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꿍꿍이속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눈 사이, 윤청과 윤중을 비롯한 일행이 문가로 달려 나왔다. 상평 공주마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었다.
“선생님!”
윤청이 가장 먼저 기쁨과 놀라움이 담긴 얼굴로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뒤따라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했고, 상평 공주는 만복례를 올렸다.
“선생님,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아, 그렇지, 어서 들어오세요! 이미 주방에 아침 식사를 넉넉히 준비하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선생님을 보고 싶어 하셨어요!”
윤씨 형제가 잔뜩 흥분한 얼굴인 반면에 윤청의 두 아들은 조금 어색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에 상평 공주는 그들을 달래듯이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어서,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된다. 선생님께 예를 올리렴.”
두 아이 중 하나는 8, 9살 정도로 보였고 다른 하나는 4, 5살 정도로 보였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들은 어쨌거나 윤씨 집안 아이들이었던 터라, 기본적인 도리와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이미 깨우친 상태였다. 그들은 서로를 잠시 쳐다보더니, 곧 아주 정석적인 자세로 계연을 향해 읍했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계연이 대문에 나온 이들과 두 아이에게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상평 공주의 살짝 솟아오른 배를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윤씨 집안은 자손이 아주 번창했네요.”
그런 뒤 계연은 윤씨 집안 사람들을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응접실이나 계연에게 배정된 숙소로 향하지 않고 곧바로 윤재성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윤재상댁 후원에는 지금 궁중에서 나온 어의가 항상 거주하고 있었다. 만약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어의는 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내 이곳에서 윤재성을 돌보고 있었다. 어의는 제자와 함께 직접 약로(藥爐)에 탕약을 끓이기도 했고, 피해야 할 재료는 없는지 윤재성의 식사를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그 시각, 그들이 머무는 원락의 한쪽 구석에서는 나이 든 어의가 의서(醫書)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의 제자는 약로에 끓는 탕약을 살피다가, 멀찍이서 윤씨 집안 일동이 회랑을 따라 후원으로 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고는 곧바로 어의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부님, 윤 상서와 공주 전하께서 여기로 오고 계십니다.”
“뭐?”
그러자 어의는 얼른 등나무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윤씨 집안 일동은 이쪽을 향해 살짝 고개만 끄덕일 뿐, 와서 인사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고 곧바로 윤재성의 침실로 향했다.
그들이 지나가자 약로를 보던 제자가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 가장 앞쪽에 있던 사람이 또 어디서 청해온 명의는 아니겠지요?”
“흠, 그럴 가능성도 있겠구나……. 약로를 잘 지켜보고 있어라, 내 가서 보고 오마!”
“예!”
어의는 걸음을 서둘러 윤재성의 침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어딘가에서 온 명의가 윤재성의 병을 고쳐 공을 가로챌까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따라가는 것이었다. 저 외부에서 청해온 의원들이 약을 함부로 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하마터면 큰 사달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윤 재상께서 그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저 외부에서 청해온 의원은 말할 것도 없고 어의인 자신도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다.
계연이 윤재성이 머무는 방 안에 들어서자, 나이가 많이 든 윤재성의 부인이 그를 향해 공손히 만복례를 올렸다.
“계 선생님 오셨군요? 무척 오랜만이네요!”
노부인은 더는 작은 마을의 아낙네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완연한 재상 부인의 태도를 갖추어, 일종의 위엄마저 느껴졌다.
“부인,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계연은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한 뒤 침상에 있는 친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윤재성은 이미 일어나 침상 위에 앉아있었는데, 계연을 보고는 정중히 양손을 맞잡고 예를 취하며 말했다.
“계 선생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렇네요. 그러고 보니 윤 훈장님을 오래 만나지 못했군요!”
계연이 윤재성의 침상 앞으로 다가가자, 한쪽에 서 있던 하인이 얼른 의자를 가져다주어 계연은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계연은 방 안에 들어서서 윤재성을 보자마자 그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바로 예전에 호운이 윤청에게 선물해 준 붉은 여우 가면이었다. 아마 이것으로 그 많은 어의와 명의들을 속아 넘긴 듯했다.
그때, 나이 든 어의가 다급히 들어왔다. 그는 윤씨 집안 사람들이 바깥으로 물러나 서 있고, 계연은 침상 머리맡 근처에 앉은 걸 보고는 계연이 맥을 짚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 상서, 저쪽이 새로 청해오신 의원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제가 몇 마디 나눌 말이 있습니다.”
어의가 다급한 어조로 윤청에게 다가가 묻자, 윤청이 그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분은 우리 윤씨 집안과 막역한 사이의 지인이십니다. 아마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일부러 보러오신 듯합니다.”
“아, 그렇군요!”
어의는 그 말에 마음을 놓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잘됐군, 소란이 일지는 않겠어.’
계연은 윤재성과 아직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어의가 온 것을 보고는, 윤재성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건 알았지만, 장단을 맞추기 위해 어의를 향해 물었다.
“의원님, 윤 훈장님의 상태가 좀 어떤가요? 언제 다시 회복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어의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앞으로 한 발짝 나가 탄식하며 말했다.
“윤 재상께서는 오랜 세월 백성을 돌보고 국정에 힘쓰시느라, 몸에 일찍이 피로가 쌓인 상태셨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위중해지지 않았을 테지만, 그 후로도 내내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며 재상님의 신체에 더욱 무리가 간 데다 정신적인 부담이 더해져 결국 쓰러지신 것입니다. 이에 저희는 제일 온화한 처방을 따라 약선(藥膳: 약선요리, 약재를 사용하여 만든 건강식)과 조합하여 재상 어른의 몸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저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 너무 큰 충격을 받으셔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이미 공개적인 비밀이 된 지 오래였으므로, 어의는 윤재성을 앞에 두고도 그다지 꺼리는 기색 없이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다시 이런 위로의 말을 섞어 이렇게 아첨했다.
“다행히 재상 어른께서는 마음 상태가 밝고 낙관적이십니다. 이는 환자들에게 아주 보기 드문 일이지요. 하늘이 우리 대정국을 보우하시니, 분명 재상 어른께 무슨 일이 생기도록 두고 보진 않으실 겁니다!”
계연은 어의를 해 먹기도 참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예, 그럼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계 선생님과 저희 아버지께서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게요.”
“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저를 불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어의가 나가자 계연은 다시 웃으며 윤청과 윤재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 훈장님, 이게 대체 무슨 속셈이신가요?”
상평 공주는 얼른 하인들을 손짓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놀도록 했다. 그러고는 아원에게 명해 바깥 문을 지키고 서 있도록 했다. 나갈 사람이 다 나가자, 침상에 있던 윤재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역시 계 선생님은 못 속이겠군요!”
그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겉보기에는 천하가 태평하고 대정국은 부강해진 듯이 보이지만, 실은 아직도 갖가지 문제가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니 마치 의원이 독을 뽑듯, 천천히 환자의 몸을 돌보면서 독을 제거해야 하지요. 하지만 어떤 독소들은 뿌리가 단단하고 깊어서, 그것을 움직이면 뼈와 내장이 상하게 되어 아주 천천히 손을 대야 하지요. 저희 부자(父子)가 가진 정치 이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오랜 세월 서두르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대정국을 위해 기초를 다져 왔습니다……. 다만, 저희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어떤 이들의 극렬한 반발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반대는 더욱 극렬해지기만 하지요.”
이 점은 계연도 아주 잘 아는 바였다. 윤씨 집안 사람들도 봉건 사대부 계층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개혁파라고 볼 수 있었다. 비록 윤씨 집안은 겉보기에는 모든 대신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실은 눈에 들어간 모래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언젠가는 대신들을 차근차근 제거해나갈 생각이었고, 조정에서는 이를 꿰뚫어 본 자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윤재성은 사실 이 일의 핵심은 말하지 않은 상태였다. 계연도 굳이 조정의 일을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대신 윤청이 간결하게 덧붙였다.
“최근 성상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으십니다. 미묘하게 변했습니다!”
그 말에 계연이 눈썹을 치켜들며 윤청과 윤재성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재성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사람은 모두 나이가 드는 법이지요. 그 때문에 대대로 수많은 명군(明君)이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윤씨 일가는 권세가 너무 크고, 백성들 사이에 명망이 너무 높습니다. 그러니 반대파들이 이를 이용해 성상의 마음을 움직이면 저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윤청이 그의 말을 받아서 이어나갔다.
“아버지의 말씀대로입니다. 제가 비록 온갖 방법을 써서 백성들이 아버지를 언급할 때마다 황상께서 아주 현명하시다는 이야기도 함께 하게끔 유도하고는 있지만, 황실의 마음은 알기가 어렵다지 않습니까? 그래도 잘되고 있는 편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서, 특히 아버지가 위독한 중병에 걸린 게 확실해진 후로는 곧 태도가 분명해질 듯하거든요!”
윤청은 조금도 걱정하거나 곤란해하는 기색 없이 이렇게 말하며 환한 미소까지 얼굴에 드리우고 있었다.
윤씨 부자가 말한 조정 세력 간의 대립은 계연도 예상하던 바였다. 하지만 홍무제 양호가 윤씨 집안을 의심하며 꺼리기 시작하다니, 이것은 계연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계연은 원래 양호가 윤씨 일가의 충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굳게 믿고 있다고 여겼다. 이는 아마 양호의 첫인상이 꽤 괜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그에게서 느껴지던 자미(*紫微: 북두칠성의 동북쪽에 있는 열다섯 개의 별 가운데 하나로, 중국 천자(天子)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고 함)의 기운은 아직도 계연의 인상에 깊게 남아 있었다.
계연은 윤씨 부자가 말하는 조정의 일을 가만히 듣고는 있었지만, 속세 황조의 조정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간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으로 보면, 윤씨 부자는 이미 그다지 좋지 않은 국면에 접어든 후였다. 계연은 윤재성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그의 곁에는 윤청과 윤중이 있고 또 상평 공주도 있으니 자신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계연은 윤청의 설명을 듣고는 더 캐묻지 않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윤재성을 향해 물었다.
“윤 훈장님, 이 가면이 꽤 쓸만한가 보네요?”
윤재성은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이 가면은 감촉은 물론이고 모든 게 진짜 자신의 피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만약 스스로 가면을 쓴 게 아니라면, 자기가 아예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하하! 전에는 몰랐는데 직접 가면을 써 보고 나니, 호운 그 아이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호선(*狐仙: 여우가 수천 년 동안 도를 닦아 되었다는 신선)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더군요.”
그 말에 윤청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호운을 보러 가지 못했네요. 하지만 호운에게는 시간이 무척 빨리 흐른 것처럼 느껴지겠지요.”
이 세계는 교통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 윤씨 부자도 처리해야 할 공무가 쌓여 있는 와중에 그리 먼 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미 이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지는 무척 오래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