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선택권과 결정권
“그렇구나, 요즘 호운은 성격이 많이 차분해졌단다. 지금 호운은 수행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어서, 시간이 그리 느리게 흐른다고 여기지는 않을 거야.”
“놀 궁리만 하는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윤청은 자신의 친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계 선생님이 호운에 대해 이렇게 말해주자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계연은 곧 윤중을 바라보며 물었다.
“참, 호야. 보아하니 무예가 많이 늘었더구나. 병법이나 진법 공부는 어떻게 되고 있느냐?”
계 선생님이 마침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내내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윤중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느새 준수한 외모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청년으로 자라나, 바람처럼 가볍고 소나무처럼 꼿꼿한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얼굴에 앳된 티는 전부 사라지고, 아주 심지가 굳고 강인해 보였다.
“계 선생님. 무공에 대해 논하자면, 제가 비록 강호의 고수들은 많이 만나보지 못했지만 대신 아원 아저씨와는 많이 겨뤄보았습니다. 또, 금군 교장(*敎場: 군사 교육 또는 군사 훈련을 위한 시설)에도 자주 가봤지만, 그들 중에는 저와 겨룰 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도성의 장군들과 겨룬다고 해도 분명 제가 그들 대부분을 이길 수 있을 겁니다. 병법과 진법에 대해 논하자면, 병사들을 배치하고 책략을 내는 것은 토론을 거쳐 결정되는 것이므로 감히 스스로가 어느 정도 실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있습니다!”
계연의 눈에는 윤중의 기혈(氣血)이 보통의 무인들을 뛰어넘을 정도로 왕성한 것이 보였다. 게다가 윤중은 아직 군사들을 이끌어 사람을 죽이거나 살기를 내뿜어 본 경험도 없었는데, 인간이라면 모두 지닌 화기(火氣)도 이미 보통 사람보다 왕성했다. 이것만 봐도 윤중은 아주 남달리 뛰어난 인재였다.
“잘했구나. 후에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그를 통해 더 진보할 수 있을 거야.”
계연은 담담히 칭찬을 건넨 후, 그 방면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았다. 그러고는 그간 윤씨 일가에 일어났던 온갖 사소하고 흥미로운 일들에 대해 들었다. 윤중은 몇몇 황자들과 함께 군중에서 훈련하며 겪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뒤이어 윤씨 집안에 새로 태어난 아이들, 또한 조금 전 종이학을 보고 일어난 소란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들은 내내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그간의 소식을 주고받았다. 계연도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흥미로운 일들을 몇 가지 골라 이야기해준 후 풍성한 만찬을 함께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계연도 이곳에 얼마간 머무르기로 하고는 예전에 묵었던 원락의 곁채에 자리를 잡았다. 실은 계연에게는 윤씨 집안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대정국 조정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만일에 대비하려는 생각도 있었다. 만일 윤씨 일가가 실패한다면 당연히 계연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정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겠지만, 막역한 친우의 가족을 보호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 * *
계연은 윤씨 집안에서 2주간 머무르며 관원이나 관직이 없는 윤재성의 제자들이 윤재성을 살피러 줄지어 찾아온 것을 보았다. 조정 중신들의 방문도 꽤 있었다. 하지만 황실에서는 홍무제 양호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현 조정의 상황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오전, 윤씨 집안 두 아이가 계연이 머무는 곁채를 향해 달려왔다.
“계 선생님! 계 선생님!”
“선생님, 저희 왔어요…….”
두 아이의 잔뜩 들뜬 목소리에 이어, 그들을 뒤따라오는 시녀들이 연신 “조심하세요!”, “천천히 가세요!”라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아이들의 영각(靈覺)은 아주 민감한 편이라, 그들은 계연처럼 깨끗하고 온화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에게 쉽게 친밀감을 느꼈고 금방 계연과 친해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계연을 찾아와 이야기를 들었고, 윤씨 일가도 당연히 아이들이 계연과 가까워지는 것을 무척 반겼다. 그들은 계연을 너무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이 그와 마음껏 시간을 보내도록 놔두었다. 어쨌든 계 선생님은 이런 일로 결코 화를 내지 않을 테니 말이다.
계연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신 뒤 막 방에서 나온 참이었다. 윤씨 일가는 계연이 늦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두 아이는 이런 오전 시간에는 잘 오지 않았다.
“오늘은 무척 일찍 왔구나?”
아이들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뛰어와 그의 앞에 나란히 서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계 선생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잘 잤단다!”
둘 중 나이가 몇 살 더 많은 아이가 헤헤 웃으며 계연에게 말했다.
“선생님, 아버지께서 선생님께 태자 전하께서 오셨다고 말씀드리라고 하셨어요.”
“음?”
계연이 그 말을 듣고 저택의 앞뜰로 시선을 돌린 뒤 법안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호연정기의 빛에 살짝 감춰진 자미의 기운이 보였다. 뒤이어 계연은 고개를 숙여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池)야, 전(典)아, 선생님을 따라 좀 걷자꾸나.”
“네!”
“좋아요!”
계연은 웃으며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앞뜰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윤재성의 거처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회랑에서 평상복을 입은 채로 시종 둘과 윤씨 집안의 관사를 거느린 이를 마주쳤다. 하지만 그의 곁에 다른 윤씨 일가는 없었다. 계연은 자미의 기운만 보고도 그가 태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태자는 다급히 걸어오다가 맞은편에서 무척 기품있는 태도의 남자가 윤씨 집안 두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태자는 아무런 말 없이 그들을 지나쳤고, 계연도 태자를 한번 살펴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함께 있던 아이들도 무척 예의 바르게 조용히 계연을 따랐다.
계연의 일행이 지나쳐간 뒤, 태자 양성(楊盛)은 고개를 돌려 계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회랑을 돌아 나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에 윤지(尹池)와 윤전(尹典)의 손을 잡고 가던 게 누구냐? 나는 처음 보는 자인데?”
태자의 물음에 그의 뒤를 따르던 관사가 즉시 이렇게 답했다.
“태자 전하께 아룁니다. 저분은 계씨 성에 연 자 이름을 가진 분으로, 영안현에서 오셨는데 저희 집안 공자들과 무척 가까운 사이라 들었습니다. 그 외에는 소인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군!”
그 말에 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안현에서 온 걸 보니 아마 친척이나 옛 친우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서둘러 윤재성이 머무는 침실로 향했다.
윤재성은 이때 침상 위에 누워있었는데, 하인이 먼저 들어와 침상 곁에서 낮은 소리로 아뢰었다.
“어르신,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과 거의 동시에 태자가 방 안으로 들어와 침상 가까이 다가갔다.
“스승님!”
본디 학식이 깊고 도량이 넓은 데다 풍모가 비범했던 스승이 허약해진 모습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걸 보자, 태자는 스승의 상태가 그가 전에 왔을 때보다 더 나빠졌다는 걸 알았다. 이에 충격을 받은 태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태자의 목소리에 윤재성이 눈을 떠 양성을 바라보았다.
“태자 전하, 신이 침상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지 못하는 걸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스승님! 스승님과 제 사이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당연히 스승님의 건강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래도 예는 어떤 상황에서나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아무리 스승과 제자 관계라 하더라도 태자 전하이시니까요.”
윤재성은 자기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나이가 되니 그간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적지 않았는데, 그중에는 각고의 노력으로 성실히 공부하거나 뛰어나게 총명한 이들도 있었다. 태자는 그 가운데서 그리 출중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윤재성이 아끼는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
“전하, 이 늙은이가 이미 저를 보러오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저를 정말로 스승으로 여기신다면, 왜 제 간언을 듣지 않으십니까?”
태자는 손으로 제 허벅지를 꽉 쥐며 최대한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스승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변복을 하고 온 터라 제가 여기 온 걸 아는 이는 없습니다. 설령 누가 알아차리더라도 감히 저를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천하의 대의(大義)이자 진리입니다! 참, 스승님, 듣자 하니 오래전에 선대 황제께서 책봉한 천사(天師) 하나가 다시 도성에 들었답니다. 꽤 실력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 그가 스승님의 병세를 낫게 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윤재성이 쇠약해진 모습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천하에 기인(奇人)이 얼마나 많은데, 스승인 제가 어찌 한두 사람 아는 이가 없겠습니까? 이번에 온 그 천사도 분명 잔재주를 좀 부리는 사기꾼일 겁니다. 소용없을 테니 전하께서는 마음 쓰지 마십시오!”
양성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고, 반 시진(1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다가 윤재성이 어서 가라며 쫓아내자 마지못해 떠났다. 윤재성의 저택을 나온 양성은 깊이 탄식하며 황궁으로 향했다.
* * *
동궁(東宮: 태자가 머무는 곳)에 도착한 양성은 그리 좋지 못한 기분으로 자신의 서재에 들어서다가 홍무제가 안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깜짝 놀란 양성은 얼른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부황을 뵙습니다!”
양호는 이미 70세가 다 되어가는 나이여서, 윤재성보다 몇 살이 더 많았다. 이제 그는 누가 봐도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병세가 위중한 윤재성과 비교하면 훨씬 더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는 이때 아무런 표정도 없이 양성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에 양성의 이마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맺혔다.
“어디를 갔다 왔느냐?”
“소자, 그…… 그것이…….”
“윤 재상을 보러 갔었느냐?”
태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부황이 이렇게 묻는 걸 보니 이미 다 알고서 묻는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황제를 앞에 두고 기군(*欺君: 기군망상(欺君罔上)의 줄임말로, 황제를 속인다는 뜻)의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양성의 처지는 예전의 양호와는 완전히 달랐다. 양호는 제 형제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황위를 두고 다퉜었다. 하지만 양성은 그런 위협을 느끼지 못하고 태자가 된 인물이었다. 홍무제 양호가 아들 가운데 양성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황제는 양성을 태자로서 인정해주는 편이었다. 양호는 양성을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로 삼아, 힘이 닿는 대로 그를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있었다.
“윤 재상도 네게 이렇게 자주 오지 말라고 말하지 않더냐?”
그러자 양성이 눈썹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가슴팍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지만, 끝내 양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도 좋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보거라.”
홍무제 양호의 말을 들은 양성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스승님께서는 저희 양씨 황실에 충심이 깊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수십 년간 국정을 돌보느라 그분의 몸과 마음이 모두 쇠하시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부황께서는 이 시대의 명군이신데, 어찌하여 스승님을 믿지 않으시는 겁니까?”
양호는 태자의 서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젊고 혈기왕성한 아들을 바라보았다.
“짐은 한 번도 친애하는 윤 경(卿)의 충심을 의심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리하십니까?”
“하하…….”
황제가 웃으며 대답했다.
“성아, 설령 짐이 윤재성과 윤중, 심지어는 짐조차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없는 윤청을 비롯해 윤씨 일가 모두의 충심을 믿는다더라도…….”
황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양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군주가 된 이는 무릇 편안한 처지에 있을 때도 위험할 때의 일을 미리 생각하고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居安思危). 때로는 네가 무얼 믿느냐보다, 선택할 여지와 결정할 권위를 가진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다! 너는 짐이 어사대부(*御史大夫: 관리 감찰 기관인 어사대의 총책임자) 소도(蕭渡)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느냐? 정말로 짐이 다른 이들이 조정의 분란을 조장하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놓인 서책 몇 권을 뒤적였다. 거의 전부가 윤재성이 쓴 책이었다.
“하하, 전부 좋은 책들이로구나. 설파하는 도리도 모두 옳은 말들이다. 하지만 이런 책만 봐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오직 이런 책들만 읽는다면, 모든 생각과 행동이 이 책을 따르지 않겠느냐?”
황제가 고개를 들어 심드렁한 얼굴로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