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설마 그렇게 공교롭겠어?
한편 소릉은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누르며 후원의 무예 수련실로 가서 훈련용 말뚝에 대고 연이어 주먹을 날렸다.
한참 뒤, 소릉이 돌연 주먹질을 멈추고서 고개를 돌리자 집안의 한 늙은 하인이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공자……. 어르신을 너무 원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르신께서는 이미 연세가 적지 않으십니다. 소씨 집안은 몇 대째 아들을 하나만 낳아왔으니 그분이 조급해지시는 것도 정상입니다. 이번 혼사는…….”
“휴…….”
그러자 소릉은 깊이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듯이 대답했다.
“알았다. 아버지께 가서 이번 혼사는 원하시는 대로 처리하시라 해라.”
그러자 늙은 하인은 그를 향해 양손을 맞잡고 인사한 뒤 천천히 뒷걸음질 쳐 떠나갔다. 그가 멀어지자 소릉은 다시 맹렬히 주먹을 휘둘렀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말뚝 위에 얕게 파인 흔적이 남았고, 소릉의 주먹 위에 피가 흘렀다.
* * *
이때 두장생은 자신의 이름이 소씨 가문에서 거론된 것을 당연히 알지 못한 채로, 마차를 타고 첫째 제자와 함께 윤 재상댁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장생의 제자는 바깥에서 마부와 함께 나란히 앉아있었고, 두장생은 마차 안에서 홀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길 위에는 석판이 깔려 다른 길과 견주자면 비교적 평탄했으나, 그래도 마차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당연히 두장생의 몸도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이는 그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마차가 영안가에 접어들어 점점 더 윤 재상댁에 가까워질수록 두장생은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에 그가 눈을 떠 마차의 가림막을 거둬보니, 멀리 보이는 윤 재상댁이 왜인지 무척 환하게 느껴졌다. 이에 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뒤 법력을 두 눈으로 끌어올리고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윤 재상댁 전체가 호연정기에 물들어 주위로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그 빛이 닿는 넓은 범위 안에는 어떤 탁한 기운도 존재하지 않았고, 삿된 존재도 없었다.
* * *
반각(半刻: 7~8분) 뒤, 윤 재상댁.
손님들이 머무르는 처소의 뜰에서는 계연이 윤재성의 저작물 가운데 하나를 뒤적였다.
그때, 윤씨 집안의 두 아이는 계연의 맞은편에 앉아서 돌탁자 위에 두 팔을 얹고 손으로 얼굴을 받친 자세로 계연의 ‘이야기 시간’이 시작되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낮 동안 윤청은 바깥에서 공무를 처리했고, 윤중은 군영에 가 있었다. 게다가 계 선생님이 온 후로, 두 아이는 서재에 가서 공부하지 않아도 혼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연히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계연이 옆에 붙어있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계연이 책에서 눈을 떼더니 두 아이를 향해 말했다.
“누군가 너희 할아버지를 뵈러 왔구나. 너희는 거기로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손님이 나오시면 이리로 데리고 와주렴.”
그 말에 윤지와 윤전이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계연을 향해 대답했다.
“알겠어요!”
“네!”
“선생님, 지금 가면 되나요?”
그러자 계연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서두를 필요 없다. 그 손님도 할 일이 있으니 말이야. 음, 그럼 내가 이야기 하나 해주마. 듣고 싶니?”
“듣고 싶어요!”
“좋아요!”
* * *
아이들이 흥분한 얼굴로 대답하던 시각, 두장생은 아원의 안내를 받으며 윤재성이 머무는 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원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걸음을 멈춰서서 방향을 손짓하며 그를 이끌었다. 이는 아원으로서는 최대한의 예를 보인 것이었다.
“두 천사, 이쪽입니다. 저곳이 바로 어르신께서 머무는 침실입니다. 지금부터는 천사와 제자께서는 목소리를 줄여 주십시오.”
“예, 예!”
아원이 두장생과 그의 제자를 데리고 윤재성의 침실로 향하자, 어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러다 그들이 황상께서 보내신 사천감의 천사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몇 마디 당부한 후 자리를 떠났다.
두장생은 직접 윤재성을 만나게 되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침상에 누운 이 허약한 노인은 이미 평범한 사람을 초월한 존재로, 서생들의 말 그대로 ‘성현(聖賢)’ 그 자체였다. 이에 두장생도 저도 모르게 더욱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제자와 함께 침상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소인 두장생, 윤 재상 어른을 뵙습니다!”
“커흠……. 두 천사, 어서 예를 거두시오. 내 침상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지 못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주시오. 아원, 나를 일으켜라.”
“예, 어르신!”
아원은 얼른 다가가 윤재성을 부축했다. 그러자 두장생이 잔뜩 황송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누워계셔도 됩니다! 소인은 그저 황상의 어명을 받아 재상 어르신의 병세를 살피러 왔을 뿐입니다. 그러니 일어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하, 알겠소. 그럼 천사께서는 마음 편히 보시오.”
“예!”
두장생은 얼른 법력을 펼쳐 윤재성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윤재성을 바라보자 눈이 다 시릴 정도였다. 윤재성은 호연정기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제외하면, 기운도 약하고 명화(*命火: 생명의 근원이 되는 불로, 인간의 성장·발육·노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도 허약했다. 안색은 어두침침하여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상태였다.
한참 뒤, 두장생이 법안을 거두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천사, 어르신의 상태가 어떻습니까? 고칠 방법이 있겠습니까?”
아원이 근심이 어린 얼굴로 이렇게 묻자 두장생은 대답하기가 무척 난처했다. 그는 한참 고민하다 결심을 내린 뒤,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윤 재상께서는 편히 정양하고 계십시오. 저는 지금 당장 돌아가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몸의 도행을 걸고 온 힘을 다해 하늘의 뜻과 싸워보겠습니다!”
그는 격앙된 얼굴로 이렇게 호언장담했다. 두장생은 자신이 모은 진귀한 것들을 가지고 와, 그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윤재성을 한번 구해보기로 결심했다. 황제의 성지도, 조정 세력 간의 다툼도 더는 상관없었다. 어떤 의원이나 약으로도 대정국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인재를 고칠 수 없다면, 자신이 나서서 모든 걸 내던지고 한번 온 힘을 다해볼 작정이었다.
‘정 안 되면 이 천사 자리도 버리고 도망치면 되겠지.’
그러자 윤재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모두 하늘에 달린 법이오. 이 늙은이는 수십 년간 조정에서 일을 해왔소. 비록 할 일을 모두 마쳤다고 할 순 없지만, 설령 나는 이대로 목숨이 다하더라도 웃으며 황천으로 갈 수 있소. 그러니 천사도 그리 걱정하지 마시오!”
그의 말에 두장생은 웃으며 다시 간단히 예를 올렸다.
“재상 어른께서는 편히 쉬고 계십시오. 이렇게 보여도 저는 진정한 수행자이니, 속임수나 쓰고 사도(邪道)를 걷는 이들과는 다릅니다. 제가 가진 선도(仙道)의 수단을 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 어쩌면 마른 가지에도 다시 싹이 돋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은 돌아가 준비를 해야 하니,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두장생은 자신감이 가득해 보였다. 원래는 그도 자신이 없었으나, 윤재성에게 이렇게 말하며 저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설득한 것이다.
“좋소,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소. 아원, 두 천사를 배웅하거라!”
“예, 어르신!”
두장생은 다시 한번 윤재성을 향해 예를 올린 뒤 아원을 뒤따라 나갔다. 그는 속으로 어떤 방법을 써서 윤 재상을 고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자신이 그간 모아온 영초(*靈草: 약재로 뛰어난 효능이 있는 풀) 등을 떠올리다가 마침내 어의와 함께 협력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앞쪽 회랑에서 어린아이 두 명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한 아이가 그들을 향해 달려오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아원, 아원! 저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보러 온 사람이죠?”
“예, 그렇습니다.”
두장생과 그의 제자가 발랄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뭐라 입을 떼기도 전에, 나이가 좀 더 있는 아이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잘됐네요. 계 선생님께서 저희한테 저분들을 모셔오라고 하셨어요.”
아원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얼른 “예.” 하고 대답하고는 두장생과 그의 제자를 향해 말했다.
“두 천사, 이왕 계 선생님께서 두 분을 뵙기를 원하신다니, 부디 저를 따라오시지요!”
“계 선생님이라고요?”
두장생의 마음이 이유 없이 쿵쿵 뛰었다.
‘이 계 선생님이 그 계 선생님이실까?’
천하에 계씨 성을 가진 이는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적지도 않았다.
‘설마 그렇게 공교롭겠어?’
두장생이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원은 그가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알고 급히 이렇게 덧붙였다.
“천사 대인,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저를 따라 계 선생님을 한번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생께서는 저희 재상부의 귀빈이시자, 재상 어르신은 물론, 두 분 공자와 공주 전하까지 무척 존경하시는 분이십니다.”
아원의 말을 들은 두장생은 자신의 추측에 좀 더 확신이 가기 시작했다. 윤 재상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가, 당금의 황상을 제외하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두 천사? 천사 대인?”
“사부님!”
“어? 아아, 기왕 윤 재상님의 귀한 손님께서 저를 뵙고자 하신다니, 응당 가서 인사를 드려야지요! 그럼 안내 부탁드립니다!”
“예, 그럼 저리 따라오시지요.”
두 아이는 그들보다 앞서 희희낙락한 모습으로 뛰어갔고, 아원이 두장생과 그의 제자를 이끌고 계연이 머무는 객사(客舍)로 향했다.
윤씨 저택은 그리 작지 않아서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뜰을 지나쳐야 했다. 두장생은 초조함과 기대를 품고서 회랑을 따라 고요한 화원을 통과했다. 그러다 마침내 객사로 향하는 공문(*拱門: 아치문)을 지나자 계연이 뜰 안의 돌 탁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두 천사, 그간 잘 지내셨나요?”
계연이 평온한 어조로 이렇게 인사하자 두장생은 무릎이 풀려 하마터면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추태를 면하고는 마찬가지로 넋이 나간 제자를 찰싹 때린 뒤, 함께 계연을 향해 장읍례를 올렸다.
“후배 두장생이 제자 왕소를 이끌고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윤씨 집안의 두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계연의 앞으로 뛰어왔다.
“계 선생님, 저희가 손님들을 데려왔어요!”
“그렇구나, 잘했다. 두 분 어서 예를 거두시고 와서 앉으세요.”
계연이 곁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뒤, 아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원은 그의 뜻을 알아듣고는 양손을 맞잡으며 예를 올린 뒤 천천히 물러났다.
두장생은 쿵쾅대는 심장을 억누르며 뜰 안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감히 자리에 앉을 엄두는 내지 못하고, 계연에게서 적당한 거리에 가만히 섰다.
“저어, 계 선생님, 선생님께서 여기 계시니, 윤 재상의 병세는…….”
두장생의 마음에는 두 가지 추측이 섰다.
첫 번째는 윤재성이 꼼짝없이 죽을 거라는 가정이었다. 계 선생님이 여기에 계시는데도 저렇게 상태가 좋지 않으니, 이는 누가 와도 구하지 못한단 뜻이었다. 그렇다면 어서 장례나 준비하는 게 나을 것이었다.
두 번째는 윤재성은 절대로 죽지 않으리란 가정이었다. 이는 계 선생님은 잠시 나서지 않고 계실 뿐이거나, 아예 이 병 자체가 가짜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