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해치 어르신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는 걸 본 응약리와 응풍은 거의 즉각적으로 경계 태세에 들어섰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전에는 본 적도 없을 정도로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아주 강력한 요기(妖氣)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위의 수온도 계연의 팔을 중심으로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해치 그림이 있는 곳은 거의 펄펄 끓는 수준이었다.
“약리야, 조금 전에 보여준 빛 그림자를 다시 한번 펼쳐주렴. 그런 후에 얼른 옆으로 피해야 한다. 이 화폭 안의 해치는 상대를 해칠 수도 있거든.”
‘해치?’
응약리와 응풍은 모두 속으로 의문을 느꼈다. 그러나 응약리는 “예.”하고 대답하고는, 곧바로 계연의 말에 따라 정신을 집중한 뒤 법력을 펼쳐 부친이 전달해온 모습을 다시 재현해냈다.
응약리는 본인의 수행에 박차를 가하여, 어느새 신도(神道)의 수행과 교룡의 법체를 분리해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후에 진룡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는 과정이었다. 응약리는 일찍이 마음을 준비한 상태였고, 그간 쌓은 수행도 충분했으나 자기 신체도 완벽한 상태로 끌어올리려고 했다. 비록 겉으로만 보자면 응약리는 응풍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으나, 사실상 응약리는 자신의 오라버니보다 한참 앞서나가 있었다.
응약리가 다시금 괴이한 동물의 모습과 기운을 재현해내자, 그들이 용궁 안에 와 있었던 덕분에 배 위에서는 모호하게만 보였던 동물의 모습이 이제는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해치다, 감히…….”
그러자 계연이 든 화폭 안에서 한참 포효하던 해치가 돌연 말을 멈추고는 일렁이는 물결로 이루어진 맞은편의 형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계연은 원래 저번처럼 해치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반응을 보이리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다음 순간 검은 연기에 휩싸인 날카로운 맹수의 앞발이 화폭 안에서 뻗어 나왔다. 그것이 뻗어져 나오자마자 세 사람이 서 있던 곳의 강물이 순식간에 말라 증발하더니 텅 빈 공간을 형성했다. 해치가 날카로운 앞발을 맹렬히 휘두르며 분노에 찬 포효성을 내질렀다.
“당장 이 어르신의 앞에서 꺼져라!”
화앗-!
“엇?”
응약리의 앞쪽에 있던 빛과 그림자가 순식간에 날카로운 발톱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뒤이어 날카로운 섬광이 훑고 지나가자, 응약리는 거의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살짝 틀어 피했다. 다시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의 가슴께를 스치려는 순간, 응약리의 팔에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용비늘이 돋으며 해치의 공격을 막아냈다.
콰광……!
그 충격으로 응약리는 뒤로 몇 걸음이나 미끄러진 후에야 몸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진동은 여전히 계속되어, 용궁 전체에 거센 물결이 일렁였다.
쿠구궁……!
“으악!”
“조심해!”
쿠당탕!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용궁의 야차와 인어들이 모두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놀란 마음에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용궁에 강신마마와 응풍 전하, 그리고 계 선생님도 계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다지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용궁 전체를 소란스럽게 만든 진동이 점차 가라앉자 곳곳의 물속 생물들도 점차 안정을 찾았다.
“별일 아니니 모두 돌아가 하던 일 하면 된다!”
야차통령이 이렇게 소리치자 다른 이들이 모두 안정을 되찾고 다시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흩어졌다. 반면 통령은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정전(正殿)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사고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을 뿐으로, 계연은 거의 그와 동시에 해치 화폭을 거둬들인 후였다. 응풍과 응약리는 여전히 놀라고도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계연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보이자 이들은 굳이 계연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한편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야차들이 정전으로 모여들었지만, 응약리가 괜찮으니 물러가라고 손짓하자 이들은 다시 조심스럽게 흩어졌다.
잠시 후, 응풍과 응약리는 계연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즉시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계 숙부님, 뭔가 알아내신 것이 있으신가요?”
“계 숙부님, 해치가 도대체 무슨 동물이죠?”
계연도 여전히 그 괴이한 동물의 정체를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약간의 추측은 할 수 있게 되었다.
“해치는 상고 시대의 신수(神獸)로, 선(善)을 따르고 사악한 것을 싫어하는 성질이 있으며,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빛 그림자 속의 괴이한 동물은 마찬가지로 상고 시대의 신수거나 혹은 흉수(凶獸)의 일종일 거예요.”
계연도 해치가 ‘꺼지라’는 말을 자주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해치가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정도면 상대도 절대 일반적인 존재는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계 숙부님, 혹시 그게 어떤 동물일지 추측 가능한 것이 있으신가요?”
응약리가 다시 한번 이렇게 묻자 계연이 곰곰이 생각한 뒤 이렇게 답했다.
“지금 상황으로 보자면, 용시충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확실하구나. 어쩌면 ‘후(*犼: 개와 비슷한 식인 야수의 일종)’일 수도 있겠어. 참, 손은 괜찮니?”
응약리와 응풍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 눈을 마주쳤다. 해치도 후도 전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두었다. 한편 계연의 물음에 응약리가 팔을 문지르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냥 놀랐을 뿐이에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깜짝 놀랐단다, 이번에 해치가 보인 반응은 전보다 훨씬 격렬하더구나.”
다음 날 해가 질 무렵, 경기부 바깥의 통천강 부두에서는 장예와 왕립 두 사람이 미리 도착해 계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어제 계연을 태우고 떠났던 배가 천천히 이쪽을 향해 돌아오는 것이 이들의 시야에 보였다.
자신과 장예가 손을 흔드는 모습에 배 위의 계 선생님도 손짓하는 걸 보고는 왕립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미 여기서 기다린 지 꽤 되었던 터라, 어쩌면 계 선생님이 자신들을 잊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배가 기슭에 닿자, 계연은 부두를 따라 놓인 계단을 타고 위쪽으로 올라왔다. 응풍과 응약리는 배 위에 서서 계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계 숙부님,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통천강의 어느 물요괴에게든 말을 전하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
그들은 사실 무척 계연을 따라가고 싶었으나, 지금은 처리할 중요한 일이 있어 놀러 다닐 때가 아니었다.
계연은 생각에 잠긴 채 둘이 탄 배가 멀어지는 것을 잠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강물을 바라보던 장예와 왕립에게 말했다.
“자, 그럼 어서 경기부 저승으로 가도록 하죠.”
이렇게 말한 계연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자 왕립과 장예도 얼른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내심 계연이 무슨 일로 떠났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만약 자신들이 알아도 되는 일이었다면 굳이 자신들을 따로 떼어놓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 * *
겨울은 원래 부두가 가장 한산한 시기였지만, 최근 이곳은 규모도 커지고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해 있었다. 이에 자연스럽게 부두 인근도 인파로 북적였고, 경기부 부성으로 통하는 관도(官道)에도 마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계연은 등 뒤의 두 사람을 데리고 축지법을 이용해 걸었고, 덕분에 그들은 채 반각(7~8분)도 되지 않아 대정국의 도성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도성은 예전보다 더욱 번화한 듯하네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왕립이 이렇게 감탄했다. 예전에 그는 도성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 있던 설서 선생이었기에, 당금의 성상이 아직 제위에 오르기 전 이야기를 하러 왕부에 갔던 적이 있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선황제와도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만약 다른 설서 선생이 이런 엄청난 영광을 얻었다면, 한평생 누구를 만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선생님, 곧바로 저승으로 가는 건가요?”
장예는 계연이 도성에 들어온 후에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 걸 보고 궁금한 마음에 이렇게 물었다. 계연은 내내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장예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어 곧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바로 가야 해요, 주염생의 혼백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요.”
“예? 지, 지금 저승으로 간다고요……?”
왕립이 불안한 듯 이렇게 묻자, 계연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굳이 가실 필요는 없어요.”
그러자 왕립은 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계 선생님은 성정이 무척 온화하시지만, 한 입으로 두말하는 법이 없었다. 만약 여기서 자기가 알겠다고 하면 정말로 놓고 갈 것이다.
묘사방 근처에 다다르자 왕립은 지나는 이들이 자신들을 아예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행인 중 누구도 자신들에게 시선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점차 모호해지며, 그들에게서 황백색(黃白色)의 빛무리가 뿜어져 나와 안개처럼 떠다니기 시작했다. 이를 본 왕립은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왕씨, 이리저리 두리번대지 말고 정신 차려!”
장예가 이렇게 소리치자 왕립은 즉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다시 시선을 바로 하고 앞을 살펴보니 어느샌가 하늘이 어두침침해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성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곳으로 다가갈수록 음산한 기운이 왕립의 몸을 감싸며 왕립의 온몸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꿀꺽…….
성문 위에 적힌 ‘경기부 귀문관’이라는 글자를 본 왕립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한편 귀문관 앞에는 저승의 시위들뿐만 아니라, 관복 차림에 관모(*官帽: 예전에 관리가 쓰던 일정한 규격의 모자)를 쓴 문무판관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계연을 비롯한 세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자, 얼른 앞으로 다가가 계연을 향해 예를 올렸다.
“경기부 저승 문판관.”
“경기부 저승 무판관.”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계연도 그들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 원래 계연은 저승에 들어가기 위해 어떤 절차 같은 것을 밟아야 할 줄 알고 걸음을 서둘렀던 것이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들도 이미 자신이 올 것을 알고 준비를 마친 듯했다.
“두 분 판관께서는 어서 예를 거두세요, 여기서 저를 기다리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성황신께서는 선수인 백록이 남편의 음수(陰壽)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2주 전에 이미 명을 내리시어 각 기관장에게 교대로 이곳을 지키고 서 있도록 하셨습니다. 계 선생님이 오시면 언제든 맞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계연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이렇게 물었다.
“만일 괜찮으시다면, 일단 귀성(鬼城)에 먼저 갔다가 다시 성황신을 뵈러 가도 될까요?”
“계 선생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문판관은 이렇게 대답하며 계연의 일행을 귀문관 안으로 들였다. 그는 장예와 왕립이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들을 막아서지도 않았다. 이미 하나는 평범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도행이 그저 그런 귀신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