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꿈속을 거닐며 검을 뽑다 (2)
계연은 육신과의 감응을 여전히 느낄 수 있어, 근처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고 맑은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빠져나온 그의 의식은 희미한 신기루와 같았으나, 그런데도 계연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가장 신기했던 것은 ‘먼 곳에 있는 계연’도 육신이 가진 신통력과 넝쿨 선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넝쿨검은 현재 그의 육신 뒤쪽에 떠 있었는데,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검집에서 나올 듯했다.
그 감각은 너무나 강렬하여 계연은 시도해보고 싶어서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그는 경기부를 내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참지 못하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그리고 넝쿨검을 떠올리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로 오른손을 뒤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느껴질락 말락 희미한 감각이 솟아났다.
챙-!
그와 동시에 검광(劍光)이 번쩍였다.
파앗……!
검이 아직 완전히 뽑혀 나오기 직전, 거품이 터지듯이 계연이 부린 <유몽>이 산산이 깨져 사라졌다.
“휴우…….”
작은 골목의 구석에서 계연은 숨을 깊이 내쉬며 눈을 뜨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연은 손을 뻗어 이마를 문지르며, 자신이 지닌 심신(心神)의 힘에 두려움을 느꼈다. 잠에서 깨자 머리가 아려올 정도였으니, 이것만 봐도 자신이 검을 뽑았던 것을, 절대로 장난으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계연은 연신 이마를 꾹꾹 누르면서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만약 장소가 좀 더 적합했다면 그는 지금쯤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때 넝쿨검이 모습을 드러낸 뒤 천천히 계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넝쿨검은 밤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춤을 추듯이 빙빙 돌았고, 그 모습이 마치 조금 전 일어난 일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듯했다.
‘분명히 나는 내내 주인의 옆에 있었고, 주인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왜 주인의 뜻에 따라 검집에서 나온 듯한 기분이 드는 걸까?’
넝쿨검은 정말로 검집에서 조금도 나온 적이 없었다.
“하하하하…….”
넝쿨검의 이런 모습에 자신도 아직 완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던 계연은 마침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넝쿨검을 잡고는, 검집 위에 새겨진 글자와 검을 감싼 넝쿨을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쓰다듬은 뒤 손을 놓았다. 그러자 넝쿨검은 사방을 춤추듯이 날아다니다가 다시 그의 등 뒤로 돌아왔다.
이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계연은 정말로 피곤해졌기 때문에, 조금 전의 자세를 유지한 채로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솨아아아…….
오경(*五更: 오전 3시에서 5시)이 지나자, 경기부에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장대비가 아니라 가느다란 봄비였지만, 그래도 그리 적은 비는 아니었다. 봄비는 번개를 몰고 오는 비구름처럼 잠시 내린 뒤 곧바로 흩어지지도 않은 채, 하늘이 밝아올 때까지 조금도 그칠 기미가 없었다.
계연은 처마 아래의 담벼락 구석에서 잠이 들었기 때문에, 몸 바깥쪽이 전부 빗물로 젖은 상태였다. 처마 아래의 돌바닥에는 이미 가느다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 위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이 계연이 몸에도 튀었다. 하지만 그것은 계연의 잠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어느새 하늘에는 동이 텄고, 계연은 아직도 잠이 들어있던 시각, 그의 등 뒤에서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 집의 뒷문이 열렸다.
뒤이어 한 남자가 세숫물을 들고 나타나 바깥을 향해 멀리 쏟아버렸다. 그러고는 그가 다시 대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는 옆쪽 담벼락에서 어떤 형체를 본 듯하여 멈칫했다.
“엥?”
남자가 몸을 반쯤 내밀어 자세히 살펴보니, 흰 장삼을 입은 서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처마 아래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처마 바깥으로는 빗물이 쏟아지고 땅 표면에도 이미 웅덩이가 생긴 터라, 그의 몸 바깥쪽은 이미 폭삭 젖어 있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남자가 퍼뜩 반응했다.
“아, 그게, 우리 집 바깥에 누가 앉아 있다오.”
“예? 거지인가요?”
부인이 그렇게 물으며 뒷문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남자는 그녀가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살짝 비켜섰다.
“차림새를 보니 거지 같지는 않은데…….”
“에고, 몸이 비에 다 젖었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세숫대야를 부인에게 넘긴 뒤, 조심스럽게 계연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이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안심한 얼굴로 계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일어나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후우…….”
그러자 계연이 숨을 깊이 내뱉으며 눈을 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너무 깊이 잤나 보네요.”
계연은 그렇게 말하며 허리를 곧게 편 뒤 팔을 쭉쭉 늘렸다.
남자는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나서 어쩌면 계연이 정신이 약간 나간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맑은 기운과 기품 있는 태도에 저도 모르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는 서생들은 모두 체면을 중시하니, 지금쯤 아마 속으로는 무척 부끄러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만난 서생들은 대부분 그러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만약 싫지 않으시다면 우리 집에 들어와 좀 쉬다 가시지요. 불도 좀 쬐고, 죽도 먹으면서 몸을 좀 녹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맞아요, 선생님. 저희는 평소에도 글공부하는 분들을 무척 존경하고 있답니다. 들어와서 좀 쉬다 가세요.”
한쪽에 서 있던 부인도 남편의 말에 맞장구치며 연신 권했다. 보통 백성들은 잘 모르는 이를 집안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계연은 친밀하고도 온화한 기운을 풍겼고 이를 다른 이들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의 외양은 위협적이지도 않았으므로 상대가 쉽게 경계를 내려놓는 편이었다.
계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이 부부의 기운을 살핀 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두 분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두 분의 호의는 반드시 보답받을 거예요.”
“하하, 무슨 호의고 보답입니까, 그런 치렛말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계연의 말을 들은 남자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이 선생도 참, 온몸의 반이 젖어 진작부터 추위로 덜덜 떨었을 텐데, 아직도 저렇게 고상한 모습을 유지하려 하다니.’
이들 가족은 고관대작에 비하면 그저 보통의 백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황궁에서 가까운 위치였으므로, 골목 깊은 곳에 자리한 그저 그런 집이라고 하더라도 무척 값이 나가는 곳이었다. 그러니 이 가족의 살림살이도 실은 아주 넉넉한 편이었다.
뒷문의 위치는 주방 근처였다. 계연이 그들 부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부뚜막 위에 올린 솥뚜껑 틈새로 김이 폴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향긋한 쌀죽 냄새가 풍겨오며, 채 연통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밥 짓는 연기가 더해지니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광경이었다.
“하하! 선생님, 지금쯤 분명히 추우실 테지요. 여기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좀 쬐는 게 어떻겠습니까?”
남자가 이렇게 묻자 계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대답한 뒤, 아궁이 앞에 놓인 작은 나무 걸상 위에 앉았다. 그러자 계연의 얼굴이 불빛에 의해 붉게 그을린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 저희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일단 먼저 앉아 계십시오. 당신은 어서 가서 보(寶)를 깨워오시오.”
“네.”
부인이 나가자, 남자는 주방 안의 작은 식탁을 깨끗이 닦은 후에 긴 걸상과 작은 걸상을 차례로 갖다 놓았다. 그리고 한쪽에 놓인 항아리 안에서 절인 채소를 퍼 담았다. 항아리 뚜껑을 열자마자 그야말로 속세의 맛이라 할 수 있는 새콤한 냄새가 주방에 퍼졌고, 계연은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부인이 아직도 잠에서 깨지 못해 반쯤 눈이 감긴 아이를 데리고 나왔을 때, 남자가 부뚜막 위의 솥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솥 안에서 엄청난 열기가 담긴 증기가 확 올라왔다. 이에 아궁이 앞에 앉아있던 계연이 슬쩍 바라보니, 솥 안에는 딱 맞게 묽은 쌀죽이 들어있었다.
“아버지.”
“응, 일어났구나? 일단 얼굴부터 씻고 죽을 먹자. 이쪽 선생께서는 우리 집에 오신 손님이시니, 어서 인사드려라.”
그러자 아이는 계연의 차림새를 보더니 얼마간 정신이 들었는지, 약간의 어색함이 담긴 몸짓으로 공손히 읍을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래.”
그때, 커다란 공기에 담긴 죽이 식탁 위에 차례로 놓였다. 집주인은 아주 친근한 태도로 계연에게 식사를 들라고 권했다. 이에 계연은 아주 예의 바른 태도로 그의 말에 따라 식탁 앞에 가서 앉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절인 채소를 곁들여 아주 맛깔나게 먹었다. 그 모습에 보는 사람마저 식욕이 돋을 정도였다.
아이는 계연이 죽을 먹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더니, 곧 자기도 수저를 들어 반찬을 곁들여 후루룩 죽을 떠먹었다. 그 모습에 부인이 제 남편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글 읽는 서생은 식사도 남다르게 하는구나.’
선생의 모습을 보아하니 꽤 배를 곯았던 듯했다. 그는 먹는 속도가 무척 빨랐지만, 조금도 추잡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죽은 세 식구의 양에 맞춰 만든 것이었다. 물론 세 사람의 양보다는 조금 더 많이 끓였겠지만, 그래도 네 사람이 먹기에는 부족했다. 아이는 배가 부를 때까지 먹을 테고, 계연은 자신들이 초대한 손님이니 결국 부부가 조금 덜 먹는 수밖에는 없었다. 남자는 원래 죽을 세 그릇 정도 먹어야 배가 찼지만, 오늘은 한 그릇에 양을 조금 더 퍼담아 먹은 뒤 수저를 내려놓았다.
계연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는 죽 한 그릇을 빠르게 해치우고는, 두 번째로 죽을 퍼담으며 이 가족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부부가 입에 담는 화제는 대부분 자기 집 아이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왕 계연 같은 서생을 앞에 두었으니, 그들은 아이가 얼마나 똑똑한지와 아이의 미래에 대한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모든 부모가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듯이, 그들도 자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을 아이에게 쏟고 있었다. 돈을 들여 아이를 학당에 보내고 학당 이후의 길에 대해 미리 고민하는 것 말이다.
그들은 아이에 대해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문곡성(*文曲星: 학문과 글재주를 담당한다는 별)이 재림했다고 여겨지는 윤재성에 대한 화제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그 화제가 나오자 계연도 이렇게 물었다.
“저도 윤 공의 건강이 아주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천 리 밖에서 이렇게 도성까지 찾아왔지요. 지금은 상황이 어떻다던가요?”
계연은 자신이 마치 윤재성을 흠모하는 서생 중 하나인 듯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이렇게 탄식하며 물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당연히 이 부부의 공감을 끌어냈다.
“휴우, 윤 공께서는 그간 천하의 백성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셨죠. 병세가 호전될 기미가 아직 없다지만, 우리 백성들은 모두 그분께서 얼른 쾌차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원도 아니니, 그저 하늘에 부디 윤 공을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비는 수밖에요.”
“우리 훈장님께서 하는 말씀이, 윤 공께서는 분명 어느 간신배에게 해를 입은 거라고 하셨어요. 그놈들은 하나같이 윤 공이 조정에서 물러나길 바라는 놈들이라고요.”
뜨거운 죽을 입에 떠넣고 호호 불던 아이가 이렇게 말하며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아이의 이마에 묻은 거무튀튀한 자국을 떼어낸 뒤 이렇게 대답했다.
“음, 만약 네 훈장님께 나쁜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 그런 말은 밖에서는 함부로 해선 안 된다.”
그러자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고, 곁에 있던 아이의 부모가 연신 계연의 말에 동의하며 아이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