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당사자와 이야기하세요
계연은 다시 바둑돌을 하나 놓더니, 기국을 한번 훑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매를 한번 휘둘러 바둑판을 거둬들였다.
“이렇게 하죠. 이왕 소씨 집안사람들을 만나고 왔다니, 그럼 다른 당사자들도 만나보는 게 좋겠어요.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말이에요. 그들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국사께서 결정하세요.”
“다른 당사자들이요?”
두장생은 멍하니 이렇게 되묻고는, 계연이 이미 아치문을 나선 것을 보고 얼른 뒤따라갔다. 그들은 저택을 나선 뒤에는 나는 듯한 속도로 거리를 지나 성을 나섰다. 그렇게 어느새 통천강 기슭 인적 드문 곳에 이르렀다.
드넓은 통천강에는 강물이 넘실대며 흐르고 있어서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하지만 두장생은 자신이 곧 누굴 만나게 될지 알았으므로,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때 계연의 품속에서 작은 종이학이 빠져나오더니, 날개를 펴고 계연의 주위를 빙빙 돌다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통천강 안으로 들어갔다.
계연은 강물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에 두장생은 그를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대략 반각(7~8분) 뒤, 수면에 물보라가 일더니 거대한 거북이 물살을 가르며 기슭을 향해 헤엄쳐왔다. 이를 본 두장생은 즉시 긴장하기 시작했으나, 동시에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흉악한 요괴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거북에게서 느껴지는 요기는 무척 짙었지만 삿된 기운은 없었다.
거북은 강변에 닿자 사람처럼 두 발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계연을 향해 두 앞발을 맞잡고 예를 취했다.
“오숭이 계 선생님을 뵙습니다! 대정국 국사를 뵙습니다!”
이에 두장생도 얼른 그를 향해 예를 올린 뒤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저, 저를 아십니까?”
그러자 거북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제가 점괘에 능하여 소소한 일은 좀 알 수 있지요. 또 전에 춘혜부에서 국사를 뵌 적도 있고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면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비단옷을 입고 팔에 걸친 띠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여인이 파도를 타고 나타났다. 바로 통천강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응약리였다.
“약리가 계 숙부님을 뵙습니다.”
응약리는 계연에게만 공손히 인사한 뒤, 거북과 두장생에게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오숭과 두장생은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이에 그들은 얼른 통천강의 신을 향해 공손히 인사했다.
계연은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곧바로 이렇게 물었다.
“소릉의 대가 끊긴 것이 약리 네 수단이니?”
응약리는 그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손가락을 접어 점을 쳐보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되었군요. 제가 한 것이라고 봐야겠네요. 첩실이 넷이나 된다니 아주 힘들겠어요. 이대로 대가 끊기는 것도 좋겠군요…….”
원래 응약리는 더 말할 생각이 없었으나, 계연이 물은 것이니만큼 좀 더 설명을 덧붙였다.
“계 숙부님, 예전에 그 소씨 공자와 단씨 여인이 제 앞에서 아주 정이 깊은 모습을 보이길래, 그 모습이 가상하여 저도 순순히 놓아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의 약속은 때로 쉬이 믿을 수 없기도 하지요. 이에 저도 두 번째 수를 남겨두었던 것뿐이에요.
게다가 원기가 회복되기도 전에 그리 급하게 첩실을 맞아들이고 이제 또 한 명을 맞아들이려 한다니요. 계 숙부님, 정말 약리가 그를 해친 것입니까?”
계연은 응약리의 말에 약간의 울분이 담긴 것을 느끼고, 자신이 소릉을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얼른 선을 그었다.
“당연히 네가 해친 것이라 할 수 없지. 나도 그 일에는 그리 큰 흥미가 없다. 그저 이 국사를 데려온 김에 물어본 것뿐이야. 두 국사, 당사자들께서 모두 오셨으니 알아서 이야기 나누세요.”
계연은 말을 마친 뒤 한쪽으로 가더니, 소매를 휘둘러 다시 바둑판을 불러냈다. 이번에는 탁자 하나도 함께였다. 그러고는 전에 멈췄던 부분에서부터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이는 누가 봐도 이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제가요? 저분들과 말입니까?’
두장생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삼킨 뒤, 겉보기엔 그럭저럭 온화해 보이는 늙은 거북과,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을 짓는 강신마마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는 소릉에게 일어난 일을 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두장생은 응약리를 피해 숨고 싶었으나, 응약리는 계연이 한쪽으로 가버리자 강가로 올라와 웃으며 먼저 두장생에게 말을 걸었다.
“대정국의 국사는 실력이 대단하구나. 계 숙부님을 찾아가 날 움직일 정도라니. 너희 황제조차 그럴 능력은 없을 텐데 말이야!”
두장생은 땀이 삐질 솟는 것을 느끼고는 얼른 응약리를 향해 허리를 구부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응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인은 정말로 그런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게는 계 선생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만한 힘도 없습니다. 마마께서 내리신 결정은 당연히 공명정대하실 테니, 소릉에게 일어난 일은 완전히 자업자득이지요!”
응약리는 평온한 안색으로 두장생을 한번 쳐다본 다음, “알겠다.”라고 말한 뒤 가버렸다. 이는 자신은 두장생의 일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그녀는 계연의 바둑판 옆으로 다가가 그가 바둑 두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계연은 불러낸 탁자 위에 바둑판을 올려놓고서, 자신은 땅바닥에 앉아 중도에 끊긴 대국을 잇고 있었다. 응약리는 탁자 맞은편으로 가서는 치마가 땅에 끌리는 것도 개의치 않으며 털썩 쭈그리고 앉았다.
“계 숙부님, 저 두장생이란 자와 무슨 관계세요?”
“저 사람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저 아는 사이이지만, 국사로서 대정국의 대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지.”
“아, 네.”
응약리는 대답하고는 고개를 돌려 강물 위의 늙은 거북을 바라보았다. 두장생은 계 숙부님과 관계가 그리 가깝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저 거북은 다른 것 같았다. 그녀는 통천강으로 돌아오자마자, 저 거북이 계 숙부님의 법령을 들고서 춘혜부에서부터 왔다는 보고를 들었다.
한편, 응약리가 자리를 떠나자 두장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거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거북은 비록 거대했지만, 얼굴만은 선량해 보여 말을 섞기 어렵지 않을 듯했다.
그는 먼저 거북을 향해 공손히 예를 올린 뒤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오 도우, 소씨 집안은 대정국 조정의 중신으로, 저도 도우와 그들의 깊은 은원 관계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수하려면 원수를 찾아야 하고, 빚을 받으려면 빚쟁이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처럼, 소씨 집안의 후손들이 소정의 죄를 완전히 뒤집어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일정한 죄업은 그들도 책임져야겠지요. 그…… 오 도우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두장생은 이 상황이 아주 난처했다. 그는 어쨌든 이 나라의 국사였으므로, 거북에게 소씨 집안을 모두 죽여 이 일을 끝내버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에 말을 한가득 늘어놓고는 오숭의 생각을 물었다.
“하하하하…….”
오숭은 웃음을 터트리며 한쪽에 앉은 계연과 응약리를 슬쩍 바라본 뒤 다시 두장생에게 말했다.
“두 국사도 국사로서의 책임이 있어, 요물이 대정의 중신에게 손을 뻗으려 하니 어쩔 수 없이 이 흙탕물에 뛰어든 것을 알고 있소. 고생이 많군요.”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두장생은 그의 말을 받아 이렇게 대답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숭은 고개를 돌려 통천강을 바라보더니, 한참 후에야 감회에 잠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얼핏 보면 이 통천강은 내게 춘목강과 조금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오. 세찬 강물은 멀리멀리 흘러가, 마침내 바다로 흘러간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
오숭은 다시 고개를 돌려 두장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두장생이 만난 사람들 대부분보다 더욱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늙은 거북은 수백 년 동안 헛되이 세월을 보내다가, 이제야 수행의 궤도에 올랐소. 장래에 득도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게 되었지. 춘목강의 백 강신께서도 비록 내가 수백 년간 고된 수행을 닦아왔지만, 이제 대운이 바뀌어 그간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소.
반면 소정은 이미 한 줌의 흙이 되어, 영혼은 저승에서 온갖 고초에 시달리다 흩어졌겠지. 이에 나도 본말을 전도하여 오랜 원한 때문에 그의 후손들에게 과도한 분노를 풀어낼 생각은 없소. 그 때문에 앞으로의 수행에 지장이 생기길 원치도 않고.”
이 말을 들은 두장생은 깊이 안도하며, 이 요괴가 아주 사리에 밝다고 생각했다. 물론 계 선생님의 체면을 봐준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들어보니 넓은 도량을 발휘하여 소씨 집안을 놓아줄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어진 오숭의 말에 두장생의 심장이 덜컹했다.
“하지만 그래도, 소씨 집안은 사라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오.”
두장생 뿐만 아니라 막 바둑돌을 내려놓으려던 계연도 잠깐 손을 멈칫할 정도였다. 응약리는 계연을 보다가 다시 오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오숭의 몸에서 어떤 악한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숭은 두장생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소릉은 대를 이을 가능성이 없다 하고, 내가 점쳐본 결과 소도에게도 대를 이을 능력은 없소.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씨 집안의 혈맥은 완전히 끊기겠지. 그럼 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고 말이오, 다만…….”
처음에 그의 말을 듣다가 안도하며 미소를 짓던 두장생이 막 입을 떼려던 순간, 오숭의 ‘다만’이라는 말에 하려던 말이 다시 그의 입으로 쏙 들어갔다. 얼굴에 띤 미소도 그대로 굳어버렸다.
‘거북 어르신, 그래서 어찌하고 싶으신지 통쾌하게 좀 말해주십시오!’
“나는 소씨 부자가 이곳에 와서 내게 300번 머리를 조아리길 원하오. 또한 내 조건 한 가지를 들어주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도성의 귀신들도 감히 나를 막지는 못할 것이오!”
오숭은 조금의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고, 동시에 맹렬한 요사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 포효한 거대한 거북의 형상이 나타나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선뜩해졌다.
오숭의 말을 들은 계연도 이것이 그가 두장생을 겁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다만 오숭의 말에 담긴 감정만은 진짜였다.
계연은 고개를 돌려 두장생이 너무 놀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걸 보고는, 가볍게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탁!
바둑돌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둑판에 닿는 소리는 다른 이는 거의 듣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두장생만은 무척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 소리에 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오 도우께서 이렇게 아량을 베풀어 주시다니, 저는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사실, 제가 도우의 입장이었다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소씨 일가를 갈가리 찢어놓았을 것입니다. 도우의 말씀은 제가 반드시 소씨 집안에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들이 감히 겁이 나서 오지 못하겠다면, 끌고라도 오겠습니다!”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는구려, 두 국사!”
두장생의 말에 마음이 흡족해진 오숭은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