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79화 (579/892)

579화. 자미전(紫薇殿)

태자의 자리에 올라 흔들림 없이 앉아있을 수 있다는 건, 양성이 절대 멍청한 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가 아무리 그를 아끼고 조정 대신들이 그를 지지한다 해도 이 자리를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태자도 당연히 부황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게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태자는 자기 스승이 어떤 사람이고, 벗인 윤중이 어떤 자인지, 또 제부(*弟夫: 여동생의 남편)인 윤청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제왕술의 중요성을 이해했고 조정 세력 사이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알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부황의 말에 토를 달 수가 없었으므로, 황제는 아들이 오래도록 말이 없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침묵을 유지하다가, 양호가 먼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윤씨들은 모두 확실히 충신들이고 집안 내부의 가르침도 엄격하지. 심지어 짐은 아직 어린 윤지와 윤전, 또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호(*윤청의 처인 상평 공주)의 아이들도 모두 충신이 될 거라 확신한다. 윤청과 호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느 날 더는 그들이 없게 된다면? 윤청의 아들까지 3대가 충신일 수도 있고 어쩌면 4대까지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들의 자손이 5대, 6대에 이르면?”

태자는 내내 부황을 바라보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이렇게 말했다.

“그럼 소씨 집안은요? 어사대는 천하 문무백관을 감찰하는 곳입니다. 어사대부의 위명은 스승님께 미치지는 못하나, 그가 쥔 권세는 훨씬 막강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비열하고 더러운 짓거리를 하는 이들입니다!”

태자는 이렇게 말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뜻은 이미 명확했다. 이러한 소씨 일가까지 황제의 신임을 받을 수 있다면, 나라를 위해 충심을 바치는 윤씨 집안은 왜 받을 수 없단 말인가? 지금의 상황은 널리 퍼져나가지만 않았다 뿐이지, 만약 알려지게 되면 천하의 모든 충심 깊은 이들은 모두 황가에 깊이 실망하지 않겠는가? 물론 부황이 윤씨 일가에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윤재성을 지지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일종의 신호였다.

양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다.

소씨 일가가 무슨 일을 벌이고 다니는지 자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소씨는 양씨 황가의 개였다. 제위에 오른 이가 무능의 극치를 달리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손에 쥐고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윤씨 일가는 달랐다. 그들은 너무 ‘올발랐기’ 때문이다.

태자의 말은 이미 황제에게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황제는 이에 노기가 일어 차가운 얼굴로 태자에게 물었다.

“만약 짐이 퇴위하여 네가 대정국의 제위에 오르게 되면, 네 스승의 뜻을 따라 소씨와 그를 따르는 일당을 뿌리 뽑는 건 물론, 모든 썩어빠진 관리들을 내보내겠다는 뜻이냐?”

태자도 답답한 마음에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부황의 물음에 “네.”하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는 곧 냉정을 되찾고는 낙담한 모습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음?”

황제는 아들이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어 의아해했다.

그때, 태자가 고개를 들더니 깊이 탄식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부황, 스승님의 상태가,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태자의 말에 황제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서책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잠시 뒤 깊이 탄식했다.

“짐도 이제 늙었다……. 짐은 불로장생도 바라지 않고, 신선을 찾으려는 생각도 없다. 짐이 걱정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양씨 강산(江山), 대정의 천하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을 돌아 나와 태자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아들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린 뒤 천천히 바깥으로 나갔다. 황제도 어쩔 수 없이 태자를 훈계하기는 했으나, 그가 양성을 아끼는 것은 양성이 이런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왕의 집안은 무정하다지만, 그들이라고 어찌 정을 갈망하지 않겠는가?

양호는 서재를 나와 봄비가 내릴 듯한 어둑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스승님…….’

그는 속으로 이렇게 탄식한 뒤 곧 동궁을 떠났다.

그를 따르던 나이 든 태감은 조심스럽게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은 뒤, 태자에게 공손히 예를 올리고는 얼른 황제를 뒤따라갔다.

부황이 떠난 지 한참 후에야 태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그도 조금 전까지 긴장으로 인해 등허리가 뜨거워져 있었다.

양호는 동궁을 나와 그쪽을 한 번 더 뒤돌아보고는, 어가(御駕)에 오른 뒤 태감을 향해 말했다.

“사천감으로 가자.”

“예.”

태감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뒤 소리 높여 명했다.

“성상께서 명하시길, 사천감으로 가자 하신다!”

어가 앞에서는 시위들이 길을 열었고, 황제가 탄 어가는 곧 황궁을 나와 황성 안 도로를 따라 나아갔다. 일각(15분) 후, 어가가 북쪽의 사천감에 이르자 황제가 채 어가에서 내려서기도 전에 태감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상께서 납시었다!”

그러자 잠시 후, 머리가 하얗게 센 사천감 감정 언상이 관리들을 이끌고 나와 황제가 탄 어가를 향해 예를 올렸다.

“소신들이 폐하를 뵙습니다!”

“예를 거두어라.”

양호는 어가에서 내려서 말한 뒤, 사천감 관리들을 이끌고 자미전(紫薇殿) 안으로 향했다.

자신의 부황과 달리, 양호는 사천감에 오는 일이 무척 드물었다. 그래서 그는 이곳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조정의 다른 기관에 가보면 보통 탁자 위에 각종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관원들이 무더기로 모여 무언가를 토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미전은 이와는 달랐다. 자미전은 전체적으로 내부가 차분한 색조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고, 꼭 필요한 위치에 놓인 책상을 빼면 별자리 그림이나 동으로 주조된 각종 천체의 모형들이 더 많았다.

양호는 중앙에 놓인 2층짜리 건물만 한 높이의 모형 앞에 다가갔다. 그것은 구리로 만든 수많은 고리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 아주 복잡해 보였다. 또한 그 위에는 별을 의미하는 수많은 구리 공이 달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7개의 구리 공이 가장 눈에 띄었는데, 양호가 그 위에 새겨진 글자를 보니 북두칠성인 듯했다. 또한 아래쪽 고리에 손잡이가 달린 것을 보니, 누군가가 이것을 자주 움직이는 것 같았다.

황제는 뒤를 따라오던 언상을 향해 물었다.

“이게 무엇인가, 밀어봐도 되겠는가?”

그러자 언상이 공손히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신은 이 모형을 성두의(星斗儀)라고 부릅니다. 한번 밀어보십시오.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별들의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양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고리에 달린 손잡이를 밀자, 모형 전체가 움직이며 별들이 위치를 바꿨다. 가장 위쪽 일곱 개의 별도 마찬가지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언상이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폐하, 저 위를 보십시오. 가장 위쪽에 있는 별들이 북두칠성인데, 그중 자미성의 움직임이 가장 적습니다. 이에 별들의 주인이라 불리며 이 별은 속세의 황권을 상징합니다.”

만약 계연이 살던 지난 생에서 천문에 관한 지식이 있는 누군가가 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미성은 바로 북극성으로, 본디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 모형은 비록 움직임이 적기는 하지만 그래도 틀린 것이었다. 하지만 수선자가 된 계연은 언상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황제는 그것을 잠시 보더니 언상에게 말했다.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그 두 천사는? 그를 불러오게.”

“예, 지금 바로 그를 불러오겠습니다!”

언상은 얼른 명을 내려 사람을 보낸 뒤, 황제를 자신이 사무를 처리하던 자리에 앉도록 안내했다.

대수국에서 천사처를 두어 천사를 존귀하게 대접하는 것과는 달리, 대정국의 천사들은 모두 사천감에 이름이 등록되어 사천감 아래 속한 적은 인원들로 인식되었다.

천사라는 직함은 들으면 그럴듯해 보였지만, 실은 아주 미미한 관직이었다. 대략 종6품 정도의 위치였고 실권도 없었다. 그들이 하는 일도 황제의 명을 따르는 것 외에는 사천감의 업무에 협조하는 정도였다.

얼마 후, 두장생이 그를 찾아온 사천감 관리를 따라 함께 서둘러 자미전으로 향했다. 그는 비록 현재 자신의 도행에 얼마간 자신이 있었으나, 감히 황제의 앞에서 그것을 의기양양하게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이 양씨 황제들은 모두 대단한 이들이었다. 현 황제의 아버지는 심지어 진선(眞仙)의 목을 베라는 명을 내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두장생은 자미전에 들어 중앙에 앉은 황제를 발견하고는 얼른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신 두장생, 폐하를 뵙습니다!”

양호는 품이 넓은 장포를 입고 선풍도골(*仙風道骨: 고아한 풍채를 이름)의 모습을 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사실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원래는 일찍이 죽었을 거라 여겼는데 다시 도성으로 돌아올 줄이야.’

“예를 거두게. 듣자 하니 수행에 큰 진전이 있었다고?”

“당치 않습니다. 소신, 아직 도행이 미미하여 감히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이 천사는 그가 처음 봤을 때도 노인이었거늘, 지금은 양호 자신도 늙었는데도 여전히 백발동안이었다. 이에 양호는 호기심이 일어 이렇게 물었다.

“천사의 사존(*師尊: 스승)이 속세를 떠난 신선이라지. 설마 그간 도성을 떠나 있었던 것이 사존이 있는 곳에서 수행을 닦기 위해서였나?”

그러자 두장생은 얼른 다시 예를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런 말이 바깥에 돌기는 하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사실 소신이 말하고자 한 것은, 소신의 수행법이 일찍이 어느 도행이 뛰어난 선인께 얻은 거라는 거였습니다. 그것을 전해주신 선인(仙人)과는 얼마간 인연이 있다 뿐이지, 결코 그분께서 저를 제자로 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 그렇군.”

두장생의 말은 조리 있고 태도는 겸손했다. 이에 양호는 그가 허풍만 잔뜩 떨고 어떻게 이득을 얻을까 잔머리를 굴리던 천사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자신이 예전에는 그에 대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듯했다. 결국 천사라는 이들 중에 모두 그런 사기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두 천사, 그럼 짐이 묻겠네. 자네가 지닌 능력은 어느 정도인가?”

이에 두장생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폐하께 사실대로 아뢰겠습니다. 소신은 진정한 선인이라고 불리기는 어려우나, 수선자에는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갖춰야 하는 능력도 어느 정도 있는 편입니다.”

“그렇다면 짐에게 몇 가지 보여주게.”

만약 다른 이가 막무가내로 두장생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면, 그는 상대도 하지 않을 테지만 황제가 요구하니 별도리가 없었다.

이에 그는 별 말하지 않고 공중에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안개가 깔리며 점차 그와 똑같은 모습의 두장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천사가 함께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리며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폐하, 그럼 소신이 능력을 펼쳐 보이겠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 뒤 함께 법력을 펼쳤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로 다시 안개가 깔렸고, 그들은 각자 좌우로 가서 섰다. 안개가 점점 더 넓게 깔리며 곧 자미전 전체를 뒤덮었다.

뒤이어 자미전 안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안개는 곧이어 물살이 용솟음치는 바닷물의 모습처럼 변했다. 그에 더해 바람 소리와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차 망망대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솨아아아……!

파도가 치며 물살이 높이 솟아오르기를 반복했고, 어느새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진 가운데 바다 위로 별이 점점이 빛났다. 뒤이어 달이 떠오르고 지더니 여명이 밝아왔다. 자미전 안은 다시 원래의 밝기를 회복했고 안개도 점차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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