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가기연-584화 (584/892)

584화. 계 선생님의 위엄

양호는 어좌 앞에 잠시 서 있다가, 한쪽에 서 있던 노태감을 향해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폐하, 분부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어명을 전하라. 두 천사가 무엇이든 필요로 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마련해주고 최대한 협조하라.”

“예!”

노태감은 어명을 받고 어서방 밖으로 나가, 바깥에 있던 다른 태감에게 이를 전한 뒤 다시 어서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양호는 태양혈을 문지르며 어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윤재성이 다시 건강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는 실보다 득이 더 큰 일이었다. 양호는 자신이 아직 제위에 있을 때는 충분히 조정의 균형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퇴위한 후에는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양성은 훌륭한 후계자였지만, 아직 너무 젊었다.

겉보기에는 조정에서 구파(舊派)의 관리들이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나 소동을 일으킨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양호는 실은 구파가 그럴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몇 년간 조정의 세력들끼리 불과 물처럼 대립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씨 일가는 그동안 조정에 뿌리 깊이 박힌 구파 관리들의 세력을 와해하고 과거 제도를 개혁하는 동시에, 천거제(*개인의 덕행이나 학문적·정치적 능력을 기준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의 문턱을 높였으며, 곳곳에 학당을 설립하며 빈한한 집안의 서생들이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었다.

그렇게 해서 배경은 없으나 실력은 출중한 관원들을 뽑았고, 관원 평가와 승진 제도 또한 개혁했다. 아주 조금씩,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윤씨 일가가 이 모든 것을 현실화시킨 것이었다.

구파 관료들은 한 번 이를 의식하기 시작하자 사안의 엄중함을 즉시 깨달았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그간 누려온 모든 특혜를 포기하고 윤씨 일가를 포함한 다른 이들과 특혜를 나누거나, 혹은 윤씨 일가와 맞서 싸워야만 했다.

황제로서 양호는 어느 정도 윤씨 일가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조정의 상황이 격변하며, 특히나 어떤 소문들이 그를 신경 쓰이게 하던 때에 그는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는 조정 관리들에게 하나의 신호로 인식되었다.

그렇게 해서 양측의 힘이 격렬히 맞붙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열기에 찬물을 들이붓듯 윤재성의 상태가 갑자기 위독해진 것이다. 이에 한쪽은 전전긍긍하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고, 다른 한쪽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윤재성의 병세가 점점 더 나빠지자 그런 상황은 더욱 극명해졌다. 만약 윤재성이 이러다 세상을 뜨게 된다면, 구파 관료들이 승리하는 것이다.

태자인 양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은 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양성은 곧 자신의 스승이 부황에 의해 버려진 장기말이 되었다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양호는 자리에 앉아 그간의 모든 일을 천천히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대정의 국력은 거의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나날이 부강해져 왔고, 바로 이 때문에 그는 일대 명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를 되짚어보면, 수많은 황조가 최고로 번영했을 때 쇠락하기 시작했다. 그에 더해 두장생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양호는 돌연 자신이 지금 황조가 쇠락하기 직전인 그 순간에 있다고 느꼈다.

일평생 자신만만하게 살아왔던 양호는 노심초사하며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친애하는 윤 경은 우리 대정국이 강성해지는 단계가 이제 막 걸음을 뗀 것뿐이라 여러 번 말했었지…… 만약 짐이 아끼는 윤 경이 건강을 되찾기만 한다면, 아직 늦지 않은 거겠지……?”

* * *

넝쿨검은 스스로 부린 둔술(遁術)과 거센 바람에 힘입어 순식간에 몇 개의 주를 건넜다. 그렇게 해서 넝쿨검과 종이학은 순조롭게 계주 춘혜부에 이르렀다. 곧 구름 아래로 넘실대는 춘목강의 물살이 펼쳐졌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 넝쿨검이 번쩍하고 한 줄기 빛이 되어 구름층을 뚫고 내려갔다. 그러자 종이학은 검 자루 위에서 날개를 펼치더니 곧장 춘목강으로 향했다.

날씨는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춘목강 위에는 놀잇배가 잔뜩 떠 있었다. 곳곳으로 향하는 놀잇배는 크기도 색깔도 각양각색이었고,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종이학은 강물 위를 배회하며 화려한 놀잇배에 정신이 팔렸다가, 마침내 입에 문 쪽지로부터 무언가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고는 곧바로 강물 안으로 날아들었다.

저절로 생겨난 넝쿨검의 검령(劍靈)으로부터 비롯된 검의(劍意)와 넝쿨검의 본체에서 나오는 검의 기운은 너무 강해, 계연의 뜻을 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머나먼 북경 항주에서 늙은 용에게 소식을 전할 때는 쓸만했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오숭이 넝쿨검의 검의에 짓눌릴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종이학이 가장 적당한 전령이었다.

넘실대는 수면 아래로 종이학은 자신의 몸체에 착 달라붙은 공기막에 감싸인 채 부지런히 날개를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속도가 물고기들보다 빨랐다.

그 순간, 커다란 물고기 하나가 전방에 ‘괴상한 하얀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른 쫓아와 꿀꺽 삼키려 했다. 그러나 종이학이 날개로 커다란 물고기를 찰싹 때리자, 그것은 빙그르르 돌더니 기절한 채로 수면 위로 배가 뒤집혀 둥실 떠올랐다.

마침 작은 배 한 척이 그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 위에 탄 사람들은 커다란 물고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놀라며 기뻐했다.

“오, 저것 좀 봐, 엄청 커!”

“호오, 정말이네! 죽은 지 얼마 안 된 건가?”

“어서 건지자고, 저걸로 저녁밥을 먹으면 되겠다!”

사공이 천천히 배를 멈추더니 소매를 걷고 두 손으로 생선을 건져 올렸다. 그러자 물고기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이 파닥파닥 열심히 몸을 흔들었다.

“어이쿠, 아직 살아있었네! 어서, 이것 좀 잡아 봐!”

“하하하하……. 이렇게 큰 데다 신선한 대두어라니! 시장에서 샀다면 가격이 꽤 나갔을걸! 오늘 우리가 먹을 복이 있나 보군!”

종이학이 수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배 위의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종이학은 곧 고개를 돌린 뒤 다시 강 어딘가를 향해 헤엄쳤다.

* * *

춘목강에서도 춘혜부 부성과 가까운 곳의 바닥에는 기이한 모양의 거대한 검은 돌이 있었다. 종이학은 그 커다란 돌 가까이 다가가 위에 대고 부리로 몇 번 두드렸다. 겉보기에는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보였지만, 실은 톡톡, 소리가 날 정도였다.

곧이어 강물 바닥이 뿌옇게 변하더니 거대한 검은 돌 아래로 뱀같이 길쭉하고 거뭇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뒤쪽으로 방향을 스윽 돌리더니 곧 작은 종이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거대한 검은 돌은 사실 거북의 등껍질이었던 것이다.

‘새? 그것도 종이로 만들어진 새라니?’

오숭은 한 번도 종이학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제 등껍질 위에 앉은 종이 새를 보고 무척 의아해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종이학에게서 친밀함이 느껴졌다. 종이학은 날개를 몇 번 움직이더니 오숭의 머리 위로 올라 가볍게 한번 머리를 쪼았다. 그러자 계연이 보낸 신의(神意)가 곧바로 오숭에게로 전달되었다.

“계 선생님께서 내게 소식을 전하시다니, 지금 당장 가야겠군!”

그가 이렇게 말을 내뱉자 거품이 뻐끔뻐끔 생겨났다. 뒤이어 작은 종이 한 장이 종이학의 부리에서 오숭의 앞으로 떨어졌다. 육지의 백성들이 먼 길을 떠날 때 통행증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오숭처럼 오래 수행을 닦은 요물들이 경기부까지 가려면 자기 정체를 숨기거나 속세의 통행증과 비슷한 것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계연이 남긴 쪽지는 그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오숭의 혼잣말을 듣고 종이학은 곧바로 날개를 움직여 물 위로 뚫고 나오더니 높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오숭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라 공중을 올려다보자, 작은 빛이 반짝이더니 곧 사라져버렸다. 그로서는 종이학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계연은 비록 구체적인 시간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숭은 빨리 가면 갈수록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강바닥에 잘 묻어놓은 천일춘 몇 단지를 꺼낸 뒤, 춘목강을 따라 열심히 헤엄쳐갔다.

도중에 그는 우연히 곳곳을 헤엄치던 강청어를 만나, 강신(江神)께 자신이 계 선생님의 명을 받고 떠난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춘목강의 한 지류를 타고 곧바로 서남쪽으로 향했다.

* * *

오숭은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헤엄을 치고, 밤에는 기슭으로 올라와 서둘러 걸어갔다. 그러는 도중에 물의 신의 검문을 받거나 귀신들이 길을 막으면 오숭은 즉시 계연이 준 법령을 토해냈다. 그러면 상대는 곧바로 법령에 담긴 계연의 뜻을 느끼고 진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계연’이라는 이름은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 대정국 안에서는 물속이든 육지든, 신령에게든 터주신에게든, 위명이 자자한 이름이었다. 계연은 거의 전설 속에나 나올 법한 진정한 고인(高人)으로서, 누구나 그의 법령을 보면 곧바로 길을 터주었다.

그렇게 해서 오숭은 가는 길 내내 순조로울 수 있었고, 심지어는 몇 번이나 귀신들이 그에게 길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오숭은 계 선생님이 얼마나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 밤, 경기부와 강을 사이에 둔 유주 성숙부의 경계에 이르자 오숭은 다시 기슭으로 올라왔다. 그의 발아래로는 물살이 따라와 그가 질주하는 말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그러자 곧이어 그의 눈앞에 흐릿한 귀신들의 형체가 보였는데, 이는 성숙부의 야간 순시관들이었다.

오숭이 강변에 가까운 곳에 이르자, 야간 순시관들이 걸음을 멈추더니 나란히 오숭을 향해 인사했다.

“오 선생, 저 앞이 바로 대정국에서 가장 큰 강이자 용왕께서 머무는 통천강입니다. 이곳부터는 저희가 길을 안내하기 힘드니, 오 선생께서는 부디 조심히 가십시오!”

그러자 오숭도 사람처럼 뒷발로 디디고 일어나 그들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두 분 야간 순시관께서 직접 길 안내를 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저 혼자 가도 충분합니다. 부디 저 대신 성황신님과 모든 기관장께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예. 오 선생께서도 저희 대신 계 선생님께 안부 전해 주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들과 서로 공손히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후, 오숭은 약간의 초조함과 흥분을 느끼며 통천강으로 들어갔다.

비록 계 선생님께서 남기신 법령 덕분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가장 빠른 길을 통해 이곳까지 왔지만, 계 선생님은 그에게 경기부 성이 아닌 통천강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통천강에는 진룡이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 계연과 늙은 용의 관계를 알 리 없던 오숭은 과연 진룡이 계 선생님의 체면을 세워줄지가 걱정스러웠다.

과연 오숭이 강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을 순찰하던 야차 두 명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그들은 손에 든 삼지창을 들어 올려 오숭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어디서 온 물의 족속이냐? 통천강에는 무슨 일로 왔지?”

그러자 오숭이 얼른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저는 성씨는 오, 이름은 숭이라 하는 춘목강의 거북입니다. 계 선생님의 명을 받고 통천강에 왔습니다. 여기, 선생님의 법령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쪽지를 뱉은 뒤에 펼쳤다.

‘계연의 칙령이니, 이것을 지닌 자를 지나가게 해주십시오.(計緣勅命, 持此通行.)’

한 야차가 법령에 손을 대자, 종이 위의 글자에 빛이 흐르다가 사라졌다.

“정말 계 선생님의 법령이로군!”

이에 두 야차는 얼른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삼지창을 손에 쥔 채 오숭을 향해 인사했다.

“저희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오 도우는 강 어디로 향하십니까? 저희가 그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선생님께서는 도성 밖 강에서 기다리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러자 야차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명은 오숭을 이끌고 적당한 구간으로 향했고, 다른 한 명은 재빨리 용궁(水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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