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73화 (573/892)

573화. 염원이 이루어지고 선인을 따라가다

대청 안이 고요해지자 장예와 왕립은 대체 백약을 향해 축하한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너무 슬퍼 말라고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이 인형들도 멍하니 서 있었고, 계연과 문무판관도 가만히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 후, 백약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목놓고 울지도 않았고 비탄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곧 미소 띤 얼굴로 계연을 향해 큰절을 올린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르신께서 베풀어주신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제 염원은 마침내 끝을 맺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고마움과 얼마간의 미련이 담겨 있었다. 동시에 맺힌 데 없이 산뜻한 기분마저 느껴졌는데, 전체적으로 그녀의 태도는 슬픔보다는 기쁨에 가까웠다. 이렇게 말한 백약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땅에 앉은 모습의 커다란 백록(*白鹿: 흰 사슴)으로 변신했다.

온몸에는 빛이 뿜어져 나왔고 뿔은 기다랗게 나 있었으며 온몸의 무늬도 가지런했다. 하얀빛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보기만 해도 맑고 영험한 선도의 기운이 느껴졌다.

백록은 그대로 내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계연은 처음 시작한 대로 끝을 내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연은 소매를 휘둘러 백약의 눈물을 거둬들이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승과 저승에 걸친 이 깊은 인연은, 네 수행만 놓고 보자면 겁(*劫: 하늘이 내리는 재난)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행운이 될 수도 있겠지.”

말을 마친 계연은 백록의 등 위에 앉은 뒤 백록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백록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계연이 다시 일행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이제 모두 끝났으니 어서 가시죠!”

문무 판관도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으로 앞서 걸었다.

“저희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두 판관이 앞에서 길을 이끌었고, 신성한 빛을 내뿜는 백록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뒤이어 장예가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립을 끌고 갔다. 종이학은 공중에서 내려와 백록의 한쪽 뿔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이 주씨 가문의 음택에서 나오자, 그 안에 남은 종이 인형들은 전부 도깨비불로 변해 사라졌다.

바깥에는 어느새 많은 혼백이 몰려와 있었는데, 이는 마치 속세에서 구경거리를 보고 몰려온 듯한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다 백록이 대문에서 나오자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 길을 내주었다. 그들은 백록이 지나간 다음에야 맨 앞에 있던 이들이 문무 판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일전에 귀성 곳곳으로 흩어진 저승 관리들이 다시 다가와, 그들을 앞뒤 양옆으로 감싼 채 길을 터 가며 움직였다. 그렇게 사슴을 탄 선인(仙人) 일행은 귀성 안의 수많은 혼백의 눈길을 받으며 천천히 큰길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한편 일찍이 음수(陰壽)가 지났지만, 관리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살던 늙은 귀신들은 이 광경을 보고 마음에 깊은 인상이 남았다.

이때 백록의 형체는 진짜 육신이 아니라 그녀의 요혼(妖魂)이 변한 모습이었다. 그런 이유로 계연은 그간 백약이 쌓은 수행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고,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영험한 기운이 더욱 귀하게 여겨졌다.

사실 백약은 그동안 저승에서 지내며 제대로 수행을 닦지 못한 셈이었고, 그에 더해 매년 채찍형을 받아야 해서 요혼도 훼손된 상태였다. 그래서 실은 주염생의 혼백이 흩어지기 전까지 백약의 도행은 계연이 보기에 그다지 큰 발전이 없던 상태였다. 하지만 주씨 음택(陰宅)을 나온 후 계연이 백록의 등에 탄 채로 거리를 거닐면서, 그녀의 기운은 더욱 순수하고 투명하게 변했다.

지금 백약의 기운으로만 보자면, 그녀가 단지 벼락치기로 선수(仙獸)들의 수행 법결을 배웠다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보통의 요괴 수행자에게 있어서 이는 결코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약을 수선자로 대입해 생각해보면, 이는 마음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며 빚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계연은 한쪽 다리는 늘어뜨리고 한쪽 다리는 접은 상태로 사슴의 등 위에 앉아서, 보석처럼 단단히 굳은 눈물을 소매 안으로 느끼며 백약과 주염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백록과 계연은 판관들의 뒤를 따라 귀성을 빠져나온 후였다.

백약은 이때 앞을 주시하면서도 때때로 자신의 발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등에 계연을 태운 후부터, 발이 지면이 닿을 때마다 저승 땅의 오염된 기운이 저절로 흩어졌다. 만약 백약이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자신이 등 뒤에 태우고 있는 어르신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백약은 자신이 계연에게 받은 은혜는 이번 생에 다 갚을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 게다가 이 선인은 일개 범인이 아니라 도행의 깊이를 추측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인(高人)이었다. 그러니 설령 그가 무언가 원하는 게 있을지라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울 수도 없을 터였다. 백약은 자신이 계연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저 마음속 깊이 이 ‘어르신’을 존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귀성과 저승의 관청들 사이는 거리가 꽤 멀었고 길을 잃기도 쉬웠다. 만약 어느 혼백이 귀성에서 도망쳐 나온다 해도, 아마 멀리 가지도 못할 것이었다. 저승을 순찰하는 관리들이 자주 오가는 큰길을 제외하면, 다른 곳에서는 저승의 탁한 기운이 모래바람처럼 불어닥쳤기 때문이다.

계연의 일행은 두 판관의 뒤를 따르고, 그들 뒤로는 또 저승을 순찰하는 관차(官差)들이 두 무리나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길을 지나는 다른 관차들은 그들을 멈춰 세워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그때 마침 순찰을 도는 관차 한 무리가 귀성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황무지로 난 길 쪽에서 이리로 오고 있었는데, 그 길의 한쪽에는 누렇고 탁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고 짙은 안개에 덮여 그보다 더 먼 곳은 어둑어둑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귀성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간쯤에서 그들은 아주 특이한 존재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앞쪽에 영기가 섞인 빛이 있다.”

관차들 중 우두머리가 왼손을 칼자루에 올려놓은 뒤, 오른손을 들자 뒤를 따르는 이들이 즉시 걸음을 멈추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그들이 서 있는 이쪽에서는 귀성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승을 뒤덮은 탁한 기운 속에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흰 빛무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거의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성황 대인이나 각 기관장이 가진 신령한 빛과는 또 달랐다.

그 빛은 여기서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지만, 속도가 꽤 빨라 금방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긴장하던 관차들은 그것이 온몸에서 빛이 나는 흰 사슴이란 것과 맨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이 문무 판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판관 대인이시다, 어서 예를 올려라!”

그러자 관차들은 길 양옆으로 물러난 뒤 허리를 구부리며 예를 올렸다.

“추혼별사순찰대(*緝魂別司巡査: 도망친 혼백을 체포하고, 저승을 순찰하는 임무를 맡은 순찰대)가 문판, 무판 대인을 뵙습니다!”

“문판, 무판 대인을 뵙습니다!”

“음.”

무판관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렇게 일행은 순찰대를 지나 곧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멀어졌다. 그동안 길 양옆에 늘어선 관차들의 시선은 내내 백록과 계연에게 머물러 있었는데, 그러느라 그들은 일행에 속한 장예와 왕립에게는 아예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대장, 조금 전에 사슴을 타고 있던 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저승의 어느 신령이십니까?”

그러자 관차들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다, 만약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분은 바로 계 선생님이실 것이다.”

이를 들은 관차들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계 선생에 대해 들어본 적만 있을 뿐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 직접 보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그 계 선생임이 확실한 듯했다.

그들이 계연을 바라보는 사이에 계연은 순찰대가 나타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성으로 갈 때는 걸음을 서두르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계연은 이제야 귀성 밖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경기부는 이치대로라면 단 하나의 귀성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 저승은 크기가 꽤 넓어 보였고, 지금 보니 다른 곳으로 이어진 길도 있었다. 방금 지나간 순찰대도 그 길 중 하나에서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그 길의 끝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걸까?’

계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국 이렇게 물었다.

“두 분 판관께 여쭙겠습니다, 조금 전에 나타난 순찰대가 걸어온 곳을 보니 그 길 말고도 길이 여러 개 있던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제게 알려주실 수 있나요?”

계연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저승에서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계연과 같은 고인이 그에 대해 알고 있어도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저 내부에서 관습적으로 굳어진 금기여서 바깥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두 판관은 그다지 숨기려는 생각이 없었고, 둘 중 문판관이 멀리 시선을 던지며 이렇게 대답했다.

“계 선생님께 아룁니다, 그 길들이 이어진 곳은 대부분 귀성입니다.”

“귀성이라고요?”

계연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저승에 큰 변화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자면 경기부 저승의 신도(神道)가 전멸하게 되면, 귀문관을 지키는 이가 없어 귀성 안의 혼백들이 모두 도망쳐 나올 것입니다. 그럼 조금 전에 우리가 갔던 귀성은 결국 텅 비게 되겠지요. 그러다 저승의 신도가 재건되고 나면, 예전의 귀성을 계속 쓸 수도 있고 차츰차츰 새로운 귀성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계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곁에서 이를 듣고 있던 왕립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이제 저승에도 적응이 되어 더는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왜 옛 귀성을 계속 쓰지 않는 겁니까?”

“아하하! 따로 고려해야 하는 것도 있고, 외부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이유도 있습니다.”

두 판관은 왕립을 바라보았지만, 이들은 시시때때로 계연의 반응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다행히 계연은 평온한 표정으로 더 캐물으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고, 이에 두 판관은 내심 안도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계연도 두 판관이 말하지 않은 게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자신도 상대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일행은 저승의 행정 구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곧바로 성황 대전으로 향해 성황신을 만났고, 백약은 무릎을 꿇으며 성황신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그 외에는 딱히 중요한 일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간단히 안부를 물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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