간 찻주전자 안에 부었다. 그들은 맛이나 격식을 따지지 않았으므로, 찻잎을 씻는 과정 같은 건 당연히 거치지 않고서 곧바로 차를 내왔다.
야차들은 청각이 무척 뛰어났기 때문에, 선상에서 사공이 끓는 물을 주전자에 붓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하하, 계 선생님, 왕 선생님, 제가 차를 좀 우려봤습니다. 아직 물이 뜨거우니, 조금 식힌 후에 마시는 게 좋을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바쁘실 테니 어서 가보세요.”
“예,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세요!”
“네.”
그러자 수면 아래에 있던 야차들은 정신이 번쩍 든 표정으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계 선생님이신가?”
“그럴 거야. 분명 계 선생님 목소리였어. 자네는 배를 따라가게, 내가 가서 아뢸 테니!”
이렇게 말한 야차는 물살보다 빠른 속도로 즉시 자리를 떠났고, 곧 계연이 느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사라졌다.
배 위에 있던 장예는 고개를 돌려 차를 따르는 계연을 바라보았다. 그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계 선생님이 조금 전 수면 아래의 일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해 질 무렵이 되자, 계연 일행이 탄 작은 배보다 두 배는 큰 배 한 척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장예는 이미 멀리서부터 그 배에서 요리할 때 나는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계연은 그쪽을 보지 않고도 이미 바람을 따라 실려 오는 음식 냄새를 맡은 뒤였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배의 속도는 무척 빨라서, 멀리서 보이던 배는 어느새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뱃머리에는 비단 장포를 입은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아직 두 척의 배 사이에는 십여 장(약 30m)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도, 그들은 이쪽을 향해 예를 올렸다.
“조카 응풍.”
“소질 응약리.”
“계 숙부님을 뵙습니다!”
왕립은 이와 비슷한 장면을 언젠가 본 듯했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편 장예는 그들을 잠시 관찰하더니 그들이 누군지 곧 떠오른 듯했다. 계연은 선창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예를 거두세요.”
그는 두 사람이 탄 배를 바라보며 이렇게 물었다.
“무슨 요리죠?”
그러자 응풍이 웃으며 살짝 몸을 틀어, 뒤쪽 선창 안의 광경을 보여주었다. 환술을 이용해 사람의 모습이 된 두 명의 물요괴들이 식탁 위로 요리를 나르고 있었다. 냄비와 그릇이 잔뜩 올라간 식탁 위에는 김이 폴폴 솟아올랐다.
“계 숙부님, 그리고 배에 탄 여러분, 이렇게 추운 날씨에 뜨끈한 요리를 먹는 것보다 더 운치 있는 일도 없겠지요! 이쪽에 통천강에서 잡은 생선들도 있고, 난과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침 잘됐군요!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계연은 응풍에게 칭찬을 건넸다. 난과를 먹자는 제안은 분명 응풍이 생각해 냈을 것이다.
계연은 홀로 그들의 배에 올랐고, 장예와 왕립을 포함한 두 명의 뱃사공들은 자신들의 배에 남았다. 하지만 응풍과 응약리는 이쪽 배에도 풍성한 요리를 보냈다. 거기에는 계연이 탄 배와 마찬가지로 난과도 있었으며 계연이 남기고 간 매운 고춧가루도 있었다.
“하하, 계 선생님 덕분에 오늘 이렇게 풍성한 만찬을 들게 됐군요!”
“그러니까요, 이렇게 좋은 술도 있고 말입니다, 허허!”
두 명의 뱃사공들과 장예와 왕립이 앉은 식탁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왕립이 뱃사공들에게 다가가 한번 건배를 한 후로는 서로 떨어져서 식사를 했다. 뱃사공들은 내내 차가운 얼굴로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내뿜는 장예에게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왕립은 음식을 씹으며 그들과 마찬가지로 닻을 내린 배를 바라보다가, 자그마한 소리로 장예에게 말했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저 두 사람을 전에도 본 적이 있던 게 방금 떠올랐습니다! 저 두 사람은 아직도 저렇게 젊고 용모가 수려한 것이, 분명 대단하신 분들이겠죠?”
왕립은 장예를 바라보며 장 낭자도 그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만이 양쪽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모습이었다.
장예는 먹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음식을 집어 몇 번 씹은 뒤 손바닥 위에 뱉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왕립에게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난 누군지 알지, 저 여인은 통천강의 응 마마야!”
“응 마마?”
왕립은 멍하니 되묻더니 곧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헛숨을 삼켰다.
“그럼……!”
그는 장예가 자신을 향해 눈을 부릅뜨는 것을 보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 남자는요? 저분도 성이 응씨던데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분명 무척 대단한 자겠지!”
한편 다른 배에서는 응약리와 응풍이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때 응약리는 응굉이 얼마 전 수하를 보내 전해온 소식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용왕들도 그 용시충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지 못했다고요?”
“네, 하지만 황해에서 마지막 남은 용시충 무리를 제거하던 중, 그중 한 용시충이 얼마간 도행을 쌓은 모양인지, 저희 아버지께서 그것의 사념(思念)을 한 줄기 뽑아낼 수 있었어요. 그것을 이용해 용시충이 황해에 퍼지게 된 연유를 조사하려 했는데, 그것이 어딘가에 연결된 감각을 느낄 수도 없었고 사념에 담긴 것도 용시충의 모습이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이한 동물의 모습이었다고 해요. 그 모습은 곧바로 흩어져 버렸지만, 용왕들께서는 모두 그 순간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셨대요.”
응약리는 이렇게 말하며 법력을 이용해 물을 모았다. 그리고는 늙은 용이 이물전신(*以物傳神: 물건에 진수를 담아 전하는 것)의 술법을 이용해 전달한 모습으로 물을 빚어냈다.
계연은 물로 된 덩어리가 천천히 모습을 바꾸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털과 날개가 있고, 뒷다리가 길었으며, 입이 아주 크고 송곳니가 있었다. 하지만 그 전체적인 모습은 여전히 모호하여 무엇인지 잘 판단할 수가 없었다.
“계 숙부님, 용왕들께서 모두 이 일을 아주 신경 쓰고 계세요. 아버지께서는 어쩌면 선생님이 무언가를 알고 계실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계연은 눈썹을 찡그린 채 응약리가 물로 빚어낸 괴이한 동물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알 수가 없네요, 그때 제가 아버님과 함께 있었다면, 용시충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을 이용해 뭔가 추측이라도 해봤을 텐데. 이 모습은 너무 모호해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이를 들은 응약리가 하는 수 없이 그 모습을 흩트리려던 순간, 계연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다른 방법을 써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계연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가진 어떤 물건이 떠올랐다. 비록 명확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기에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다만 여기서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 * *
반 시진(時辰: 1시간) 후, 계연은 응풍과 응약리를 따라 용궁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뒤 정전(正殿) 안에서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나는 해치다, 감히 나를 방해한 자가 누구냐? 나는 해치다, 감히 나를 방해한 자가 누구냐?”
계연이 해치를 그린 화폭에 법력을 주입하자, 화폭이 용궁 안의 영기를 끌어당기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해치다, 감히 나를 방해한 자가 누구냐?”
그와 동시에 해치의 색채가 더욱 생동감이 넘치게 변하며 노기 어린 눈에 위엄이 서렸다. 계연이 점점 더 많은 법력을 주입함에 따라, 해치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앞발을 휘두르는 등 당장 그림 바깥으로 뛰어나갈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계 숙부님, 얘는 왜 계속 같은 말만 하나요?”
지켜보던 응풍이 결국 참지 못하고 이렇게 질문했다. 그도 계연이 지금 화폭에 계속 법력을 주입하고 있고, 이로 인해 주위에 끌려오는 영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폭 안의 이 기괴한 맹수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같은 말만 반복하면서, 때때로 목청껏 포효하는 것이 전부였다.
“곧 변할 거예요.”
그동안 계연은 이 해치 그림이 특수한 기운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화폭 위로 모인 영기와 법력은 점차 강력해지는 동시에 높은 순도를 지니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내보이는 반응도 점차 커졌다.
일전에 대수국의 국사도 해치 그림의 특성을 알아차려, 그것을 바탕으로 해치의 모습을 담은 영패를 만들어냈었다. 하지만 그의 법력은 계연의 것과는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계연의 법력은 모두 삼매진화로 제련한 단기(丹氣)에서 나오는 것으로, 순도 높기로 치자면 이 세상에서 계연의 법력을 당해낼 자가 없을 터였다.
법력의 순도는 해치 영패가 담을 수 있는 힘의 총량을 결정할 수 있었다. 대수국 국사는 자신의 법력을 불어넣어 해치 그림을 움직이도록 만들었고, 그는 그것이 이 화폭이 가진 힘의 극한이라 여겼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계연이 법력을 불어넣는 속도는 아주 느리고 안정적이었지만, 차근차근 화폭 안에 쌓이고 있었다. 그림 안의 해치는 내내 같은 말만을 반복했으나, 해치의 모습은 점차 생동감이 넘치게 변하여 이제는 정말 살아있는 맹수처럼 보였다. 게다가 검은 연기가 계속에서 화폭 안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